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도 운동의 문제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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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점들 1.


2,000년에 피터 와그너와 존 켈리 등이 중심이 돼서 “국제사도연맹” (The International Coalition of Apostles, ICA)이 결성되었다.

신사도운동자들에게는 선지자 학교가 있으며 하나님이 보내시는 선지자가 아니라 스스로들이 노력하고 연구하고 훈련하여 선지자도 되고 사도가 되었으니 자칭 선지자, 자칭 사도들이다.

타드 밴틀리는 사도 임직식을 하였던 대표적인 사도이고, Morningstar 교회는 대표적인 선지자 릭 조이너가 담임하는 교회이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로, 사도로 임직시킨다는 말인가?


{{->피터 와그너가 국제사도연맹을 구성한 것은 그가 사람들을 훈련시켜서 사도로 만들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거짓사도들은 어디서 단체로 훈련을 받고 탄생한 것이 아니라 사도의 은사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고 자부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사도의 은사가 있으면, 그 자신들의 사역에서 그것을 발휘하여 어떤 증거와 열매를 얻는다고 믿습니다.

예를 들면 거짓 계시를 받거나, 사람들이 보는 데서 귀신을 쫓거나 병을 고치거나 ... 그런 것이겠지요.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으면 그때부터 사도로 통합니다.

그런 자들을 피터 와그너가 불러 모은 것입니다.

피터 와그너는 사도와 선지자의 은사를 가진 사람은 많지만, 모두 사도로서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고 모두가 사도직을 가진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먼저 사도된 자들이 다른 사도에게 안수하는 것은 그들이 그를 사도로 세우는 것이 아니고 그가 이미 사도되었음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타드 밴틀리가 먼저 사도의 은사를 받았고, 은사를 발휘하여 많은 열매(?)을 맺었고 무수한 사람들이 그를 우러르고 사도로 믿으니 더 먼저 사도된 거짓 사도들, 피터 와그너, 체안 ... 등이 가서 안수한 것입니다

선지자들도 그렇게 탄생합니다.

스스로 예언의 은사를 받아서 예언하였는데, 맞아떨어지기도 하고 사람들이 따르고 ... 그러면 선지자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변승우 교회같이 사도학교, 선지자 학교... 이런 것은 실제로 사도와 선지자를 양산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거짓 사상과 운동을 전파하기 위해 프로그램일 뿐인것 같습니다.

거기서 사도와 선지자를 만들어서 어떤 취임식과 예식을 하였다는 말은 아직 못 들었습니다..}}


[엡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이다. 

그런데도 그들을 가리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졌다고 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머리돌이 되셨다고 하였다.

이는 특정 개인들에 해당하는 말이 아니라 시공을 초월하는 영적이고 우주적인 교회를 가리켜 하는 말이다.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인 믿음의 반석 위에 이미 세워졌고 그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흔들지 못하게 되어 있으며 오늘날에까지 지속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교회가 세워진 이래 2,000년이 되지만 사도와 선지자들의 터는 머리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 된 채로 변함없이 유지되어오고 있으며 더 이상 다른 사도들이나 선지자들은 필요하지 않다.

만일 다른 사도들이나 선지자들이 더 필요하다면 그 교회는 이제까지의 교회와는 별개의 교회이어야 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돌이 하나 더 생기지 않는 한 명확히 거짓교회이다.

성경에는 머리돌이 2개라고 말 한 적이 없다.

그 거짓교회의 터가 되는 이들은 거짓 사도이며 거짓 선지자임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신사도 운동하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닌 또 다른 별개의 교회이다.


[고후 11:13]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정확히 말해서 교회를 사칭하는 무리들인 것이다.


문제점들 2.


신사도운동의 기원인 늦은 비 운동(Latter Rain Revival)에 대한 왜곡된 기대감들이 세계 교회에 팽배하다.

이 문제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중동지방에는 2계절이 있다. 우기와 건기이다.

우기는 우리나라로 치면 늦가을부터 봄까지이며 건기는 봄부터 늦가을까지이다.

우기가 시작되는 늦가을에 추수를 끝내고 나면 비가 자주 온다.

이 비를 이른 비라고 한다.

그리고 건기가 시작될 때 자주는 아니지만 비가 온다.

이 비를 늦은 비라고 하며 뜨거워진 대지를 식혀주는 단비여서 아주 갈급한 표현에 자주 등장한다.

초대교회 시대를 이른 비라고 하며 말세를 당한 지금이 늦은 비의 때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 저자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해석이고 적용이다.

