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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대교수들, 대법원에서 박윤식에 승소한 감사예배, 2500명 참석)
총신대교수들의 박윤식이단연구보고서(3)
3. 에덴동산을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성경의 역사성을 거부함
박윤식 씨는 에덴동산의 역사성을 거부하고 있다. 에덴동산의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역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에덴동산은 어디에 있는가?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산임을 알 수가 있죠? 그런데 사 52장1절 말씀 보니까 죄 속에서 헤매다가 예수의 십자가 구속의 은총으로 성령의 세례 충만 받아 성결의 은총을 받은 여러분들의 심령이 에덴동산입니다. 하나님이 오시갔어? 안 오시갔어? (오셔요) 창 3장에 하나님이 동방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오셨다 갔지요. 이게 실지 있는 에덴동산이 아니야. 인도에 에덴동산이 있겠다 하여 가 봐도 없고 중동 지방에도 에덴동산은 이 세상에 없읍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곳이 세상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이 낙원이고 천국이야. 미신같이 믿지마. 예수 천당 아니야 말씀을 믿고 알아야 돼.
흥미롭게도 박윤식 씨는 본 교수회가 발표한 10가지 사항 모두를 부인했으면서도 에덴동산에 관해서는 이것이 자신의 말임을 인정하였다. 에덴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에덴동산이 지구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한 말이라는 변명과 함께.(각주 27: "우리가 부인하는 것은, 에덴동산이 지금 인도, 중동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현재적 역사성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현재의 위치를 알기 어렵다는 얘기). 사탄의 유혹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고 타락하여 에덴동산에 쫓겨난 우리가 더 이상 잃어버린 과거의 에덴동산을 그리워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히려 지금 우리 성도에게 있어서는 영적인 의미에서 성령세례를 받아 성령의 은총을 입은 기쁘고 즐거운 성도들의 심령이 에덴동산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다시 말해 에덴동산의 영적 의미를 우리 심령에 적용시켜 강조한 말씀이다."(서북노회, '평강제일교회 박윤식 원로 목사의 이단성 여부에 관한 보고서', 15쪽))
그렇지만 이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이다. 에덴이 위치했던 역사적 현장을 찾을 수 없다는 것과 에덴동산이 실제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역사 속에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지만 현재 찾을 수 없다고 해서 에덴동산이 실재한 동산이 아니라고 말하면 곤란하다. 그가 이해한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이 낙원이고 천국'이라는 말 속에 함축되어 있다.
박윤식 씨는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를 설명하는 것"(각주 28: <십 단계 말씀 공부>, 14쪽)을 주장한다. 똑 같은 원리를 에덴에도 적용한다. 박윤식 씨는 에덴을 영적 상징적으로 해석하며 십 단계 말씀 공부에서 하와와 아담의 타락 사건을 "기쁘고 즐겁던 마음, 즉 에덴을 잃었으니 고통의 광야로 쫓겨난 것으로 비유"(각주 29: <십 단계 말씀 공부>, 10쪽)하였다.
실제로 대성교회(현 평강제일교회)에서는 십 단계 말씀 공부 시간을 통해 '에덴동산', '선악과', '생명나무'가 비유라고 가르친다.(각주 30: 홍순분, 십 단계 말씀공부 '타락', 녹취록) 인간의 심령을 에덴으로 풀어가는 것은 박윤식 씨의 사상에서 반복하여 나타난다.(각주 31: 1995년 이후는 에덴이라는 말 대신 천국이라는 말을 대체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1996년 1월 28일 <평강의 소식>에는 신학지식을 소개하는 '귀에 담아 둡시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예수 믿다가 죽으면 무조건 천국가는 줄 착각하면 안 된다. 죽어서 천국 간다는 것은 마음이 천국화(天國化)된 자가 죽었을 때 천국 가는 것이다. 우리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기 위해 예수 믿는 것이다. 말씀 자체가 하나님(요 1장1절)인데 몰라보기 때문에 말씀 자체를 씨로 비유(마 13장18~19절) 씨가 떨어져 생명역사 이루어지고 하늘나라 아들들, 즉 좋은 씨(마 13장38절)가 되는 역사.") 십 단계 말씀 공부 “초림”에서도 박윤식 씨는 에덴동산을 마음으로 풀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아담이 거하던 에덴동산, 기쁘고 즐겁던 그 마음이 떠나고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악이 자리 잡게 되었다.(에덴이 황야로 바뀜)"(각주 32: 십 단계 말씀공부, '초림' 23쪽)
이처럼 에덴을 상징적으로 풀어가는 박윤식 씨의 해석과 주장은 통일교 계통인 변찬린의 <성경의 원리> 상권 '제 4절 에덴동산은 어디에 있나'의 내용과 매우 유사하다:
"많은 신학자들과 성경 고고학자들이 에덴동산의 소재를 규명하려다 실패하였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창세기 2장에 근거하여 에덴동산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발원하는 그 어디에 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 에덴동산의 소재는 어딘가? 또 그 현주소는 어딘가? … 한 마디로 잘라 말해서 에덴동산은 땅에 있는 과수원이 아니다. 에덴동산은 하늘 차원에 있는 도덕 과수원이다. …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었다는 의미는 무슨 뜻일까? 이는 아담이 구도하는 모습을 시적(詩的) 메타포어(隱喩)로 나타낸 문학적 표현이었다.
