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규
십일조는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조건은 된다고 봅니다.
이미 전에 십일조에 대해서 정리하여 놓은 것이 있어서 올립니다.
인터넷의 기독교의 게시판에 가면 십일조에 대해서 열렬한 토론이 벌어지는 장면을 흔하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체험적으로 보면, 그러한 토론이 소위 이단이라고 하는 곳과 안티기독교들이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고 숨기며, 한국교회의 십일조를 비난하는데 앞장을 서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십일조를 남용하는 교회가 있다고 하여도, 십일조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일부 극소수 목사들의 범죄나 강요를 전체 기독교의 비리로 간주하는 것은 고의적인 비난의 목적일 뿐입니다.
최근에는 구원파, 여호와의 증인같은 소위 이단으로 불리는 자들이 십일조를 비난하는데, 이러한 비난은 오히려 일반 교인들의 많은 동조와 동감을 얻게 되며, 그들이 노리는 목적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목적은 십일조자체를 비난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기독교의 전체적인 비난에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며, 나아가서 자신들의 전체적인 이단 교리와 비성경적인 가르침을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우리나라에 재정이 풍부한 교회는 10%도 안됩니다. 우리나라의 교회 중에서 80% 이상이 재정적으로 자립하지 못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단교회에서 일체의 헌금이나 연보, 헌물등을 받지 않을까요?
그들은 단지 십일조라고 불리는 용어의 헌금만이 없을 뿐이며, 헌금을 모두 받습니다. 특히 이단들의 경우 더욱 많은 헌금을 받음으로 상당한 피해를 보게 됩니다. 더욱이 통일교는 십의삼조(30%)를 받고 있으며, 많은 이단들이 교인들의 재산을 교회로 헌납하도록 강요하고 있는데, 그러한 자들이 앞장 서서 일반 교회의 십일조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실로 많은 사람들이 이단과 사이비에 미혹되어 그들의 전재산을 잃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특히 이단들이 종말론을 주장하여서, 많은 사람들이 전재산을 바치고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단이 아니라고 하는 교회라 할지라도, 십일조를 강요하거나 십일조를 구원의 조건으로 주장하면 안됩니다. 십일조는 자발적인 것이며,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외에 어떠한 행위의 결과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일조에 대한 비난은 보편적으로 몇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이것에 대해서 상세히 알아보겠습니다.
1) 십일조는 율법이므로 폐하여졌다는 주장
십일조를 비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주장중 첫번째는, 십일조는 율법이므로 폐지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율법이 폐지된 적은 없다. 율법은 폐지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은 율법의 완전을 위하여 오셨으며(마5:17) 예수님은 일점 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않을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5:18)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율법이 폐하여진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며, 그러한 개념이 폐하여졌다는 것이다.
제사율법은 변역되었다....변역이란 바뀐 것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제사도 폐하여진 것이 아니라 영적인 제사의 개념, 즉 예배로 바뀐 것이다. 만일 제사가 폐하여졌다면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아니고, 우리도 더이상 제사장이 아니다.... 율법은 그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관점과 의롭게함이라는 관점에서는 폐하여졌으나, 죄를 깨닫게하고 그리스도로 안내하는 몽학선생으로서의 기능은 아직 갖고 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재해석하셨으며, 완전케 하신 것이다.
율법으로는 어느 누구도 구원을 얻지 못하지만,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게 할 수는 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3:20)
그렇다면 십일조는 율법일까?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약속 얻은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폐일언하고 낮은자가 높은자에게 복빎을 받았느니라"(히7:6)
하나님이 모세에게 율법을 주기 전에도, 십일조는 있었다. 그리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빔을 받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 십일조를 드리면서 복빎을 받을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구약뿐이 아니라, 신약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어떤 교회에서 십일조가 구원의 조건이라고 가르친다면, 그 교회는 이단이라고 불러도 좋다. 어떤 정통교회도 십일조를 구원의 조건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율법을 지킴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정통교회도 없듯이 말이다. 물론 십일조에 대해서 율법적인 관점에서 반드시 지켜야만 의인이 된다는 주장은 잘못된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율법적인 십일조를 우리는 배격하여야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율법적인 기준에서는 십일조는 정확한 10%를 내야만 의인의 기준이 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율법은 지켜야 하지만,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지는 못한다. 십일조에 율법적인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버려야 할 것이지만 십일조 자체가 율법이므로 버려야 한다는 것은 이상한 주장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십일조를 내야하지만, 그것이 구원의 조건이나 의인의 조건이 되지는 않는다. 다만 십일조는 그리스도인의 자발적인 의무라고 가르쳐야만 한다.
2) 예수님이 말씀하신 십일조
마태복음23장 23절과 누가복음 11장42절은 십일조에 대해서 모두 똑같이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 것"을 언급하고 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 눅11:42)
신약에서 십일조는 마23:23, 눅11:42와 눅18:12에서 다시 한번 언급되어지며, 히브리서에도 십일조는(개역성경:십분의 일로 번역되어짐) 언급되어진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18:12-14)
전자의 성경본문은 형식만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탓하시는 것이지 십일조 자체를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십일조를 성경적이 아니므로 폐하여야 한다는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 말씀도 잘못이라고 비판하기 바란다
"의인"(의롭다함)의 조건은 마당에 심은 풀과 같이 자신의 소득에 대한 정확한 액수의 십일조가 아니라,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믿음에 달려 있다. 만일 의롭다함의 조건이 십일조에 달려있다고 가르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일 것이다.
3) 연보와 십일조
십일조는 감사하는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드려지는 것이다.
필자가 성경을 인용하면, 십일조를 비난하는 분들께서는 분명히 "그것은 십일조가 아니라 연보이다"라고 말할 것이 뻔하지만 성경을 잘 찾아 보면, 연보와 십일조는 서로 구별되어지거나 다른 용어가 아니다.
고전 16장 1절과 2절등에 사용된 "연보"란 단어는 "모금, 수집"(collection)이라는 뜻의 헬라어 "로기아"로 되어 있고, 고후 8:2에서는 "기쁨으로 드린다, 관용"이라는 의미의 "하플로테스"로 되어 있고, 고후9:5 에서는 "좋은 모금, 아름다운 말과 칭찬, 봉헌, 은전"이란 뜻의 "율로기아"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성경말씀에서 "연보"란 번역상 연보라고 표기되어 있을 뿐, 십일조나 헌금. 모금과 전혀 다른 용어라고 말할 수 없다. 누군가가 십일조를 형식적인 면에서 벗어나, 자발적인 기쁨으로 드려진다면 그것이 곧 연보와 같은 개념이 되어진다.
