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지속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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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2:4~11]

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교회는 한 번 세워졌으면 절대로 무너지지 아니하고 주님 오실 때까지 지속된다.

하나의 교회이지만 그 교회를 채우고 유지하는 신도들은 계속해서 교체되고 들고 난다.

은사는 교회가 세워질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유지 확장되는데 여전히 필요한 것이다.

성령의 나타남인 은사는 각 사람에게 유익을 주기 위함이다.

은사가 없으면 그 유익함이 사라진다.

예수께서 사마리아의 수가성 여인에게 말씀하셨듯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 때가 이미 왔기 때문이다.

구약시대의 예배는 신령의 역사가 없었다.

특별히 사역하는 선지자가 아니면 성령의 나타나심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는 누구나 믿어서 성령을 받으니 자연스럽게 성령의 나타남이 따르고 모일 때마다 성령의 감동하시고 감화하심이 늘 함께 하게 된 것이다.

원칙적으로 복음은 소리로 전파하게 되어 있다. 그것도 서로 대면하여 육성으로 전하게 된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함께 모이게 되어 있다. 이렇게 하여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게 되며 두세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이면 그 자리에 예수께서 함께 하신다.

모일 때에는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다[고전 14:26].

이 모임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은사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은사가 있어서 배우니 은혜스럽고, 말씀이 있어서 들으니 감동 속에서 믿음이 무럭무럭 자라고, 계시가 있으니 깨달아 바른 길로 가게 된다.

방언도 있으며 그 방언의 통역함도 있으니 모두가 다 하나 된 마음과 믿음으로 하나님께 찬양 드리기에 부족함이 없게 된다.

현금에 이르러서 계시는 교회의 설립과 더불어 그 계시행위가 모두 마쳐진 상태이고 다만 기록된 말씀인 성경의 계시와 그것의 요약인 교리와 그것의 조명인 밝은 개달음이 세세토록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고 또 이어져 간다.

이레니우스의 활약상에 힘입어 교부시대가 활성화되기 시작하는 가운데 교회의 직분은 교부들의 정치력에 좌지우지되기 시작하였으며 은사자들의 입지는 차츰차츰 좁아지기 시작하였다.

결과적으로 당시 교회는 다스리는 직분이 은사를 대신할 만큼 확장되었고 이러한 현상은 이단들과의 투쟁 속에서 더욱 강화되어갔다.

교부시대와 중세 교황시대를 거치면서 은사는 소수 은둔자들의 몫으로 남아 있다가 교회의 지도가 미치지 못하는 동안 차츰차츰 변질되어가게 되었었다.

종교개혁 당시의 은사적 활동은 거의 귀신과의 교접으로 치달았으며 인위적인 경건의 방법으로서 영성운동이 크게 일었었다.

종교개혁시대에는 너무나도 치열한 영적, 무력적 전쟁의 도가니 속에서 은사의 회복은 개혁자들의 깊은 관심을 일으키는데 그리 성공적이지 못하였었다.

1세기가 지나면서 하나님과 경건에 대한 열정이 신구교회에 불어 닥쳤지만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서로 엇갈리는 현상을 면치 못하였다.

구미의 수차례 대 각성운동은 은사의 바람을 대거 불어치게 하였었다.

그러나 은사 신학의 부재로 인하여 여전히 세계교회를 근본적으로 바로 잡지는 못하였으며 미국의 두 번째의 각성운동에서는 은사의 외면적인 폭발은 점차 사라져갔다.

20세기 초반에 들어서면서 세계교회들은 또 역시 인위적인 성령-은사운동으로 성령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 교단들이 만들어지면서 역시 각 신생교단의 교단활동들이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은사의 교회적 기여도는 다시 하향세에 들어섰다.

20세기 후반에서 21세기 초반에 들어서면서 세계교회는 바깥 사회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하였으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회라기보다는 사회 속에서의 교회를 세우기에 급급하였다.

이에 공허감을 느낀 일부 성령 은사운동가들이 본격적인 은사회복을 위하여 종말론적인 요소들의 도입과 더불어 크게 활동을 하면서 기존의 교회질서가 위협을 받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은사가 사라져가는 현대교회에 대한 극렬한 반동에 지나지 않는다.

은사는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지만 그것이 은사를 받은 사람의 개인적 소유물이어서는 안 된다.

성령의 활동에 보조를 맞추어 가는 자연스럽고 겸손한 은사활동 이상은 금물이다.

그래서 은사행위보다는 자신의 경건에 더 비중을 두지 않으면 곁길로 가게 되는 법이다.

경건에 힘쓰는 교인들이 모인 교회라야 거룩한 성령의 모습으로서의 은사활동이 바른 길로 들어가게 된다.

구약시대에 기적을 가장 많이 행한 사람은 모세이다.

그리고 그는 세상에서 가징 온유한 사람이었다.

온유하지 않으면 성령의 뜻을 알게 모르게 거스르게 된다.

이렇게 하여 은사가 살아있는 교회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교회가 된다.

은사가 약해지면 분쟁과 시비가 성행하게 되며 은사가 올바로 시행되는 교회는 신령하게 성장하며 은사가 왜곡된 교회는 목회자와 신도 간에 분란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

은사가 없는 말씀의 전파에는 감동이 없고 은사 없이 봉사하는 교인들은 고달파 하거나 아니면 교만해진다.

은사가 충만한 선교사를 파송해야 온 교회가 기쁘게 협력하게 되며 은사가 살아 있는 교회가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되며 기도가 힘이 있으며 전도가 잘 되며 서로서로 섬기는 겸손의 미덕을 배운다.

안타까운 것은 상당히 많은 교회들이 은사파와 말씀파로 나뉘어 갈등을 겪고 있다.

대개 많이 배운 사람들은 목회자 편에 서고 기도를 많이 하는 이들은 은사 받은 이들에게로 마음을 쏟는다.

목회자로부터 초신자들에게 이르기까지 은사를 바로 알고 은사 속에서 말씀을 경험하며 은사를 바로 시행하여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가 되어야 하겠다.


2011 10/15 토. 정 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