생명나무가 있는 낙원은 땅의 차원이 아닌 하늘 차원임을 알 수 있다. 에덴동산은 낙원이며 동시에 셋째 하늘인 것이다. 이 비밀을 모르고 기독교는 이날까지 에덴동산이 중동지방의 어느 황야(奧地)에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에덴동산의 암호를 해독 못했으니 다른 문제가 어떻게 풀릴 수 있겠는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의 함정(陷穽) 때문에 에덴동산을 지상에 있는 낙원으로 오해하였던 것이다."(각주 33: 변찬린, <성경의 원리> 상권, 71~74쪽)
창세기에 기술된 에덴은 실제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시공 속에 존재했던 동산이었다. 현재 우리가 이 지구상 어느 곳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해서 에덴의 역사성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에덴동산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것은 개혁신학에서는 수용할 수 없는 비 성경적 가르침이다.
4. 자신이 "말씀의 아버지, 동방의 아버지, 말씀의 주인"이라 말한다
박윤식 씨는 지금을 성약시대라고 부르며 셈족의 후손, 그것도 동방에 동방의 육천년을 안은 아버지가 오셨다고 한다. 그렇다면 고달픈 동방에 오신 아버지는 과연 누구인가? 박윤식 씨는 자신이 직접 엮은 <말씀의 승리가>에서 동방에 말씀이 나타날 것이고 그가 셈의 후손 황인종을 통해 이 땅에 태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전 교파를 하나의 세계로 통할 수 있는 교리이면서 이 땅위에 핵심으로 세워질 수 있는 하나의 근본진리를 통한 말씀이 나타나지 않으면 잃어버렸던 에덴동산을 찾으시려는 아버지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끝 날에 뜻을 대한 성도여! 곤충도 빛을 찾아 모이거든 하물며 성도에게 있어서랴.
마지막 이 말씀에 섭리자의 눈물을 보았던가? 한 민족이여! 끝날 뜻은 “셈”의 후손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아는가? 왜 그런가?(창세기 9장26~27절) 그리하여 제일 선민인 이스라엘도 '셈'의 후손이었고 예수님도 백인종이나 흑인종으로 태여 나시지 않 고 황인종으로 태어나신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끝날 특수 사명을 셈의 후예 곧 황 인종을 통하여 성취하는 것이 하나님의 절대 뜻이다. (이사야 59장19절, 24장15절, 41장25절, 43장5절, 46장11절 다니엘 11장43~44절, 묵시록 7장2절)
오랫동안 깊이 잠들었던 동양의 한 민족이여! 일어나 빛을 발하라(사 6장1절) 우리나라 이름 중의 하나 즉 조선(朝鮮)은 외국 사람들이 일컫는 대로 고요한 아침의 나라이다. 이 조선이란 국호 역시 우리나라 민족의 사명을 나타내는 말이니 곧 세계만방에 빛을 발할 사명이 있다는 말이다.
창세기 1장3절~묵시록 22장5절까지는 빛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하나님이 한국민족에게 임마누엘 되셔서 그 빛을 세계 여러 민족에게 비취게 하실 것이다.(시 4편6절) 그리하여 우리 한민족은 그 영광의 빛을 받아 어두운 세계에 반사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합 3장3~4절)"(각주 34: 박윤식, <말씀의 승리가>(일석장로교회 전도부), 7~8쪽)
셈의 후손으로 동방에 아버지가 오실 것이라고 말한다. <말씀의 승리가> 29장 '동방의 아버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고달픈 동방에 오신 아버지
역대 선지 예언대로 말씀 가지고
셈 장막 거하심 영원하시니
끝날 성도 영계 눈떠 말씀 따르리
끝없는 불신 박대 눈물 속에서
말씀만을 따르리라 섬기 오리라.
'동방에 오신 아버지'는 '말씀 아버지'를 말한다. 박윤식 씨는 자신이 가르치는 말씀이 성경 말씀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말씀은 '동방에 오신 아버지', '말씀 아버지'를 뜻한다. 말씀의 승리가 22장 '아버지의 이름 권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지금은 아버지 이름 가지고서 어느 누구 믿고 순종만하면
말씀 아버지의 이름 하나로서 영원한 구원을 변화로 받네
말씀 아버지 권세 있도다, 끝날 말씀으로 나가 싸우라
말씀 아버지 가는 곳마다 만물들이 모두 무릎 꿇리라."(각주 35: <말씀의 승리가> 41쪽)
셈의 후예 곧 황인종을 통하여 오시는 '아버지', 그가 누구인가? 분명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도 초림의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박윤식 씨 자신인 것이다.
대성교회는 이단 시비가 일자 1991년 2월 목회와 신학에 대성교회 교인들이 부르는 아버지는 평범한 인간관계 속에서 부르는 아버지 일 뿐이라며 변명했지만 대성교회에서 아버지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각주 36: 1983년 박윤식 씨는 '말씀의 아버지, 동방의 아버지, 말씀의 주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복음으로서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니라(고전 4장14~15절),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대하여도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장19절)[라고 말하고] 바울은 목자적 입장을 가정적 용어를 통해서 교인을 자녀 같이 사랑하는 바울적 뜻이요, 말씀 자체는(요 1장1절) 예수 그리스도요, 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갈라디아 교회의 믿음의 아버지였다."(박윤식 답변서)
<말씀의 승리가>의 '제야의 아버지를 맞음'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동문을 열다
먼 수정의 하늘
수직의 연막 길 넘어
구중의 유리 바다
그 언제부터인가?