또한 그 증거로 역대하34장9절과 14절의 "연보"란 용어를 보자. 구약에서는 십일조를 포함한 성전세등을 포괄하여 성전에 들어간 돈을 연보(히브리어: 보, 여호와의 성전에 입고된 돈)라고 기록하였다. 바울은 고후 9:13에서 "후한 연보"(하플로테스)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 아직도 헬라어 원어를 믿지 못하겠고 십일종는 "연보"와 엄격히 다른 용어라고 말한다는 분이 계시다면 그분은 십일조 봉투에 십일조라는 말을 지우고 연보봉투라고 고쳐서 내거나 "기쁜 헌금"이라고 고쳐서 내면 된다. 연보는 성경적이라 가능하고, 십일조는 폐하여졌으니 비성경적이라는 주장은 가당치 않다. 십일조의 의미가 없어진 것이 아니니 십일조의 의미를 잘 깨달으시기 바라며, 주님은 결코 십일조가 폐하여졌다고 하시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기쁜 헌금" 안에 십일조도 헌금도 모두 포함된 것이다. 하나님은 자발적인 마음으로 즐겨 내시는 사람을 기뻐하시며, 십일조는 결코 폐하여진 적이 없다.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막12:41-44)
예수님은 액수에 많고 적음이나 정확한 액수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았으며, 오직 자발적인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그 내면적인 믿음을 중요시하였다.
4) 십일조의 유래와 의미
성경에서 십일조가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은 창세기 14장 17-20절이다. 아브람이 롯을 구하고 전쟁에서 승리한 후 돌아오는 길에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자,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후에 등장하는 십일조에 관한 이야기는 창세기 28장 야곱의 서원에서 나오게 된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를 평안히 아비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개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창28;20-22)
즉 십일조는 제사적인 의미도 아니며 율법적인 개념이 아니다. 이미 율법이 있기 전에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으며, 야곱은 하나님께 십일조를 자발적으로 서원한 것이다. 그것은 복을 빌어달라는 조건으로, 드리는 사람의 자발적인 약속이다. 단, 그것은 강제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이었다.
"매 삼년 끝에 그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 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14:29)
다시 말해서 구약의 십일조란 일차적으로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약속에 대한 개인적인 성취적인 제물로 사용되었다. 후에 십일조는 일차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종사하는 사람들, 즉 분깃이 없는 레위 제사장들을 부양하는 목적이었으며, 가난한 사람들의 구제와 부양에도 쓰였다는 것이다. 이 십일조의 대상은 종교적인 레위인의 부양도 포함되었지만, 성중에 거하는 객과 과부와 고아같은 비종교적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포함되었다. 이단들과 사이비 교회에서는 십일조나 헌금이 모두 교주나 지도자 개인에게 돌아간다. 그러나 주님께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의 교회를 위하여 사용되는 것은 정당하기 때문에, 목회자들의 생계와 생활을 위하여 사용되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또 우리는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들을 위하여 구제사업을 할 수도 있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하여 선교비로 사용할 수도 있으며, 공동체적인 교회를 위하여 사용될 수도 있다. 다만 십일조나 헌금은 정상적인 교회에서는 평신도들로 구성된 재정부에서 취급한다. 목사나 교역자는 정해진 월급을 받고, 모든 지출은 회계 처리되어 지며, 회계보고와 감사를 받게 되어 있으며, 예산 및 계획은 당회와 임원회에서 통과되어야만 하며, 모든 과정은 공개적으로 처리되어진다. 또한 재정부와 감사는 정해진 년수마다 다른 평신도로 교대하여야만 한다. 즉 십일조나 헌금은 정확히 엄격하게 지켜져야만 한다
현재의 십일조는 교회의 총재정을 교인 숫자대로 1/n 로 나누는 것이 본질적인 의미라고 본다. 교회는 성도들의 예배장소이다. 교회는 인건비, 운영비, 관리비, 선교비등 많은 비용이 필요하며, 그 구성원인 성도들이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물질이 여유가 있는 사람은 많이 내고, 물질이 부족한 사람은 적게 내고 하는 것이 곧 십일조와 헌금의 원칙이 된다.
5) 신약의 십일조
여러분이 흔히 십일조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등장하는 구절인데, 마태복음23;23-24이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는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도다"(마23:23-24)
박하와 회향과 근채는 음식의 향을 내기 위한 아주 작은 풀이다. 이러한 풀에 속하는 것은 십일조의 규정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이러한 식물들은 그 당시 집의 뜰에서 길러지던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서기관이나 율법사들은 이러한 규정까지를 십일조에 포함시키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이것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째 이렇게 까다롭고 철저한 당시의 율법과 계율에 대한 외식적이고 형식적인 것에 대한 비평일수도 있으며.......
둘째 이렇게 작고 우리 집안에서 키우는 풀의 열매까지 우리는 정확한 액수를 내고 있다는 자랑과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겉치례에 대한 비평이다.
그들은 내면적인 믿음보다 십일조를 내는가 안내는가에 대한 것을 중요시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집안에서 기르는 풀까지의 정확한 십일조를 냈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작은 것까지 지킨다는 외부적인 평가를 받기위한 전시적인 쇼맨쉽을 비판하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러한 해석은 곧 하루살이를 걸러내고 실제로는 약대를 삼키는 행위를 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던 예수그리스도는 "버리지 말아야 함"을 강조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이어서 율법의 지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내면의 의미를 파악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십일조의 형식도 중요한 것이며 그 내면적인 의미 역시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앞서 구약의 십일조에서 가장 처음 언급된 멜기세덱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보자. 히브리서 7장은 이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
멜기세덱은 과연 누구인가? 창세기에서는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되어 있다. 살렘의 왕으로 되어 있는데 이 살렘이란 뜻은 "평화로운, 충만한, 완전한..."이란 의미가 있다. 이 멜기세덱은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그를 축복해 주었다. 히7장3절에 보면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4절 "가장 좋은것"을 주었고 7절에는 "낮은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라고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은 낮은 자로서 높은 자인 멜기세덱에게 축복을 받았고 자신이 가진 물건 중에 가장 좋은 것을 바친 것이다. 이것은 레위라는 제도가 있기 전에(즉 율법이 있기전에) 있었던 일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십일조는 율법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멜기세덱은 단지 축복을 하였을 뿐이며 "달라"거나 "십분일"을 말한 적도 없고 "가장 좋은것"에 대하여 말한 적도 없다.
이 멜기세덱은 바로 그리스도의 예표이며 모형인 것이다. 우리의 십일조는 바로 우리 주님께 가장 좋은 것으로 자발적으로 드려져야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그의 살과 피로써 우리에게 큰 축복을 내려주셨고 우리는 자발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합쳐서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물질이나 액수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드리는 마음이다.
"여기서는 죽을 자들이 십분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자가 받았느니라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히7:8-10)
예수그리스도도 십일조를 비난하지 않았으며 금하지 않으셨다. 단지 예수님은 그 내면적인 것을 더욱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을 뿐이며, 사랑과 공의로 믿음으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십일조를 주님은 말씀하셨다.