다음의 늦은 비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성경구절들을 자세하게 보기 바란다.

과연 그것들 중에 어느 것이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지칭하는 것인지 생각해 보기 바란다.


1. [신 11:14]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비, 늦은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2. [욥 29:23] 그들이 나 바라기를 비 같이 하였으며 입을 벌리기를 늦은 비 기다리듯 하였으므로

3. [잠 16:15] 왕의 희색에 생명이 있나니 그 은택이 늦은 비를 내리는 구름과 같으니라.

4. [렘 3:3] 그러므로 단 비가 그쳐졌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

5. [렘 5:24]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

6. [호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7. [욜 2:23]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할찌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전과 같을 것이라 .

8. [약 5: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문제점들 3.


신사도 운동의 외견적 특징은 기사와 이적이 많고 신비적인 현상이 많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범상한 사건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있을 수 있는 일이기는 할망정 그것 자체가 신앙은 아니며 그것이 곧 진리의 증거는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야 한다.

모세 때만해도 사람들은 순진했었다.

그래서 기적과 예언을 내세워 사람들을 미혹시키면서도 거짓말로 하나님을 잘 섬기자고 하는 일은 없었다.


[신18:20~22] 20 내가 고하라고 명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만일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21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22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찌니라.


[신13:1~3] 1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2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찌라도 3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그러나 초대교회만 해도 듣고 보기에는 조금도 하자가 없는 교묘히 속이는데 익숙한 거짓 사도와 거짓 선지자가 있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그리고 회개와 사랑과 성경을 말한다.

듣기에 은혜스럽고 소망을 준다. 이들은 스스로를 빛의 사자로 가장한다.


[고후 11:13]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고후 11:14, 15] 14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5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문제점들 4.


인터콥의 최바울은 동영상 강의를 통해 엡 4:11절을 이렇게 설명했다.

“4:11절 말씀 그대로 오늘날 교회에도 사도의 은사, 선지자의 은사, 복음전하는 자의 은사, 목자의 은사, 교사의 은사가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즉, 오늘 날의 교회에도 초대교회의 오중직이 그대로 존재함을 말한 것이다.

사실은 이것이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운동 사상이다

오중직이라고 부르는 초대교회의 이 직분들은 동일한 기능의 직분들이 아니었다.

사도와 선지자는 교회를 세우고 성경을 기록하고, 또한 성경이 완성되기 전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초대교회에 전하는 수단으로서 필요하였던 한시적인 직분이었다.

교회가 설립되고 성경이 완성된 후로는 더 이상의 계시를 주실 필요가 없었으므로 사도직과 선지자직은 종결되었다.

그리고 딤전 3장 1-13절, 디도서 1:5-9절에 근거하여 선출되는 집사와 장로(감독)가 교회를 다스리고 인도하는 중심 직분이 되었다.

(집사는 명확한 선이 그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평신도의 직분이었다고 보아야 하고, 장로와 감독은 목회자였습니다.

지역에 따라서 집사가 목회를 하고 말씀을 전하고 성례를 인도하였던 지역도 많았습니다.

동일한 목회자를 히브리 문화권에서는 장로라고 불렀고 헬라 문화권에서는 감독이라고 불렀습니다.

2세기에 들어서 목회자들 중에서 다른 많은 목회자들을 지도하는 권위 있는 목회자가 등장했는데, 그들에게만 감독이라는 호칭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더 시간이 지나서 로마의 감독이 전 세계의 감독이어야 한다는 이론이 등장하여 교황제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칼빈이 종교개혁을 하면서 목회자에게 목사라는 호칭을 부여하였고, 목사와 함께 교회를 섬기는 평신도 지도자에게 장로라는 호칭을 부여하였습니다.

현대 교회의 목사와 장로는 그때부터 유래하였습니다.

초대교회의 오중직 중 복음 전도자와 목사와 교사는 성경이 완성되고 집사, 장로(감독)이 교회의 중심 직분으로 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기능이 흡수되었다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말을 듣자.


[벧후 3:2]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선지자의 예언과 주의 사도들이 명하는 것은 교회의 기초가 되는 요소들이다.

그것들은 더 이상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성립된 상태가 계속 유지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은 정통과 보수가 필수적인 것이다.

선지자들이 아직도 있어서 계시의 말씀을 주셔야 한다면 초대교회나 지나간 2,000년간의 교회들은 불완전한 계시로 인해서 제대로 교회 구실을 할 수 없었을 것이며 성경책도 새로이 많은 양들이 계속해서 추가되었어야 했을 것이다.