백마를 탄 초인의 소리
그 노호 창검의 소리가
내 가슴을 뚫어 심장의 고기를 뜯고
또한 천년의 사슬을 끊는다 하여
내 가슴 다시 전율한다.
서문을 열다.
낙조에 비낀 어둠의 긴 지평선
그 넘어 흑암에
기아와 분쟁 질투 사망의 허망이다.
절망의 영역 검의 도성에
동방에 육천년을 안은 자
눈물고초 기아의 육천년을 메인 자
이웃을 불러 동쪽으로
푸른 안개의 문을 손짓하는 이천년의
사나이와
구름에 낀 산 바위에
글자로 묶어 놓은 사천년의 사나이와
외면을 하고 지옥으로 가는 자
모두들 그를 지옥으로 가는 사나이라 하였다.
또한 그도 지옥으로 가는 길이라 말했다.
x x x x
1963년의 마지막 밤이다.
나는 이 동서문 십자로에서
온 세상이 던져 버린 창밖, 이 사나일
창세의 아버지로 맞았다.
창세의 아버지 ...!
하늘이 진동한다.
(땅으로 ....어서)
오래 동안 하늘 행랑방에서
아비 덕분의 덕만 바라보면 아들과 그 종들이
아버지 떠난 하늘에서 아우성친다.
고달픈 동방
이 기슭에 외로이 오신 아버지 -.
풀지 못한 땅의 지옥문을
활짝 열으신 나의 아버지
이제 사슬에서 놓이는 무정갱이와
밥상을 함께 하시고
하늘의 소동을 웃으신다.
손에는 무거운 검을 드시고
백마를 달리시는 찬란한 웅자이심에
우리도 그 뒤를 달린다.
백마를 타고
가장 미운 것과 사탄은 넘어지고
이제 영광의 날이 올찌니
땅의 이 아들들의
한없는 향연의 날이 올찌니
오-영광이여!
하늘의 그 영광이여!
(각주 37: 박윤식, <말씀의 승리가>, 12~13쪽. 1996년 3월 31일 <평강의 소식>에 실린 대학선교회 문준혁이 기고한 글 '하나를 찾아서'는 위 박윤식 씨의 가사 내용에 담긴 중심 사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하나를 찾아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또 그를 찾는 분이 계십니다. 목숨을 버리기까지…. 하나님께서는 6천[년] 역사 속에서 오직 그 하나를 찾기 위해 영원히 변치 않는 한 뜻으로 일해 오셨다. 많은 인간들의 불신과 배신 … 그리고 어처구니없는 오해와 핍박 속에서도 홀로 눈물지으시며 그 하나를 애타게 찾으셨다. 누가 이런 심정을 이해하고 이런 사랑을 알아 줄 것인가? 누가 이러한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고 하나를 찾아 나설 것인가? 하나를 귀해[히] 여기시고 하나에게 나타내시는 그 뜻이 누구에게 살아 있는가? 지난 한해 대학선교회를 돌아보면 은혜 가운데 풍성한 말씀을 받아 성장한 한해였다고 할 수 있다. 이제는 받은 말씀의 터 위에서 우리의 분량 등을 채워 나가라는 말씀을 받았다. 그리고 열매가 없음을 한탄하시는 그 눈물을 보았다. 또 전체의 마침이 될 한 사람을 찾으라는 말씀을 받았다." 여기 전체의 마침이 될 한 사람이 누구인가?)
'고달픈 동방 이 기슭에 외로이 오신 아버지'가 과연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라고 가르치셨던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인가? 그것도 아닌 것 같다. 하나님이 동방에 외로이 오셨다고 표현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면 '고달픈 동방 이 기슭에 외로이 오신 아버지'는 과연 누구인가?
대성교회에서 발행한 기관지 <대성> 7호(80. 7.25) 3면에는 "말씀이 인격화한 사람, 인격이 말씀화된 사람, 인격화된 신앙, 신앙화 된 인격의 사람이 역사 위에 걸어와서 밝히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때입니다"(각주 38: <대성> 7호(80. 7. 25), 3쪽)라는 말이 나온다.