우리 교회는 그 물질을 관리하는 청지기에 불과하다.그 물질은 교회라는 공동체를 위하여 쓸수도 있으며, 목회자들에게도 써질수도 있으며 구제하는 일에도 사용되어질 수도 있으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선교비로 사용되어질 수도 있다. 반드시 내야한다는 형식도 중요한 것이며 버릴수 없는 것이지만, 자발적이며 내면적인 믿음이 더욱 중요하다. 십일조를 내지 않아도 좋다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찾을수 없다.
6) 말라기에 대한 잘못된 비판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십일조에 대한 말라기 말씀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것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3;10)
본인은 두가지의 비판을 하려고 한다. 하나는 성도들이 정확한 액수의 십일조를 내야만 복의 근원이 된다는 주장이며, 하나는 이 말라기 말씀이 오직 제사장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라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이 문장을 그 당시의 "제사장"에게 해당되는 말이라는 견해에 대해서 먼저 말씀드린다. 즉 말라기는 제사장에게 하는 말씀인데 한국교회가 그것을 성도들이 대상이라고 잘못 가르치고 있다는 이상한 주장을 가르치는 곳이 있다.
말라기 2장은 분명히 그 대상이 "제사장"이다.(말2:1) 그러나 말라기 3장6절부터는 그 대상이 "제사장"이 아니다. 3장6절은 "야곱의 자손"들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대상으로 "돌아오라"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3:7) 과연 말라기의 십일조에 대한 경고가 오직 제사장에게만 해당되어질까? 그 대상은 온 이스라엘 백성, 너희 온 나라인 것이다.
먼저 말라기에서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겠느냐?" 라는 문장을 보자. 이 영어성경을 보면 "Will a man rob God?"이다. 우리는 이 man 이라는 단어에 부정관사 a 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럴 경우, 의미는 한사람의 뜻이 아니고 사람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를 말한다. A horse is animal. 이 말은 한 마리의 말이 동물이다가 아니고 일반적인 명사 "말이라고 하는 것은 짐승이다" 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것을 훔친 사람은 제사장같은 어느 특정된 사람이 아니라 일반적인 의미의 모든 전체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How do we rob you? 라고 we 라는 복수가 곧이어 나오는 것이다. 다음 9절에서는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 하였으므로"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영어성경을 보면 " You are under a curse - the whole nation of you - because you are robbing me" 라고 되어 있다. (- -) 라는 부호는 앞의 문장을 재설명하는 부호이다.
앞문장의 You 는 결국 the whole nation of you 라고 재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개역성경에도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라고 번역하고 있다. 다시 말하여 말라기의 십일조에 대한 성경말씀은 제사장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근거가 있다.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일 You 가 제사장만을 말한다면 복을 주는 "너희"도 제사장을 말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복은 제사장만이 받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십일조는 일반 사람들이 내고 복은 제사장만이 받는다는 이상한 모순이 되어 버리는것이다. 어느 문장을 보아도 You는 제사장을 가르킨다는 근거가 전혀 없다.
오직 2장에서 "너희 제사장들아..."라고 되어 있다고 모든 말라기가 다 제사장에게만 말하는 것이라고 할수는 없는 것이다. 말라기 3장에 들어서면서, 3장 3절에는 레위자손들을 "그들"이라고 삼인칭으로 표현하고 있으므로, 이미 제사장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과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것이니라"
이 문장이 제사장에게 하는 말이라면 그들은 'They" 가 아니고 "You" 가 되었어야 한다. 6절에서는 "야곱의 자손들아"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도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리라"
레위족속 제사장만이 야곱의 후손이 아닌것이다.야곱은 모든 열두지파의 조상인것이다.
즉 모든 이스라엘 지파를 여호와는 부르고 있었으며 모두에게 십일조에 대하여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저주가 아니라 저주의 원인중에서 한가지를 알려줌으로써 복을 알려 주려고 하는 하나님의 배려인 것이다.
또 말라기에 대해서 정확한 액수(10%)를 내야만 복을 받는다는 주장이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한다.
물론 본인은 정확한 십일조를 계산하여 자발적이며 기쁜 마음으로 바치는 그 믿음을 비난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먼저 밝혀둔다. 성경에서 "온전한 십일조"라고 번역되어진 10절의 말씀은 완전하고 정확한 금액의 액수를 말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Whole tithe"(모든 십일조:히브리어 콜, all)라고 되어 있을 뿐이다. 그것은 모든 십일조, 즉 모두 십일조를 내야한다는 것을 말하지만, 마당에 심는 박하와 휘향과 산채까지 포함시키는 정확한 십분의 일이라는 액수를 말하지는 않는다.
성경 본문은 이스라엘 온 나라, 모든 백성이 모든 십일조를 도둑질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예를 들자면, 유대인들은 남이 볼 때에는 박하와 휘향과 산채까지의 십분지일을 나는 낸다고 자랑하였는데,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알 수 없는 소득에 대해서는 십일조를 아예 내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십일조를 냈기 때문이다.
말라기는 이스라엘의 타락과 범죄에 대해서 비판을 하면서, 하나의 예로서 십일조의 경우를 지적한 것으로 본다. 말라기는 당시 이스라엘의 총체적인 불순종과 불신앙을 비판한 것이지만, 말라기가 오직 십일조만을 비판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7) 십일조와 헌금은 공동경비를 갹출하는 방법이다
교회는 임대료, 인건비, 관리비, 운영비, 선교비등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통계적으로 보면 우리나라 교회는 약 80% 이상이 자급자족을 못하고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서 월 1000만원의 최소경비가 필요한 경우, 교인이 50명이라면 한사람이 20만원을 부담하여야만 교회가 유지되어진다. 소위 사용자 부담의 원칙인 1/n 이 적용되어져야만 한다. 이것이 곧 십일조와 헌금의 용도가 되어진다. 다시 말하여 십일조가 필요하지 않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부담을 내지 않기 위한 방편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소득이 넉넉한 사람은 많이 내고, 소득이 적은 사람은 적게 내고... 이것이 현대적인 십일조의 근거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대형교회는 재정이 넉넉하여 많은 활동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는 재정이 부족하고 목사의 생활비조차 부족한 실정이다. 즉 재정이 넉넉한 대형교회가 재정이 어려운 작은 교회를 돕는 것은 십일조의 원칙이 된다.