바울은 또 말 했다.


[엡 3:5]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과거 어느 때에도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역사한 일이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오직 교회를 세우는 일에만 적용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교회를 다 세웠으면 과거만이 아니라 미래에도 또 다시 교회의 기초를 세울 필요는 없는 것이다.

요한은 천국의 성곽을 보았다.

그 기초는 12개의 돌인데 어린 양의 12 사도들의 이름이 있었다.


[계 21:14]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더 이상 다른 사도는 없다.

신사도운동에서 말하는 사도와 선지자는 초대교회의 경우와는 사뭇 다르다.

계시의 말씀과는 무관하며 사도적 권능을 행함에서나 각 개인의 신앙생활에 도움을 줄만한 각종 은사와 관련된 정도이다.

결국 그들은 스스로는 높임으로써 명예와 권위를 얻고자 성경을 이용하는 것일 뿐이다.


문제점들 5.


신사도 운동에서는 중보기도라는 것을 열심히 한다.

중보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다.


[딤전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의 중보가 되시는 이유는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아무나 중보가 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누군가가 신앙적으로 잘 되기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그 기도가 중보의 효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유일무이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어디에다 제쳐놓고 신자들이 중보기도를 하는가?

신자는 중보기도를 할 수가 없다.

목사도 자칭 선지자와 사도도 마찬가지이다.

중보기도는 작은 예수의 왜곡된 개념에서 온 것이다.

우리는 아무리 작아도 예수는 못 된다. 항차 중보기도라니.

천주교회에서는 성모 마리야가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을 위하여 중보 해 준다고 한다(영어에서 중보자는 Mediator이고 성모마리아는 mediator의 여성형인 mediatrix이다.).

또한 성인들이 신도들의 기도를 받는다. 이유는 그 성인들이 신도들을 위하여 중보를 한다는 것이다.

중보기도회라는 것을 활성화시키면 그 기도회에 참여하는 이들의 사명감을 고취시키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마치 자기네들이 세계의 무슨 위대한 일이라도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중보자들을 양산하는 것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우리는 서로 위하여 기도하되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할 뿐, 중보의 임무는 없다. 자격도 없다.

중보에는 반듯이 중보의 효과가 따른다.

그러나 신자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반듯이 그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기도의 결과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지 기도자의 기도행위에 따라서 기계적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중보라는 말을 꼭 사용하고 싶다면 <중보>라고 하지 말고 <중보적>이라는 말로 대치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중보적 기도>, 이 말에는 별로 하자가 없다.


문제점들 6.


하늘의 권세를 잡은 사단의 이야기는 성경에 있지만 그의 졸개들이 땅을 차지하고 있어서 그 땅에는 복음이 들어가지 못한다는 해괴망측한 이야기는 찾아볼 수가 없다.

어떤 신자가 귀신들이 장악한 지역에 들어가서 살게 된다면 그는 성령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귀신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신앙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말인가?

지역마다 귀신들이 있다는 사상은 중국에서 널리 퍼져 있었으며 한국과 일본에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

우리 전통 시속에서도 탑돌이, 지신밟기 등이 있으며 특히 지신밟기는 큰 고사를 치르고 나서 그 고사의 음복을 마친 이들이 마당을 돌며 발로 악신들을 밟아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서 신사도 운동에서 하는 것과 거의 일치한다.

고대 중근동에서도 지역마다 신들이 장악하고 있다는 개념이 팽배해 있었다.

열왕기상 20장 23절과 28절을 보면 아람이 이스라엘을 침공했을 때 여호와는 산의 신이라고 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상들을 무시하시고 산에서나 골짜기에서나 아람 군대를 초토화시키셨다.

심지어는 요나도 이스라엘 나라를 멀리 떠나가면 하나님께서 더 이상 간섭하시지 못할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우여곡절 끝에 니느웨로 가서는 하나님의 영역은 지역에 얽매이지 않고 복음의 전파에 있어서 어느 곳, 어느 지역이든지에 영향을 받지 않음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가 3일 길을 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을 때 그 지역의 귀신들을 몰아내는 작업을 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사도들의 복음 전파에서 귀신을 제어하는 일은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마 10:1]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그 이유는 지역마다 주인노릇 하는 귀신들이 복음을 방해하기 때문이 아니다.


첫째로는 귀신 들린 사람들은 복음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당시에 중근동 일대에 널리 퍼진 전통적인 축사문화를 평정함으로써 복음이 천래의 말씀임을 증거 하려는 때문이었다.

중근동의 축사문화는 뿌리가 깊다.