그렇다면 과연 이 사람이 누구를 가리키겠는가?(각주 39: 평강제일교회 교인들은 박윤식 씨를 참 아버지, 선의 아버지, 말씀 아버지로 따르며, 성경에서 말씀의 아버지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이다. 오래전의 일이지만 "대성교회 당회장을 지낸 김 모 목사의 말에 따르면 박윤식 씨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을 사람이 200명 쯤 되며 전교인의 20% 쯤은 박윤식 씨를 말씀 아버지 재림 예수로 열렬히 믿고 있다"(정정조, (1980년 10월 25일 <大聲>, 7면)고 한다.) '역사 위에 걸어온 한 사람이며 말씀이 인격화된 한 사람'이 2000년 전 베들레헴 말구유에 나신 초림 예수를 가리키는 것인가?(각주 40: 대성교회에서 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1995년 4월 22일 자 대학선교회가 발간하는 <휍시바>에는 회장 박희창이 '때를 바로 아는 지혜'라는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성경의 때는 어떤 시간적 개념이 아닌 구속사적 사건이나 그 사건의 중심이 되는 인물을 지칭한다. … 그 의미를 확대하여, 때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이를 아는 영적 분별력을 말한다. … 이제 우리는 아버지 격의 말씀이 우리 앞에 섰을 때, 그 말씀의 능력을 믿어 드리고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 앞에 선 '아버지 격의 말씀'이 누구를 말하겠는가? 탁명환 사건이 난 이후에도 대성교회 안에는 여전히 우리 앞에 선 '아버지 격의 말씀'이 존재하고 있고, 그가 가르쳐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성경에는 구약의 때, 신약의 때, 성약의 때 등 세 가지의 때가 있는데 구약과 신약의 때에는 '은유와 비유'로만 말씀하시고 성약의 때에는 동방에 외로이 오신 아버지를 통하여 직접 '말씀'하신다는 것이다.(각주 41: '성약'의 때는 김백문이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이며, 이후 통일교에서 즐겨 사용하고 있다. 통일교에서는 1994년부터 성약시대에 진입한 것으로 보고 1994년 성약시대 원년으로 보고 있다.) 박윤식 씨는 이렇게 자신을 필요 이상으로 높이며 강조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삼위 일체 하나님만을 내세우는 개혁신학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비 성경적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5. 말씀과 진리를 구분한다: "주님은 말씀의 실체요 진리는 주님을 소개하고 설명하는 참(眞理)"이라고 주장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다. 그런데 박윤식 씨는 말씀과 진리를 구별하며 말씀은 생명이라고 강조하고 진리는 참이라고 하나 결국 사망이라고 한다. 그에게 진리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진리를 통해 말씀에 이른다고 보고, 진리 단계에 머무르지 말고 말씀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한다. 진리 단계를 떠나서 말씀을 깨닫고 말씀을 만나야 한다고 말한다. 박윤식 씨가 과연 말씀과 진리를 구분하고 있는가는 박윤식 씨 자신이 밝힌 답변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1983년 10월 박윤식 씨는 말씀과 진리를 구분한다는 비평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말씀과 진리
주님은 말씀의 실체요 진리는 주님을 소개하고 설명하는 참(眞理)이다. 사 9장6절은 말씀의 과정이요, 사 53장1절은 대 속죄주의 예언이다. 주님을 영접한 자에게는 주님은 주님 됨을 알려주셨고 주님을 영접치 않는 자에게는 숨기시고 비유만 주셨다. 비유대로 있을 때는 진리요 해명했을 때는 말씀이다.(눅 8장9~11절, 히 9장9절, 갈 4장24절)"(각주 42: 박윤식, '답변서')
그의 답변을 액면 그대로 인정한다고 해도 진리와 말씀을 구분하는 것이 명백하다. 박윤식 씨는 "주님은 말씀의 실체요 진리는 주님을 소개하고 설명하는 참(眞理)"이라고 주장하나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시며, 진리 자체이시다. 박윤식 씨는 진리를 부정하지 않는다. 진리의 중요성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진리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진리의 양면성 즉 그 중요성과 한계가 동시에 노출된다. 진리와 말씀을 구분하고 '진리'만으로는 부족하고 진리 단계를 넘어 말씀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진리를 넘어 '말씀'을 생명을 낳는 좋은 의미로 사용하여 참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 사역의 성취를 평가 절하한다.(각주 43: 1982년 <대성>에 실린 레슬링 출신 박성모 전도사의 간증의 글에서 진리와 말씀을 구분하는 것이 명백히 드러난다. ) 1991년 목회와 신학에 '왜곡된 진실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글에서 자신이 말하는 '진리'란 "세속적 인위적 진리를 말한다"(각주 44: '왜곡된 진실에 대한 우리의 입장', <목회와 신학> (1991년 2월), 64쪽)고 변명했지만 십 단계 말씀 공부나 기타 자료를 참고할 때 사실로 보기 힘들다.
최근 들어 여러 자료를 통해 박윤식 씨와 대성교회가 진리와 말씀을 구분한다는 것이 사실이 아닌 모함이라고 주장하나 진리와 말씀을 구분하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사실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첫째 기관지 <대성>에 실린 대성교회 박성모 전도사의 증언이고 둘째는 대성교회 대학선교회 교재에 실린 관련 내용이다. 1982년 <대성>에 '나는 하나님의 실수작일까?'라는 신앙 간증문에서 박성모는 이렇게 고백한다:
지난 여름 어느 날이었읍니다. 집에 돌아와 보니 낯선 테이프가 하나 있어 들어 보았습니다. 거기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제 머리에 불꽃을 튀었습니다. 그거야 말로 지금까지 제가 찾고 찾았던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성교회 전도사님이 가르치신 성경공부 내용을 녹음한 것을 아내가 빌어다 놓았던 것입니다. 저희 부부는 며칠 후 그 전도사님을 모셔서 성경공부를 시작했읍니다. 가르치시는 말씀은 번개 치듯 가슴에 쾅쾅 부딪쳐 왔읍니다.