십일조와 헌금을 반대하고 부정하는 사람은 한국교회 80%에 해당되는 당면의 재정적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해서 대안을 제시하여야만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성경에서 십일조는 결코 율법적이 아니며, 폐지된 적도 없다. 다만 십원짜리까지 계산하는 정확한 10퍼센트의 액수만을 맞추는 형식적인 십일조는 성경에서 말하는 바람직한 십일조가 아닐 수도 있다. 또한 복을 받기 위하여 정확한 십일조를 내는 것이 아니다. 박하나 회향과 근채까지 십일조의 액수를 정한 것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행동을 주님은 바람직하다고 하신 적이 결코 없었다.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5-7)
빌립보서 4장 1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은 바울에게 모금한 돈의 일부를 바울의 "쓸 것"으로 몇번 보내었다. 바울은 이것을 매우 고맙게 생각하고 그러나 내가 선물을 구하지 않는다고 사양한다. 그러나 18절에서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내준 너희의 준 것을 받았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한 것이라" 라고 말했던 것이다.
(고) 박윤선 박사의 "십일조 헌금과 그 사용방법에 대하여"
1. 십일조 헌납은 구약 시대에 신정국가의 하나의 제도화한 것이었느니 법령으로 실시하던 것이었다. 그것을 드리는 자가 기쁜 마음으로 실행해야 향기로운 것이겠지만 아니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처음 난 자를 바치는 것도 아니하면 벌을 받도록 된 것이다(출 13:13).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신약의 시대의 연보는 신정국가의 법령으로 실행시키는 것이 아닌 만큼, 자원하여 내는 것이다(고후 8:1-15, 특히 11절 참조)
2. 십일조를 사용하는 목적은 주로 (1) 레위 족속과 제사장들의 생활비를 제공하기 위함(민 18:24,26,28). (2) 가난한 자들과 고아와 과부와 같은 외로운 자들을 구제하려 함이다(신 14:22-27). 그러므로 신약 시대도 신자가 연보의 일부를 가지고 빈자나 외로운 자들을 구제할 수 있다(롬 15:25-26).
3. 이제 다시 생각할 문제들이 있다.
(1) 신약의 시대에 연보하는 자가 그 소산의 십분지 일이란 수량을 유일한 표준으로 할 것인가? 십분지 일이란 수량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 제사장에게 바친 수량이었고(창 14:20) 이스라엘 백성이 레위 족속에게 그렇게 바쳤으니만큼 역사적으로 유명할 뿐 아니라 이상적 수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약 교회는 신정국가의 법령으로 다스리는 국가가 아니고 의문과 기타 외부적 의식의 제재에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초월하게 된 영적 단체이니 만큼 십분지 일이란 수자의 법령적 제재는 받지 않는다. 그러나 십분지 일이라는 수량이 이상적인 수량이니 만큼 그것을 신약 시대 신자들도 자원하여 표준으로 삼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을 교리화하거나 제도화할 것은 아니다. 신약 시대의 신자들은 원하여 소득의 십분지 일 이상도 하나님께 바침이 좋을 것이다(고후 8:1-15). 교회는 신약 교회는 교인들이 연보하는 일에 십일조 혹은 십일조 이상을 강요하거나 표준을 세워 지령할 것은 아니다.
장로교 예배 모범 제 18장 4조에 말하기를 "목사마다 자기 교회가 감심으로 헌금하는 습성을 배양하는 것이 마땅하니 신도마다 다소를 물론하고 자기 힘 있는 대로 바치게 할찌니라"고 하였다.
(2) 신약 시대의 신자가 자기가 드릴 연보 수량(십일조 혹은 기타 수량)의 사용 목적을 자의대로 생각하고 또한 자기 목적에 따라 할당하는 것도 자유로 할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하여 장로교 예배모범 18장 3조가 대답한다. 거기 말하기를 " 그 수납금은 당회의 감독 하에서 교회 각 대리국과 기타 자선 사업과 그리스도의 사업을 위하여 분배할 것이니 분배 다소와 일체 계획은 시시로 의결하되 혹 헌금하는 자가 특별한 소원히 있을 때에는 그의 원을 따라 삼가 실행할찌니라"고 하였다.
요컨대, 신약 시대의 연보는 법령에 의한 것이 아니고 신자가 자의대로 또는 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고후8:11). 구약 시대에는 예배를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드리게 되어 있었으니만큼(요4:19-21) 외부적 제도에 치중하였다. 그러니만큼 그 때 이스라엘 백성은 헌금에 외부적 제재를 받았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신자들은 개인으로나 단체로나 또는 어디서나 신령과 진리에 의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할 수 있다는데(요4;22-24) 치중한다. 신약 종교는 보다 더 영적인 것인 만큼 신자의 개인적 자유를 존중시하며(고후3:17) 자기 혼자도 하나의 성전인 사실을 성경에서 알고 있다(고전 3:16-17,6:19-20,롬 12:1-2).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을 섬기는 의미에서 어떤 개인들(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도 일종의 연보 행위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교회를 통하여서만 실시되는 것이 아니다. 백부장 고넬료가 교회를 통하지 않고 친수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한 것도 하나님께서 기쁘게 여기셨다(행 10:1-4).
잠 19:17절에 말하기를 ,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고 하였다. 잠 17:5참조. 마 10:42에 말하기를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하였다. 바리새 교인이 하나님께 재산을 바쳤다는 미명으로 부모를 공양하지 않는 사실에 대하여 예수님을 책망하셨다
(마15:4-6). 약1:27엔 말하기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서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서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였다. 마25;31-46참조.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께 바칠 물질을 가난한 자 구제의 목적(기카 하나님께 바치는 의미 있는 목적)을 위하여 교회의 지령 없이 사용할 수 있다.
(3) 우리는 교회에 드리는 헌금을 등한히 하면 안 된다. 교회는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항존 단체로서 복음을 전하며 보수하는데 가장 믿을만한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 전도와 복음 파수를 위하여서도 교회는 이렇게 귀한 기관이다.
그러니만큼 이 기관엔 물질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신자가 다른 좋은 일보다 교회에 물질을 바쳐야 된다(눅 8:1-3,빌4:18). 구약 시대에도 이스라엘이 십일조를 성전 봉사와 제사장의 생활비로 제공한 것이다. 그 만큼 그때의 신자가 하나님께 직속한 거룩한 일을 위하여 물질적으로 힘껏 봉사하였다. 이 일은 고금을 물론하고 원측에 있어선 변하지 않는다. 출23;15에 말하기를 "공수로 내게 보이지말찌니라"고 하였다.
신 16:16 참조. 신약 시대에도 신자가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께 연보 드려야 할 것을 가르친다. 다만 그 수량에 있어서 일정한 숫자 표준은 세우지 않았다.(Cassels Concise Bible Dictionary P.728. under new economy liberality enjoined on christians. No specific proportionof the earnings is mentioned......).
십일조 헌납에 자세하였던 바리새인들에게 대하여 예수님은 그들이 종교 윤리적 동기는 없이 외식으로 그러한 점을 꾸짖으셨다. (마 23;23, 눅 11:42). 그러나 그들이 십일조 헌납하는 그것은 좋게 여기셨다. 이 점을 보면 예수님의 교훈이 십일조라는 숫자를 표준으로 세우신 듯하다.