옛날 모세가 인신제사와 각종 신접하는 자들을 몰아내었던 것처럼 복음의 출발에서도 같은 문제가 제기되었던 것이다.

기존의 뿌리 깊은 종교문화는 복음 전파에 있어서 매우 어려움이 된다.

중국에서 기독교가 크게 자라지 못한 이유도 그렇고 특히 일본에서의 최초 기독교인 기리시단(크리스천)교는 이제는 일본 전통종교로 분류 치부되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이조 500년 동안 전통종교인 무속종교와 불교를 억제함으로써 종교의 사각지대가 형성되었었기 때문에 마치 모세가 가나안을 우회하여 요단강 동편에 이르기 전에 모압 등 여러 나라들이 멸망 내지 축소되어 무혈입성을 하게 된 것과도 같다.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교회가 많은 세월을 지나 재림하실 때까지 강력한 힘으로 이 땅에서 버티어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기존의 강력한 종교문화를 초토화시킨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기로 하자.


[눅 11:15]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예수께서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축사를 하였다는 비난이 있었다.

이 귀신의 왕이라는 바알세불은 그 기원이 아주 멀다.

고대 스메르 신화에서는 엔키가 창조주 엔릴을 물리치고 왕좌를 차지하였다.

이 엔키의 주된 임무는 축사에 있었다.

스메르의 엔키는 훗날 가나안에서는 바알이었다.

엔키의 축사를 위한 주문에는 창세기 11장의 바벨 사건과 언어의 분화와 유사한 신화도 포함된다.

스메르가 완전히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진 BC 2,000년대 이후에도 그 축사 주문은 중근동 전체에 널리 퍼져 있었고 심지어는 엔키의 축사 주문이 에이디 1세기까지 고대 스메르어로 출판이 거듭되어왔었다.

이것은 복음의 확장과 더불어 갑자기 사라져버렸던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지신밟기와 유사한 지역귀신 몰아내기 기도는 고대의 주물신앙 및 주술신앙의 끄트머리이다.

또 이 작업은 십자군 운동 때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감람산에 재림하실 수 있도록 무슬림들을 몰아내야 한다고 명분을 세웠던 일과도 유사하다.

신사도 운동이 축사를 강조하기 위하여 생각해 낸 것이 지역신 몰아내기 기도이다.

그러나 동기가 무엇이든 이방 신앙이 기독교 안에 버젓이 밀고 들어오는 이러한 일은 결코 두고 볼 일이 아니다.


결론

신사도 운동에서 사도와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보내시거나 12제자들처럼 예수님이 직접 선발하여 임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사도학교, 선지자 학교 같은 것은 실제로 사도와 선지자를 양산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와 선지자가 될 수 있는 은사를 받도록 가르치는 단체이다.

어떤 사람에게 사도적 은사가 있다고 여겨지면 그 사람들을 자신들의 사역에서 중요하며 입증된 기적의 증거와 열매를 내세워 사도로 부르거나 스스로가 사도로 자처하게 된다.

선지자들도 스스로 예언의 은사를 받아서 예언하였는데, 맞아떨어지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이 따르게 되면 선지자로 행세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끄는 무리와 따르는 무리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사도와 선지자들이 탄생하게 된다.


[마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말세에 거짓 선지자와 거짓 그리스도들이 많은 신자들을 미혹케 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산상수훈의 이 대목은 좀 색다르다.


<우리>라는 단어에 관심을 두어야 하겠다.

거짓 선지자와 거짓 그리스도들이 여러 곳에서 각기 따로따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무리가 되어 어떤 특별한 단체로서 활동한다는 말이다.

이들은 무슨 일이나 주의 이름으로 행하였다.

그 일들은 선지자노릇, 귀신 좇기, 기타 여러 가지 권능들이다.

이러한 것들이 신사도 운동에서 하는 일들이다.

그런데 주님은 전혀 엉뚱한 답을 하셨다.


[마7:23]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결과적으로 볼 때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짝사랑하였던 것이다.

아니, 제 마음대로 예수의 이름을 도용하였다. 허락 없이 선지자가 되었고 자기네들 마음대로 사도를 만들었다.

단지 그들이 믿을 만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우리>였다. <우리>는 서로의 증인이다.

그러나 문제는 서로가 서로를 증명하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이다.

단체적으로 선지자와 사도가 되어 활동하는 일은 기독교 역사상 신사도 운동이 처음이다.

아무래도 주님 오실 때가 더 가까워진 모양이다.


2011. 10/9 주일 정 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