그날은 진리와 말씀에 대한 것이었는데 처음에는 의아하기 짝이 없었읍니다. 저는 지금까지 진리와 말씀을 구별해서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또 어디서 그런 가르침을 받아 본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긴장된 마음으로 마음을 써서 귀를 기울였읍니다. 한참 만에 "아! 진리는 그 어떤 실체를 가르치는 참된 소개의 말이지 그 진리가 소개하는 실체 자체는 아니구나"하는 깨달음이 있읍니다. … 성경은 '진리'를 '참'이라고 해석하고 있었읍니다.(요1 4장6절, 요3장21절) 그러니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과 생명)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참되다고 소개하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제게는 정말 큰 깨달음이 아닐 수 없었읍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저는 대성교회를 찾게 되었읍니다.(각주 45: 박성모, 나의 간증 '나는 하나님의 실수 작일까?' <대성>(1982년 12월 30일))
이처럼 진리와 말씀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고, 또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 이것은 1980년대 초 이단 시비가 발생했을 때만 그렇게 가르쳤는가? 아니다. 그 후에도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을 분리하는 것이 평강제일교회 안에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평강제일교회로 교회 명을 바꾼 뒤에 출간된 자료를 통해서도 분명하게 드러났다. 1995년 이후에 출간된 평강제일교회 대학생선교회에서 교재로 사용하고 있는 <말씀의 단계>(The Steps to the Word)에 있는 '진리와 말씀' 주제에 도표로 다음과 같이 표시되어 있다.
진리: 땅의 것(요 3:12)
하나님의 말씀: 하늘의 것
(1) 자유케 하는 세계(요 8:32)
(2) 빛의 세계(요 3:21)
진리: 어두움(=예표, 비유) (마 13장34절, 요 16장12절, 25절)
하나님의 말씀: 실체(히 8장5절, 9장9절, 10장1절)
진리: (누룩으로) 발표시킨 빵
하나님의 말씀: (누룩 없이) 발표시키지 않은 빵
진리: 어린 아이의 일(히 5: 11, 6: 1)
하나님의 말씀: 어른의 일
진리: 젖
하나님의 말씀: 단단한 음식
진리: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진리
하나님의 말씀: 의에 대한 가르침(악으로부터 선을 구별)
진리: 떡(마 4장4절)
하나님의 말씀: 포도주(하나님의 말씀)
위 도표에서 보여주듯이 박윤식 씨와 평강제일교회는 여전히 진리와 말씀을 구별하고 진리를 '땅의 것', '(누룩으로) 발표시킨 빵', '어린 아이의 일', '젖',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진리', '떡'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의 것'으로 '자유케 하는 세계', '빛의 세계', '사실(또는 본체 자체)', '누룩 없는 발표시키지 않은 빵', '어른의 일', '단단한 음식', '의에 대한 가르침(악으로부터 선을 구별)', '포도주(하나님의 말씀)'라고 한다.
다음 <말씀의 단계>에 나타난 글이 보여주듯 평강제일교회는 예수님이 진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 의미는 전통적인 교회에서 이해하는 의미와 상당히 다르다.
"진리는 말씀으로 인도하는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다만 말씀에 이르는 과정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진리 관계에만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한다.
3.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가 되었다.
그는 말씀 자체로써 빛과 생명의 본체이다. 그러나 본질에서 생명과 말씀의 진정한 형상인 그는 이스라엘의 몰이해와 불신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요 3장12절, 6장60절) 결국 그는 진리의 수준으로 낮아졌다. 그리고 이 진리로 하나님의 뜻을 주려고 했다. 이것은 그의 일이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삼단계로 나뉘어졌음을 의미한다.(요 17장17절, 14장6절) 진리의 단계로 떨어진 예수는, 비유와 상징으로 하나님의 뜻을 주었다. 그리고 이것들이 아니고는 그는 그것을 줄 수 없었다. 즉 그 말씀은 땅에 감추인 보화처럼 되었으며 이 숨겨진 보화가 드러나게 되는 말씀의 때가 남겨졌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말세)가 그 말씀의 때이다. 인자가 이 시대에 상징이나 비유가 아닌 드러난 말씀으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뜻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에, 그가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말하기를 원했던 아버지의 온전한 말씀이 인자를 통해 선포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일이 완성될 것이다.(각주 46: <말씀의 단계>(The Step to the Word)(서울: 평강제일교회 대학선교회, 1995), 17쪽)
진리와 말씀을 구분하고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두 사실[진리와 말씀]의 결론은 생명 자체인 말씀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붙잡아야만 한다."(각주 47: <말씀의 단계> 16쪽) 진리의 수준으로 떨어진 예수는 본래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이 땅에 와서 비유와 상징으로만 하나님의 뜻을 주어 "말씀이 땅에 감추인 보화처럼 되었으며 이 숨겨진 보화가 드러나게 되는 말씀의 때가 남겨졌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말세)가 그 말씀의 때"(각주 48: <말씀의 단계> 17쪽)라는 것이다.