그러나 이 말씀은 해석하고 읽어야 한다. 해석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있으니 (1) 그가 이 말씀을 하신 때는 아직 그의 구속 사업이 완성되지 않은 것만큼(죽었다가 다시 살으시기 전이므로) 구약적인 제도를 아직 그대로 옳게 보신 시절이었다. 마 8:4참조. 이점에 있어서 놀발 켈덴회이스(Norval Geldenhuysl)의 누가복음 (11:42) 주석 제 342 페이지를 참조하라.
(2) 그리고 둘째 해석은, 그 구절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찌니라"고한 말씀(눅11;42)은 십일조의 바리새식 실행 그대로를 용인하시는 말씀이라기보다 그것에 대한 원칙적 실행(숫자를 기계적으로 따지지 않고 하나님께 정성껏 바침을 의미함)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예수님의 행적과 교훈을 밝혀 해설한 사도들의 서신들을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연보를 어떤 일정한 수량으로 제도화하지는 않았다. 예수님의 교훈이, 십일조와 같은 구약의 예식적 규례도 아주 폐지하시지는 않고 그것에 대한 신약적 실행(즉 원측적 실행)을 필요시한 것은 사실이다(H.N. Ridderbos, De Komst Van Het Koninkrijk .p.264-265).

"그리스도인의 헌금생활의 표준으로서의 십일조"
- 한정건, 현유광 -
오늘날 십일조에 대해 크게 3가지 주장이 있다.
첫째는 십일조가 구약의 율법에 속한 것이므로 신약 시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더 이상 불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이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둘째는 비록 신약에서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드물게 보이지만(마23:23, 눅11:42), 십일조를 하지 말라는 주장은
전혀 없는 만큼 구약의 가르침을 따라 온전한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신약의 원리를 고려함이 없이 십일조 명령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을 중요시 한다.
셋째는 구약과 신약의 원리에 따라 십일조를 하는 것이 합당하나, 십일조 문자 그 자체에 구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견해이다. 이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성도가 십일조를 하는 것이 합당하나, 교회가 필요할 때에는 각자의 양심을 따라 최선을 다해 헌금해야
한다는 원리가 앞서는 것으로 생각한다.
본 연구 보고서에서는 먼저 구약과 신약을 통해서 십일조의 유래와 그 실례(實例)들을 살피고(I), 그 실례들을 기초로 하여
십일조의 원리와 실제(practices)를 밝히겠다(II). 그리고 신약시대에 십일조를 어떻게 적용해야 할 것인지를 율법의
유효성 문제와 함께 다루어 본다(III). 마지막으로, 한국교회가 취해야 할 성경적인 헌금관을 제시한다(IV).
I. 성경에 나타난 십일조의 유래(由來)
1. 구약에 나타난 십일조
1) 족장들의 십일조
구약에서 십일조가 처음 나오는 곳은 창세기 14:18-20이다. 북부지역 네 왕의 연합군을 무찌르고 돌아오던 아브라함은
살렘왕 멜기세덱의 영접과 축복을 받는다. 이때에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그 얻은 것에서 십일조를 드린다. 십일조의 관습은 셈족
이외의 다른 종교나 다른 문화권에서도 종종 보이는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각주1. C.L. Feinberg, "Tithe,"
Zondervan Pictorial Encyclopedia of the Bible, 제5권, p.756.)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단순히 당시의 습관을 좇아서 드렸다고 보아야 할까? 비록 아브라함 이전에 십일조의 관습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500여년 후에 율법이 십일조를 가르치고 있음을 고려할 때에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박윤선 박사는 단정적으로 이렇게 주장한다.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자들이었는데, 그들이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의미로 주고받은 것을 보면, 이 제도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이 분명하다.”
(각주 2박윤선, “주일성수와 십일조 헌금 문제,” 『신학정론』 제6권 제1호 (1988, 7), 148)
아브라함이 드린 십일조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① 어느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라 자원해서 드린 것이었다.
② 소수의 군사로 다수의 적을 완벽하게 격파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예물이었다.
③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신앙고백으로 드린 헌물이었다. (각주 3. 김영철, “십일조의 성경적의미,”
『신학정론』 제4권 제2호
(1986, 11), 335)
이 사건 이후에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렸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창세기 28장에 기록된 야곱의 서원에서 십일조가
다시 등장한다. 여기에 대해서도 박윤선 박사는, “그것은 조부 아브라함 때부터 계시에 의해 그 가정에서 지켜오던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 것이라고 말한다. (각주 4. 박윤선, 앞의 책)
아브라함의 가정이 십일조 헌물을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대대로 지켜왔는가에 대해서는 확언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야곱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라고 한 말에서, 그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였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의 십일조가
자발적인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다는 점에서 아브라함의 십일조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여기에서 추가해야 할 십일조의 중요한 원리는, 자신의 모든 소유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이에 대한 신앙 고백으로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친다는 것이다.
2) 모세의 율법에 나오는 십일조
족장 시대에는 십일조가 앞에서 본 것처럼 아브라함과 야곱에게서 각각 한번씩만 보일 뿐이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에 이르러
십일조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부과된 의무가 되었다. 모세의 율법에서 보면, 십일조는 크게 3가지 종류가 있었다.
첫째는 레위기 27:30-33에 나오는데, 땅의 소산과 소나 양의 십분 일을 여호와께 속한 거룩한 것으로 엄격하게 규정한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허락하신 소산 중 십분의 일을 벌칙까지 부과하시면서 요구하신다.
둘째로, 민수기 18:20-32에 나타난 십일조다. 민수기에서는 백성들이 드린 십일조의 용도가 부각된다. 하나님은 레위지파
사람들에게는 기업을 주지 않으셨다. 레위지파 사람들 중 제사장들은 제사를 주관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제사 드릴 때에 보조하는
역할과 성막을 간수하는 일에 전념했다. 따라서 레위지파 사람들의 생계를 나머지 11지파의 사람들이 책임을 졌다.
백성들은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렸고, 하나님은 그것을 레위 자손에게 주어 그들의 생활을 도우셨다. 민수기 18:26에서는
레위인들의 십일조가 나온다.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자손으로부터 얻은 것 중에서 다시 십일조를 거제로 드려서 제사장 가족들을
공궤한다.
셋째로, 신명기 14:22-29을 보면, 십일조를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고, 그것을 사용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곳에 가서
먹고 즐기도록 하신다. 또 매 삼년(안식년 후 제3년과 제6년) 끝에는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들을 배부르게 하는데 사용하라고 하신다. 모세의 율법에 나타난 십일조에서 볼 수 있는 원리는, 하나님과 사람 간의 수직적인
관계에서 십일조가 드려지지만, 그후 십일조는 레위 지파를 위해 사용되어지는 수평적인 성격을 또한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상을 종합하여 볼 때에 십일조는 다음과 같은 원리를 담고 있다.
