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걸개' 거는 종교, 차라리 없는 게 낫다

[주장] 정치권력의 시녀가 된 종교, 더 이상 종교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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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존재성, 삶과 죽음에 관해 다룬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간여하지 않을 수 없다. 죽음 너머에 대하여 뿐 아니라 현실에 대해서도 그렇다. 인간의 현실이란 경제, 정치, 사회, 문화적인 것들을 총망라한다. 그러므로 어떤 종교라도 현실의 문제에 답을 주지 않고 내세의 문제에만 관심을 둔다면 사이비다. 왜냐하면,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내세에 대한 기대는 현실에서 어떤 삶을 살았느냐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는 현실의 문제를 다루지만, 현실의 권력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종교는 억압당하는 자와 소외된 자들을 대변하기 위해 그들을 억압하는 권력에 대항할 권력을 추구할 때에만 정당성을 갖기 때문이다. 만일 종교가 세상권력과 야합하여 약자를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한다면 아편이다.

로마가 지배했던 중세가 암흑기였던 이유는 종교가 곧 현세의 권력이었기 때문이다. 정교일치나 정교분리냐의 문제는 세속권력과 종교권력의 싸움이었지 종교의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종교의 권력 혹은 권위란, 섬김의 권력이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종교의 정치권력이란, '예'와 '아니오'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권력을 지향하는가에 있는 것이다. 섬김의 권력이냐, 아니면 섬김을 받기 위한 권력이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정치적인 영역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간의 전 삶의 영역과 관련되므로 종교의 경제문제도 이와 같다. 종교에서의 물질적인 축복은 단순히 많이 갖는 것이 아니라 가진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의 문제이다. 단순히 가난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가진 물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라는 것이다.

종교가 권력과 야합, 독재권력의 시녀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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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자들을 위한 종교 종교란 권력의 횡포로 억압당하고 아파하는 이들을 대변해 주는 일을 해야한다. 권력의 시녀가 된 종교는 타락한 종교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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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역사적으로 종교권력이 세상권력과 하나 되었을 때, 여지없이 권력의 나팔수가 되었다. 그래서 야합이고, 세상권력을 정당화하는 데 이바지하는 종교는 아편일 수밖에 없다. 우리 역사에서도 이런 문제는 지속됐다. 호국의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근대 역사에서 종교가 권력과 야합한 결과는 대체로 독재권력의 시녀가 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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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형 영정사진 내걸린 '제1회 박정희 추모예배' 10.26 34주년을 하루 앞두고 지난 10월 25일 오후 서울시 강남 도곡동 서울나들목교회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둘째 딸 박근령씨를 비롯한 기독교 및 종교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1회 박정희 대통령 추모예배'가 열리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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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박근혜 정권이 등장하면서, 기독교권에서 강대상에 박정희의 걸개 사진을 만들어 붙이고는 '제1회 박정희 추모예배'를 드린 사건이나, 경주 불국사에서 '제41회 신라불교문화 영산대제'에서 박정희의 걸개 사진이 불교 위인들과 나란히 걸린 사건은 종교가 세속의 정치권력을 얼마나 탐하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다.

특히, 기독교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생긴 '국가 조찬기도회'를 통해서 독재권력의 안녕을 비는 일들을 했고, 이후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은 물론이고,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도 정치권력에 빌붙어 종교를 정치권력의 시녀노릇을 했다.

주로 대형보수교회와 교계의 지도자들 중심으로 이뤄진 국가 조찬기도회에 참여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기독교계 지도자들은 그 정권이 어떤 정권이냐에 상관없이 지지를 표명한다. 그들의 안녕을 비는 것으로 국가권력의 비호 아래 자신들의 종교적인 세력확장을 꾀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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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CC 제10차 부산총회 행사장에서 같은 종교라도 지역에 따라 다른 몸짓과 다른 언어로 표현되어야 한다. 어느 종교가 타지역에 그대로 이식된다면 제국주의적인 종교에 다름이 아니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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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군다나 이들은 국가권력을 비판하거나, 불의한 일들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종교계를 향해서 준엄하게 '종교는 정치적인 중립성을 지켜야 한다'고 꾸짖었다. 자신들의 권력 지향적이고 정치 편향적인 행동들은 종교적인 행위라고 애써 강조하면서 통일운동이나 민주화운동, 이 땅의 불의한 권력의 희생양이 된 이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종교인이나 종교에 대해서는 정치적이라고 몰아붙였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해줄 수 있는 기제를 만들어 내고, 확산해 내고, 종교적인 신앙심으로 무장한 맹신적인 신도들을 만들어 내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물론, 성공한 만큼 종교는 타락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오늘날,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일반인들이 종교와 교계 지도자들이나 종교인들을 바라보며 걱정해야 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으로도 종교의 이름으로 타 종교를 비난하고, 종교로 말미암은 분쟁으로 수많은 이들이 전쟁의 공포와 살해 위협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 와중에 사회적인 약자들, 권력에서 소외된 이들이 직접적인 피해에 고스란히 노출된 것이다. 차라리, 종교분쟁이나 권력과 야합한 종교가 없었더라면 이 세계는 더 평화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종교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무신론을 주장하는 것 역시도 종교적인 행위로 분류할 수 있다. 그들의 신은 '신이 아닌 그 무엇'일 따름이다. 결국, 어떤 유형의 신을 믿느냐, 어떤 종교를 가졌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 종교가 건강한 종교가 되려면 보편적인 종교가 추구하는 약자에 대한 배려와 한 생명을 온 천하보다도 귀하게 여기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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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못된 신앙의 표본 종교는 협박하는 종교가 아니다. 한 뿌리에서 출발한 개신교 조차도 불신하고 이단이나 사탄으로 치부하는 종교인들을 개신교는 양산해 내었다(WCC 제10차 부산총회 현장에서).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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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계의 권력에 대한 아부,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편협한 신앙인들을 양산해 내는가? 한 뿌리에서 출발한 종교조차도, 교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적대시하고, 저주를 퍼붓는 일을 신앙적인 행동으로 믿게 한다. 현실의 삶과 괴리시킨 내세, 현세에 대한 무책임성, 나 혼자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이기적인 구원관, 과연 이런 종교에 어떤 희망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지금 대한민국의 종교는 정치권력이 마음만 먹으면 마음껏 주무를 수 있는 허약한 종교가 되어버렸다. 종교로서의 권위를 상실했다. 그 이유는 끊임없이 종교가 정치권력의 시녀가 되길 원했으며, 그 결과 타락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기독교계의 문제만이 아니다. 자본의 사회를 대표하는 돈과 권력의 하수인이 된 종교지도자들을 만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들은 한결같이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이리가 들어있다.

신도들에게 종교란, 오로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끊임없이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알라딘의 마술 램프 같은 것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 이상의 것, 종교의 정수와도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다.

그리하여 이제는 신도들 스스로의 욕심이 투영된 종교지도자들이 판을 치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부자들이 사는 동네에서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설교를 할 수 없는 그런 시대가 된 것이다. 오로지, 신도들의 구미에 맞는 설법과 설교를 하는 이들만이 떵떵거릴 수 있는 그런 암울한 시대가 된 것이다.

종교는 세상의 권력을 인정하지만, 그 권력의 하수인이 되는 것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오로지 '진리'만을 설파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최근 종교계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권력에 대한 아부행위들은 반종교적이며 비난받아야 마땅한 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