초림 주 예수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억울하게 죽은 것이고, 사탄이 모르게 십자가의 피 속에 말씀을 묻어 두셨는데 말세에 그것이 드러낼 분이 오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말씀의 승리가>에 나타나듯 '말씀'을 받은 끝 날의 아버지이다. 그렇다면 그가 과연 누구이겠는가.(각주 49: 그는 1980년 6월 8일 고전 10장 1~13절의 말씀을 가지고 행한 '말씀이 인격화 한 사람'이라는 설교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말세는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의 때입니다. … 말씀이 인격화한 사람, 인격이 말씀화된 사람, 인격화된 신앙, 신앙화된 인격의 사람, 이 역사 위에 걸어와서 밝히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때입니다. 우리는 어서 빨리 그 말세를 잘 만납시다. 만나서 어둠을 끝장냅시다. 만나야 이 나라 이 민족이 새 역사의 아침을 맞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꼭 말세를 잘 만납시다." 여기서 말하는 '말씀이 인격화한 사람'이 누구인지 설교에서는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 여기서 말하는 '말씀이 인격화한 사람'은 초림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이미 초림하신 그 예수를 가리켜 이 역사 위에 걸어와서 밝히 나타나기를 고대한다는 표현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그를 만나야 이 나라 이 민족이 새 역사의 아침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박윤식 씨와 대성교회는 '말씀을 받을 기회'(각주 50: 박윤식, '생각과 기회', <평강의 소식>(1995. 10. 22))를 놓치지 말고 붙잡을 것, '말씀을 만난 사람'(각주 51: <평강의 소식> 1996년 3월 31일. 여기서 이희정이라는 한 여자 성도는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서 온전한 마침을 이루어야 한다"며 "전체의 마침이 될 하나를 찾는 역사로 내 안에서 잃었던 말씀을 찾는 생의 전환점"을 가질 것을 권한다.)이 될 것을 촉구하였고 그리고 평강제일교회 교인들은 '그 말씀'을 영접할 때 마지막 남아 있는 안식에 들어갈 수 있다고 본다.(각주 52: 1993년 4월에 발행된 대성교회 기관지 <참 평안>에는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며'에 이런 기록이 있다. "그래서 안식일의 주인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이다(막 2장28절).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예수를 영접하지 않으므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히브리서 4장3~11절에서는 이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안식이 있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다윗의 예언처럼 '어느 날' 안식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그 말씀을 다 영접하여 남아 있는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야 한다.")
6. "인간이 신성을 가지게 된다"고 주장한다.
박윤식 씨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떠나고 사탄의 영이 들어와 사탄의 집이 되고 말았다"(각주 53: <십 단계 말씀 공부>, 46쪽)고 주장한다. 아담을 떠난 거룩한 영은 들어갈 곳이 없어 수면에 운행하시는데, 잃어버린 영을 다시 찾아 주기 위해 제사를 허락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 먹으므로 인하여 Ad[아담]의 마음속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靈이 떠나고 사탄의 靈이 들어와 사탄에 집이 되고 말았다. 아담을 떠난 (말씀) 거룩한 영은 들어 갈 곳이 없어서 수면에 운행함. 즉 人의 心 속에 들어가지 못하고 떠도는 상태.
(구약시대)
잃어버린 영(λ)을 다시 찾아 주고자 우매한 인간들에게 제사법을 주셨다. Ad은 두 마음(두 주人)(θ의 靈, 사탄의 靈)을 섬기게 되었기에 그의 자손 代부터 (창 4: 3-4) 가인과 아벨을 통하여 제사를 지내도록 지시(제물과 함께 =마음을 바치기 위한 연습)(각주 54: (십 단계 말씀 공부>, '성전', 46~47쪽)
아담이 타락한 후 하나님의 영이 떠나고 사탄의 영이 들어왔고, 아담을 떠난 거룩한 영이 들어갈 곳이 없어서 수면에 운행한다는 주장이나 잃어버린 영을 다시 찾아 주기 위해 제사법을 주셨다는 주장은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과 다르며 개혁신학의 가르침과 맞지 않다.(각주 55: <십 단계 말씀 공부>, '십자가의 피' 62쪽. 박윤식 씨는 할례에 대해서도 이렇게 주장한다. "할례를 받으라! (자신에 더러운 죄를 내어 보내는 의미로 신체의 일부를 쪼개어 피를 대신 내어 보냄)")
박윤식 씨는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서 잃어버린 그 영"을 찾아 "본래의 상태"를 회복하면 인간이 신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누구나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서 잃어버린 그 영을 찾게 되면 본래 상태의 회복이니 하나님의 형상 즉 신성을 가지게 된다."(각주 56: <십 단계 말씀 공부>, '종교란', 1쪽)
이와 같은 주장은 개혁주의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다. 최근 부활 후 영화된 인간의 상태를 두고 한 말이라고 변호하지만 그렇더라도 역시 인간은 피조물일 뿐이다. 인간은 피조물로 결코 신성을 소유할 수 없다. 신성(divine nature)은 오직 하나님만이 갖고 계시다.