①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으로서 하나님께 바침이 마땅한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드리는 십일조에 상당한 애착을 보이신다. 즉 십일조를 변개할 때에 주어질 벌칙까지도 부과하신다.
② 십일조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필요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드려졌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전에 나아가 예배하며
경축(celebration)하는 경비에 사용되었다. 그리고 십일조는 생활이 힘든 사람들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드려졌다.
3) 사사시대와 왕정시대의 십일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면, 그들의 십일조를 드리는 생활도 자연히 소홀하게 되었다. 사사시대에는 레위인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살 길을 찾아 배회하며, 우상까지도 섬기며, 한 가정의 제사장 역할을 하기도 했다(삿17:7-10,
18:18-20).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 원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레위인들의 사명의식이 흐려지고 백성들을 지도하는 일에
소홀하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음에 따라, 생활고를 레위지파 사람들 스스로 해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사무엘이 십일조를 삼상8:15이하에서 언급하고 있으나, 이는 왕정(王政)이 이루어질 경우 백성들의 소득의 십분의 일이
왕가(王家)를 유지하기 위한 세금으로 징수될 것을 경고하는 내용으로서 헌금과는 무관하다. 그 후 다윗이나 솔로몬 왕 시대에는
십일조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다윗의 경우 십일조를 드렸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다윗은 성전 건축을 위해 많은 헌물을 한 사람이다. 역대상
29:14에서 다음과 같이 그의 헌금의 원칙을 천명한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다윗은 모든 것이주께로부터 왔고, 그 중에서 일부를 주께 드리는 것뿐임을 밝혔다.
솔로몬보다 약 200년 후 여로보암 2세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때에 활동했던 아모스가 십일조에 대해 언급한 것이 아모스
4:4에 나타난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경제적으로 부요함을 누리고 있었으나 종교적으로는 형식에 치우쳐 있었다.
아모스 선지자는 하나님을 향한 참 사랑을 상실한 이스라엘을 향해 경고하면서 겉모양만 남은 십일조를 지적한다. 그 후 히스기야
왕 시대에 이르러, 그가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제사를 회복하면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위한 십일조를 시행하게 한 사실이
역대하 31장에 나타난다. 히스기야 왕의 십일조와 관련한 조치는, 십일조를 통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지원하기 위함이었음을 알
수 있다.
히스기야 왕 이후 북왕국과 남왕국이 모두 멸망하기까지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구약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4) 포로시대와 예루살렘 귀환 후의 십일조
이스라엘이 바벨론 땅에 포로로 잡혀있는 때에도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성경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다시금 십일조가 중요한
이슈로 등장하는 때는 느헤미야와 말라기가 활동했던 시기이다.
느헤미야는 유대 총독으로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주도하였다. 그 후 그는 예배의식을 회복한다. 그리고 그는 율법에
정한대로 십일조 제도를 통해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생활을 보장하도록 한다(느10:38, 12:44 등).
주전 430년경,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일조를 드리지 않고 있었고, 드린다고 해도 형식적으로 마지못해 하였다. 이때에
말라기 선지자는 백성들을 향해 그들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또 그들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저는 것 병든
것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총독에게 하는 것만큼도 하나님께 하지 않는다고 책망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와 전적
헌신의 표시로서 십일조 특히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고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깨우치신다(말3장).
여기에서 십일조의 원리를 볼 때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유지하기 위해 십일조는 필수적이었으며, 십일조가 제대로 행하여지지
못하였을 때에 종교가 타락하게 됨을 볼 수 있다.
2. 신약에서 본 십일조의 원리와 실제
1) 예수님의 십일조에 대한 언급
예수님은 십일조에 관해 직접적으로 가르쳐 주신 바가 없다. 다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책망하면서 십일조에 대해
간접적으로 언급하셨다(마23:23, 눅11:42).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드리는데 있어서 매우 꼼꼼하게 계산하여 시행했으며,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자신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있었다(눅18:12).
이런 형편에서 주님은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의(義)와 인(仁)과 신(信), 곧 사람에 대한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근거한
것이어야 함을 깨우치신다. 예수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고 하셨다. 헨드릭슨은 이 말씀이,
신약시대에도 십일조를 계속 드려야 한다고 명령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주님의 구속사역이 완성되기까지만 십일조가 유효한 것을
밝힌 것뿐이라는 것이다. 즉 이 말씀을 하실 때에는 예수께서 아직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음으로 십일조에 관한 율법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었다는 말이다. (각주 5 W. Hendriksen, Exposition of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Grand Rapids: Baker, 1973), p. 832) 이러한 주장은 헬라어 성경본문에
부정시상(aorist)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러나 마태복음 23:23에서 “이것도 행하고”에서 “행하다(포이에-사이)”는 부정시상으로, “저것도 버리지 말라”에서
“버리다(아피에나이)”는 현재시상이 사용되었다. 이 말씀의 의미를 풀어 쓴다면 “이것도 행하고(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을 행하고) 저것도(십일조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이다. 따라서 이 말씀에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예수님의 죽으심 이전에만
국한되어 적용된다는 것은 옳은 주장이 아니다. (각주6은 길어서 아래 미주처리)
마태복음 10:9-15에서 보면 예수님은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이 복음에 호의적인 사람들에 의해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받는
것이 당연함을 밝히신다. 복음 전하는 자들은 바울처럼 자비량할 수도 있지만, 또한 복음 사역의 협력자들에 의해 도움을 받는
것도 합당하게 보셨다.
심지어 복음 전하는 자들을 돕는 자들에게는 평안을 약속하시고, 배척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심판을
경고하기까지 하신다.
예수님은 헌금의 원리에 대해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을 통해 가르치신다(눅21:1-4). 주님이 기뻐하시는 헌금은 돈의 액수의
다소보다는 최선을 다해 드리는 마음이다.
2) 초대교회의 헌금 행태
성경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헌금생활에 있어서 십일조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그러나 그들은 십일조보다 더 많은 것을 바쳤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자기의 가진 재산을 자원하여 팔아 어려운 자들과 나누어 사용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제 것이라 하지 않았다(행 4:32). 이러한 성도들의 행위를 본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 유혹을 받을 만큼
큰 돈을 교회에 바치기로 작심한다(행 5:1). (각주 7 물론 그들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 되어 벌을 받는다)
사도 바울은 자신도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삯을 받는 것이 합당하고, 성도들이 복음의 사역자들의 생활에 필요한 것을 공급해야
한다고 하였다(고전9:6-14). 그는 교회(지도자들)가 가난한 자를 돌볼 책임이 있음을 인정한다(갈2:10).
또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흉년이 들어 어려움에 처한 유대지역 성도들을 위해 헌금하도록 권면한다(고후 9장). 연보는 미리
작정하고 준비하고,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자원하여 하라고 한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 하였다(고후 9:7).