7. 둘째 아담 예수님이 구원 사역을 "이루지 못하셨기 때문에 재림 예수님을 보내주실 것을 말씀하셨다"고 주장한다
(박윤식 씨는 '월경에서 탈출하자'는 설교를 통해 자신이 주장했던 것을 1991년 <목회와 신학>에 기고한 답변서를 통해 스스로 다시 주장하고 있다. 월경은 에덴에서 하와가 타락한 이후에 생겨난 것으로 보고, '타락한 인간, 즉 여인에게서 난 자는 모두 월경을 따라서 태어났기에 혈통과 육신으로 난 자'(각주 57: '왜곡된 진실에 대한 우리의 입장', <목회와 신학>(1991년 2월), 67쪽. 여기에 실린 글은 대성교회 측에서 직접 작성한 답변서이다.), 즉 '육신의 자식들'로 이해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처, 사라,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처럼 월경을 통해 출생하지 않은 경우는 사단의 씨가 아닌 거룩한 씨라고 본다. 그러므로 "월경하는 여인에게서 난 육신의 자식들인 우리는 성령의 역사로 다시 거듭나야 한다. 그래야만 약속의 자녀로서 하늘나라의 유업을 받게 된다"(각주 58: '왜곡된 진실에 대한 우리의 입장' 68쪽)고 가르쳤다.
마리아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신 것을 아브라함의 첫 아내 사라,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의 잉태와 동일시하며 월경 없이 출생한 자라고 주장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이 두 사람의 출생은 두 가지 측면에서 다르다.(각주 59: '왜곡된 진실에 대한 우리의 입장' 67쪽) 첫째, 앞의 두 경우 성경은 남녀 관계에서 출생하지 않았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지 않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동정녀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어 아담의 원죄를 이어 받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앞의 두 사람의 경우는 원죄를 이어 받은 죄인의 탄생이지만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님의 탄생은 원죄가 없으신 탄생이었다. 월경을 통해 낳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판단하는 것은 그 접근 방법 자체가 문제를 안고 있다.)
박윤식 씨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으심을 통해 구속이 성취된 것으로는 보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기정사실로 예정되어 있던 것도 아니라고 한다.
"오늘날까지 고난의 주만 알고 있다. 피 흘려야 구원 받고 피 흘리심이 없으면 구원 못 받는다고 하고 있다. J(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 오시고 죽으시기 위해서만 오셨다면 낳자마자 헤롯이 2살 이하 다 죽이려 할 때에 무엇하러 애굽으로 도망갔나? 죽으시는 것이 기정사실이라면 유다는 상 주어야 한다. 그런데 J(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너는 차라리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했다고 하셨고 이 잔을 내게서 면케 해달라고 하고 하나님이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셨을까? 바로 믿고 바로 구원 받기 위해 십자가에 도가 망하지 않아야 한다. 망한다는 말은 말씀을 못 깨닫기 때문에 말씀을 못 깨달으면 십자가의 도가 망한다."(각주 60: <십 단계 말씀 공부>, 80쪽)
죽으시는 것이 기정사실이라면 왜 그가 애굽으로 도망갔으며, 왜 이 잔을 내게서 지나게 해달라고 기도했겠느냐고 박윤식 씨는 반문한다. 만약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기정사실이라면 이에 일조한 갸롯 유다는 상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박윤식 씨를 따르면 예수님은 자신의 원래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고" 따라서 재림 예수가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Ad[아담]이 (우리 자신) 타락하여 잃은 θ[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하여 둘째 Ad[아담](J[예수님])을 보내실 것을 약속 하시고 보내셨으나 무지하고 교만함 때문에 이루지 못하시고 다시 재림 예수님을 보내 주실 것을 λ[말씀]하셨다."(각주 61: <십 단계 말씀 공부> '초림', 33쪽)
박윤식 씨의 이러한 견해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 사역을 구원을 위한 충분한 것으로 설명하는 개혁신학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며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즉 기독론과 구원론에 박윤식 씨는 치명적인 하자를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8. 예수님이 "말씀으로 죄를 사해주려고 했으나 믿지 않으므로 십자가를 지셨다"고 주장
박윤식 씨는 구속의 사역을 예수님이 "말씀으로 죄를 사해줄려고 했으나 믿지 않으므로 십자가를 지셨다"(각주 62: <십 단계 말씀 공부> '십자가의 피', 86쪽)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믿지 않으므로 "십자가상에서 피 속에 이 말씀을 넣어[숨겨] 이 땅에 다 쏟으셨다(각주 63: <십 단계 말씀 공부>)는 것이다:
"피는 껍질이므로 그 속에 영을 취해야 된다. 온 인류를 살릴 수 있는 λ(말씀)이 들어 있기에 보배 피다. λ(말씀)으로 죄를 사해 줄려고 했으나 믿지 않으므로 ϯ(십자가)를 지셨다. … J(예수님)께서 이 λ(말씀)을 주어서 그 당시 이루려 하였는데 안 믿어 주므로 ϯ(십자가)상에서 피 속에 이 λ(말씀)을 넣어 이 땅에 다 쏟으셨다.(사탄을 속임)"(각주 64: <십 단계 말씀 공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은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대속의 죽으심이다. 단번에 죽으심으로 죄인 되었던 우리가 구원을 힘입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주님이 이 땅에 성육신 하신 것은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이다. 본래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성육신의 목적이 아니라는 주장은 개혁신학에서 수용할 수 없다. 더구나 말씀으로 죄를 사해 줄려고 했으나 믿지 않아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는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과 배치된다. 예수님이 본래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거나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 인류의 죄가 용서 받음으로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것을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피의 대속을 그 피 속에 말씀을 넣어(각주 65: <말씀의 단계> 21쪽. 여기에서 "그의 말씀은 그의 피 속에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가 보배 피라고 본다. "그가 겟세마네에서 기도할 때에 예수는 아무도 모르게 그의 말씀을 그의 피에 감추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골고다의 고난의 길을 갔다"(Ibid., 22쪽)고 주장한다.) 이 땅에 쏟으셨다는 주장은 개혁신학과 근본적으로 배치된다.