여기서 초대교회가 시행한 연보의 원리를 보게 된다. 교회의 사역자들의 필요를 공급하기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과 이웃 교회를
돕기 위해 헌금이 필요하다. 헌금하는 성도는, 심는 자에게 곡식을 수확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헌금을 해야 한다. 하나님은
즐거이 바치는 자에게 열매를 더 풍성하게 더하시는 분이시다(고후9:10).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다. 연보는 규칙적으로 준비해서 하는 것이 유익하다.
연보는 자원해서 할 것이나 힘에 지나도록 하는 것은 인정받을 만한 일이다(고후8:3). 하나님은 기쁨으로 헌금하는 자들을
기뻐하신다. 그리고 바치는 자에게 하나님은 축복해 주신다. 이것은 구약의 원리와 일치한다. 단지 신약에서는 십일조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율법의 규정으로 제한하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II. 십일조의 원리와 적용
구약에서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에게 바치도록 명령하셨다. 땅과 거기에서 나오는 곡물이나 과실들, 그리고 심지어
가축들까지도 십의 일은 하나님의 것으로 규정한다(레 27:30-32). 십일조를 내지 않는 것은 심지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으로도 말한다(말 3:8). 그러면 십분의 일만 하나님의 것인가? 땅의 전체, 그리고 소득의 전체가 다 하나님의
것이다(시24:1).
그러나 하나님은 전체를 다 바치기를 명령하시지 않고 십분 일만 바치도록 하셨다. 즉 대표의 원리를 적용한 것이다.
십일조와 함께 첫 열매도 대표의 원리로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었다.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다”고
하신 것은(롬 11:16) 첫 것이 전체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일을 제물로 바치면 제사장은 한
움큼을 취하여 단에서 화제물로 불사르고 그 나머지는 제사장에게 돌린다. 이때에 바쳐진 한 움큼은 전체를 대표한 것이며, 한
움큼이 바쳐진 것은 전체가 바쳐진 것으로 간주된다.
하나님은 자신이 필요할 때에는 언제든지 자신의 것을 요구하셨다.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일조를
내게 하셨고, 성전 운영에 필요를 위해 십일조를 요구하셨다. 때로는 가난한 자를 위해서 십분 일의 명목으로 요구하셨다(신
14:28). 전체적으로 볼 때에 이스라엘은 십일조라는 명목으로 여러 번 낸 결과가 된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자신이 필요할
때면 십분 일의 명목으로 받으셨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니까 언제든지 요구하실 권리가 있는 것이다. 실제 십의 일보다 많이
거두신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거두실 때마다 십일조라는 이름을 붙이신 것은 자신의 것을 자신이 받는다는 정당성 때문이었다. 사실 ‘십일조’라는 문자
자체가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헌금의 원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언제든지 필요할 때면 하나님에게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십일조의 원리를 규정하였다.
전체가 다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은 자신이 필요할 때에는 자신의 것을 거두셨다.
그 때에 ‘십일조’라는 명목으로 거두신 것은(실제 어떤 해에는 3/10 가까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식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너무 ‘십일조’라는 문자에 얽매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말라기서에서 십일조를 하지 않음을 꾸짖은 경우에서도 우리는
너무 경직되게 ‘십일조’ 자체만을 강조해서는 안 된다. 말라기 시대에 백성들이 십일조를 내지 않으므로 레위인들이 그들이 생업을
찾아 나섰다. 레위인들이 타락함으로써 이스라엘 종교가 위기를 맞게 되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종교를 바로 유지하기 위해
최소한의 필요인 십일조를 등한시하는 그들을 꾸짖은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동체로서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하게 하기 위해서
헌금이 필요했고, 하나님은 자신의 것인 십일조를 요구한 것이다.
구약의 원리가 신약에도 적용될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하나의 큰 신학적인 문제이다.
혹자는 새언약의 완성이신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십일조 포함)을 완성하셨다고 하며, 아직도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은 십자가의
주님을 모독하는 것으로까지 말한다. (각주 8 사두환, 한국교회의 십일조에 대하여,” 『뉴스앤조이』 2001-07-13)
우리는 성경이해에서 가장 큰 원리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근본적으로 구약의 원리와 신약의 원리가 다르다고 하면 안 된다.
구약도 하나님의 말씀이고 신약도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율법의 실제 적용에서는 너무 경직되어서는 안 될 부분이 있다.
즉, 제 칠일에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에 있어서, 그 칠 일째(토요일)를 경직되게 고집해서는 안 된다. 구약의 안식일의 원리는
변하지 않으면서 신약의 안식일을 더 의미 있게 지켜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신약에서 십일조의 사례는 예수님이 언급하신 것 외에는 없다. 예수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고
하셨다(마 23:23). [헬라원어와 관계된 해석은 미주(尾註) 6번을 참고하라.] 이 부분은 십일조와 관련된 논쟁에서 특별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십일조 문제를 율법의 문제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생긴다. 따라서 신약시대의 십일조 문제를 다루기 위해 율법의 문제를
먼저 풀지 않으면 안 된다.
III. 신약 시대의 율법 문제
율법이 신약시대에 폐하여졌느냐 하는 문제는 큰 신학적 논쟁거리이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율법이 폐하여진 것으로
말한다(롬10:14; 엡 2;15; 히7:12, 18; 10:9 등). 바울은 신약시대에 율법을 요구하는 것은 십자가의
구원을 무효화 시키는 것으로 단정한다. 율법의 기능은 참 구원자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가정교사, 혹은 소년감독자)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예수님의 죽음이 모든 율법을 완전히 폐지하였는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은 율법을
이루려(완성하려) 오셨지 율법을 폐하러 오셨다고 하지 않으셨다. 율법의 일점일획도 폐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마
5:17-20).
예수님은 율법사의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고 하셨고(눅 10:28),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다(눅 10:37). 이것은 율법을 폐지할 의사가 없음을 밝히신 것이다(눅18:18-22
참조).
사도 바울을 율법을 폐지한 사람으로 오해해서도 안 된다. 에베소서 6:1-3에 제5계명을 들어 부모에게 순종할 것을 권면한
뒤,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하였다. 그가 율법이 폐기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그러면 바울이 모든 율법이 폐하여졌다고 주장하는 듯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바리새인들의 사상을 꾸짖은 것이다. 율법으로 구원받는다는 주장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무효화 시키는 것이다. 로마서 3:19-20에 의하면 율법으로 구원받을 자가 없으며,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정당화 시킨다. 사람은 율법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롬3:22).
그러나 바울은 이어서 반문한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는 단호하게 대답한다.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3:31). 즉, 율법으로 구원받을 수 없지만, 구원 받은 자는 율법을 이루어야
한다.