박윤식 씨는 예수님께서 공생 3년 동안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12제자를 선택하여 가르치신 것을 무시하고 "그의 12제자들은 그[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믿지 못했다"(각주 66: <말씀의 단계> 14쪽)며 이렇게 주장한다:
"J(예수)님은 사생활 30년 공생활 3년 동안 한 사람도 사람다운 사람을 만나지 못한 채 십자가에 달리셨다. 십자가상에서 '내가 목마르다' 하심은 인간에 대한 갈증을 나타냈다."(각주 67: <십 단계 말씀 공부> 92쪽)
이처럼 박윤식 씨는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한 구원의 교리를 곡해하고 있다.
9. 신자를 생령의 씨알이라고 함
박윤식 씨는 1985년 기독신문에 게재된 광고를 통해 "본인이 섬기는 대성교회에는 다른 교리나, 다른 가르침이나, 다른 용어나, 다른 구주관이 없으며"라고 밝혔으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박윤식 씨는 말씀을 받은 이를 생령이라고 하며, 그를 따르는 이들을 생령의 씨알이며 말씀의 씨알이라고 부른다. 이 말은 80년대 초를 전후해서 많이 사용했는데 1982년 2월 27일에 행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자'라는 설교에서 그는 교인들을 향해 "생령의 씨알 여러분, 주 안에서 안녕하십니까?"(각주 68: 구체적인 예는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자', <대성> 1982년 2월 27일이다.)라고 불렀다. 대성교회에서는 말씀을 믿는 사람을 다 생령이 된다고 본다.
설교만 아니라 대성교회에서 발행하는 기관지 <대성>에도 그 같은 용어가 등장했다.(각주 69: '역사와 오늘, 그들의 얼굴을 읽는 눈알은 어디 있느냐', <대성> 9회 1980년 9월 25일. "그렇기 때문에 우리 대성 교회 말씀의 씨알들도 720명이 1980년 9월 8일부터 12일까지 4박 5일 동안, 전라북도 장수군 계남면 괴목리에 소재한 장안산(장안산) 산상에서 금식기도와 철야할 때, 모진 비바람(태풍 '오키드')과 싸워가며 국가와 민족, 나 자신을 위해 깨어 있는 눈알 되기 위해서 많은 눈물을 흘리며 응답받아 생령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위에서 말씀의 씨알, 생령이라는 말을 주목한다. 장안산에 간 이들은 모두 말씀공부를 충분히 마친 이들이다. 박윤식 씨가 3년 6개월 7일 동안의 고투 속에 특별한 은혜를 받은 곳에 올라가 외적 환경과 싸워 '생령'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1982년 11월 25일 발행된 <대성>에는 "생령의 씨알들은 … 생령의 씨알 여러분 … 생령의 씨알의 사명 …"(각주 70: 박윤식,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백성 추격하는 자가 없다', <대성> 1982년 11월 25일. "생령의 씨알들은, 온갖 숨기운 것들이 백일천하에 드러나고, 심은 대로 거두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선포되는 그날만을 간절히 사모합시다. 오늘의 이 혹독한 어둠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확실히 절망적이고 부정적으로만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 생령의 씨알들은, '어두운 가운데서 빛이 비취리라(고후 4장6절)하신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습니다. 생령의 씨알 여러분, 대한민국에 대한 놀라운 비죤을 가슴에 안고, 이 민족에 대한 불타는 사랑으로, 이 민족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부르짖는 역사가 밝아오는 그날까지 계속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우리들, 생령의 씨알들의 사명은 이것뿐입니다. 이 나라의 아들들에게 대한민국의 참 얼굴을 보여주는 것, 마침 내 온 백성이 민족부활의 비죤을 가지고 제 나라를 뜨겁게 사랑하게 하는 이것입니다. 성경에 예언된 복스러운 한 족속, 대한민국이 바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막, 셈 족속임을 기억합시다.(창 9장26~27절) '하나님의 나라는 누구든지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장43절)고 주께서 친히 말씀했으니, 대한민국이 열매 맺는 백성이 될 것을 믿습니다." 1981년과 1982은 박윤식 씨가 문선명의 계보 이단 변찬린의 <성경의 원리> 상·중·하를 거의 그대로 인용 '씨앗 속임'을 비롯한 일련의 설교를 하고 있을 때이다.)이라는 말이 반복되어 나온다. 교인들에게 한 말인 것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1991년 '왜곡된 진실에 대한 우리의 입장'에서 창세기 2장7절에 근거 "생령(a living soul)이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산 인간이라는 뜻"(각주 71: '왜곡된 진실에 대한 우리의 입장', <목회와 신학>(1991년 2월), 65쪽)이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구태여 왜 성도들을 향해 생령의 씨알이라고 부르는가. 십 단계 말씀 공부에서는 생령(말씀)이라고 표시되어 있어 구원을 완성할 말씀을 따르는 이들을 생령의 씨알이라고 부르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이 성경적이냐는 사실을 논외로 치더라도 생령이라는 용어 자체를 기성교회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 1983년 기독신문의 광고를 통해 '다른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것이 거짓임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