바울은 율법을 이루는 문제를 설명함에 있어서,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성령이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한다는 로마서 8:4
말씀을 제시한다. 고린도후서 3:3은 옛 율법과 달리 이제는 법이 성령에 의해 심비에 쓰였다고 하였다. 율법의 내면화를
말한다.
성령의 역할과 율법의 내면화는 구약의 새언약에서 밝히는 바이다. 예레미야 31:33은 새언약에서 율법을 “그들의 속에 두고 그
마음에 기록하였다”고 말한다. 새언약이 율법을 폐한 것이 결코 아니다. 새언약에서도 율법은 그대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
율법이 성령에 의해 마음에 기록되는 내면화로 변한다. 에스겔서는 새 시대에 성령이 율법을 마음에 둠으로써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할 것을 거듭 밝힌다.
(겔 11:19-20; 36:26-27). (각주 9새언약 시대의 율법의 문제에 대하여 한정건, “새언약시대의 율법에 대한
고찰"『교수 논문집』제18집 (고신대학교, 1990), pp. 5-30 참조할 것)
율법의 원리는 구약과 신약이 다르지 않다. 구약에서 율법은 구원을 위한 조건으로 주어지지 않았다. 구원받은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다. 신약에서도 율법은 결코 구원을 얻는 방편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순종해야 할 지침이 된다. 신약에서의 율법은 영적이며 내면적이다. 외형적인 그 문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원리가 중요하며, 외형적으로 좇아가는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이끌림으로 그것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성화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율법의 완성이다.
IV. 오늘에 있어 십일조의 원리와 적용
신약이(특히 바울서신에서), 외형적으로 율법을 좇아가는 율법주의자에 대하여 크게 꾸짖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가 율법의 정신을 이루어나가야 할 것도 밝혔다. 따라서 율법의 문제에서 구약과 신약을 동일시하여 구약의 명령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는 것도 삼가야 하지만, 또한 근본적으로 구약의 것은 더 이상 필요치 않은 것으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신약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다. 구약의 성취이며 완성이다. 구약의 원리와 명령은 신약에도 그대로 살아있어야 하고, 그
의미가 내면화되고 더 완성적이어야 한다.
구약의 헌금의 원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부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나의 토지(기업)가 하나님의 것이며,
거기에서 발생하는 소출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필요할 때에는 언제든지 바쳐야 한다. 그 기준이 바로
십일조였다.
구약에서는 제사제도의 유지와 구제 그리고 공동체적 축제를 위해 최소한의 경비를 하나님의 십일조라는 명목으로 드리게 하셨다.
구약의 원리에 의하면 만약 십의 일을 내지 않으면
① 자신의 소득의 전부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원리를 망각하는 것이고, ② 하나님의 일에 필요한 것을 제공하지 않는 책임유기이다.
이러한 기본 원리는 신약시대에도 그대로 살아있어야 한다. 따라서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불가피한 경우 외에는
최소한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그리고 또한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있다면 그 이상도 기꺼이 할 수 있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서, 그리고 교회를 유지하고 복음사역을 활발하게 이루어나가기 위해 헌금이 필요하다. 그렇게 바칠
때에 십일조를 기준으로 헌금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러나 십일조를 하되 율법적인 의무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깨닫고 그것을 고백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따라서 형편이 어렵거나 신앙이 어려서 십일조를 드리지 못하는
성도에게 헌금의 원리를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십일조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율법의 잣대를 적용해서 정죄하거나 위협해서는 안 된다.
이와 더불어 주의해야 할 것은 교회가 성도들의 헌금을 관리하고 사용하는 교회 지도자들의 책임이다. 교회 지도자들은 먼저
십일조를 구원의 조건으로 강조해서는 안 된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며, 또 하나님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 십일조를
내도록 하였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포함한 헌금을 가지고, 인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예배당 건축이나(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건축이라면 해야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행사를 위해 부당하게 헌금을 사용하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
또 교회 재정이 남아 특별한 명분 없이 이를 저축하거나 땅에 투자하거나 주식 같은 것에 투자해서도 안 된다. 교회는 십일조를
포함한 헌금을 복음의 사역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합당하게 사용할 책임이 있다. 헌금이 구약과 신약 시대에 공히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사용되기도 했는데, 오늘날 교회는 성도의 십일조로 얼마나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데 사용하고 있는지도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신약시대에도 사도바울은 자신도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삯을 받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교회를 유지하고 이루어나가기 위해 헌금이 필요하며, 그 헌금의 원리는 나의 것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아까워하거나
인색하지 않고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바칠 때에 십일조를 기준으로 헌금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예수님은 장로들의 유전에 얽매여 있는 바리새인들을 준열히 책망하셨다. 그들이 그러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왜곡시키고
백성들을 얽어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 15절에서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고 했다. 또 3:6에서는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라고 엄히 명한다.
또 사도들은 할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을 거부하면서도,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지침으로서 네
가지의 금령을 제시한다(행15장). 그리함으로써 전환기에 처한 성도들에게 도움을 준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율법주의는 반드시
경계해야 할 함정이다. 그러나 자신과 이웃의 신앙의 증진과 교회의 건덕을 위해 신앙생활에 필요한 지침은 유익이 된다.
신약시대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어떤 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다는 오해를 물리쳐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율법의 정신을 망각하고 규모 없이 행해서는 결코
안 된다.
즉 십일조 이상의 헌금을 하며 이웃을 돕고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는 그리스도인은 십일조의 법에서 자유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율법에서 자유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곡해하여 십일조는 폐지되었으며, 헌금을 개인의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 연구서는 서론에서 제기되었던 세 가지 주장 중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주장은 옳지 않음을 밝힌다.
구약의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켜서는 안 되나, 율법의 원리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되어 십일조를 헌금생활의 지침(指針,
guideline)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에, 첫째 주장(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완성으로 말미암아 십일조의 가르침은 완전히
폐지되었다)은 옳지 않다. 둘째 주장(구약의 십일조는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한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와 성령의 법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잘못 되었다.
한마디로 결론을 내린다면, 구약과 신약의 원리에 따라 십일조를 하는 것이 합당하나, 십일조 문자 그 자체에 구속(拘束)되어서는
안된다. 율법을 외형적으로 좇아가는 율법주의에 근거하여 십일조 헌금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 율법에 대한 신약의 원리를
고려함 없이 문자 그대로를 강요하는 것은 옳은 성경관이 아니다.
반대로 신약시대에 율법은 폐지되었으므로 십일조의 원리도 폐지되었다는 주장도 받아들일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구약에서 가르치는 바와 같이 모든 것이 주의 것이요,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모든 것을 주님의 뜻대로 사용하고, 주님이 원하시면 기꺼이 십분의 일 이상, 더 나아가 모든 것을
주님께 드려야 한다. 이것은 율법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주관자이시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고백함과, 신앙생활의 증진과 건덕 그리고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에 큰 유익이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