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도운동의 기적과 표적, 예언과 계시

 

     이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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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적과 표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피터와그너는 빈야드운동을 제3의 물결이라고 말하였다.

그가 말한 물결(wave)의 특징은 첫째, 기적과 표적을 강조하는 현상적인 집회, 즉 기존과 다른 새로운 형태의 집회를 뜻하며 둘째, 교인들의 숫적 부흥을 뜻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여 이러한 현상적인 집회를 보여줌으로서 그러한 기적과 표적을 보고 모여드는 교인들의 숫자적인 부흥을 기준으로 하는 제3의 물결이라는 용어 자체가 그들이 건전한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다리가 잘려진 사람도 하루만에 다리가 자라날 수 있다.” 혹은 “사람이 벽을 투과할 수 있다”는 주장과 함께 “죽은 사람도 살아날 수 있다”라고 말하지만, 소문만 무성하고, 실제로 그것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만한 사례는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집회를 통하여, 의학적이며 과학적인 입증을 생략한 금가루, 금이빨과 같은 현상적인 것을 보이거나, 쓰러짐, 진동, 웃음, 입신과 같은 유치한 현상만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들은 이단들과 타종교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었을 뿐이다. 동영상을 보면, 힌두교와 이스람교의 집회에서도 쓰러짐과 진동, 웃음이 나타나며 대순진리교의 집회에서 금가루는 단골메뉴로 등장한다.

과연 신사도운동의 집회가 그들과 무엇이 다르며, 타종교의 그런 현상도 성령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한 집회가 추구하는 목적은 과연 무엇인가?

과연 기독교의 본질적이며 성경적인 목표를 올바르게 전파하였는가를 생각할 때에는 실망만을 주었을 뿐이다. 백번을 쓰러지고 딩굴고 짐승소리를 내며 웃으면 구원을 받는가? 반대로 한번도 안쓰러지고 조용한 예배를 드리더라도 예수를 신실하게 믿는다면 그는 분명하게 구원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구원의 본질인가를 스스로 묻고 스스로 그 답변을 생각하여 보라. 그러한 현상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힌두교나 이스람교, 이단종교에도 있지 않는가?

 

최근 들어 소위 영성운동이라는 이름 아래, 신사도운동과 ·빈야드운동 등의 신비주의적인 집회를 하는 교회들이 많이 늘고 있다. 이러한 성향의 집회들에 대해 걱정과 우려를 말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은 것도 사실이다. 성경에는 “영성”(靈性, spirituality)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에 “영성”이라는 용어는 가톨릭 수도사들의 육체를 가학하는 금욕주의나 고행을 뜻하는 능동적인 의미로 사용된 경우가 있었고, 복음주의자들은 “영성”이라는 용어에 대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과 은혜같은 수동적인 의미로 사용하였다. 혹간 “영성”이라는 용어를 육체와 분리시켜서 내면적인 영의 훈련과 잠재력을 개발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이원론적인 잘못된 주장도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이르러서는 일부 신비주의자들에 의해서, 은사남용주의를 뜻하기도 하고, 매우 유치한 표적과 기적을 뜻하는 용어로 전락하기도 했다. 이러한 것은 영성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영성이라는 단어를 남용하고 있는 것이다.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기적과 표적을 추구하는 신앙은 구원을 받을 수도 있고, 구원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기적과 표적을 추구하는 신앙은 구원을 받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는 점이다. 즉 기적이 일어나면 모두 성령의 역사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견해는 옳지 못하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다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 24:24).

 

거짓선지자와 거짓 그리스도도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일 수 있다.

성경은 큰(great) 표적과 기사라고 언급하고 있다. 물론 성경에는 놀라운 기적과 표적이 있었으며 그러한 일에는 항상 하나님의 크신 의도와 목적이 있어 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적과 표적만을 추구하는 신앙적인 성향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을 신비주의라고 불리워 왔으며, 그러한 것을 신앙의 목표로서 추구하는 것은 언제나 옳지 않았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였는데,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자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비난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 12:39).

 

정통교회에서 진리를 찾지 못하여 방황을 하다가 소위 이단이라고 하는 교회에 다니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기적과 표적이 나타나는 이단들의 집회는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다. 그래서 기적과 표적을 위주로 행하는 집회는 최근에 많이 늘어나고 있으며, 많은 교인들이 몰려 든다. 소위 용한 무당을 찾는 것과 같다.그러나 이러한 굳건한 반석 위에 서지 못한, 말씀이 결여된 신앙은 그러한 표적과 기적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때에 방황하게 된다. 예수님의 부활을 눈으로 확인하려는 도마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과연 “말씀에 근거를 둔 신앙”과 “기적과 표적에 근거를 둔 신앙”은 어떻게 다른가?

말씀에 근거를 둔 굳건한 믿음은 분명히 구원을 받게 되지만, 기적과 표적에 근거를 둔 신앙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구원을 받을 수도 있고 혹은 구원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필자의 견해가 아니라 성경적인 언급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그 날’이라는 심판의 날을 뜻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많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신다. 즉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권능을 행하던 많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 즉 아무리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며 기적을 행하여도 정작 예수님은 그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실 수가 있다는 것이다. 표적과 기적은 언제나 주님의 역사만은 아니었다.

가장 많은 기적과 표적을 보이셨던 예수님과 사도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막 8:12).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요 4:48).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고전 1:22).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살후 2:9~10).

 

물론 지금도 하나님의 기적과 이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거짓선지자들의 기적과 표적도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여진다는 것을 잘 분별하여야 한다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기적과 표적이 모두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기적과 표적에 의한 신앙은 거짓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며 그 분별은 신중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신앙형태 역시 주님은 비판을 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주의하여야 한다. 확실한 것을 택할 것인가 위험하고 불확실한 것을 택할 것인가는 자신의 선택이 되어질 것이다.

성경은 자주 거짓선지자와 거짓 사도, 거짓 선생과 거짓 그리스도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으며, 그들이 기적과 이사를 보이며 미혹한다고 말하고 있다.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직접 전하던 구약 시대에도 거짓 선지자들이 이적과 기사를 보여줬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신 13:1~3).

 

과거뿐 아니라 궁극적인 장래에도 거짓 이적이 있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종말적으로도 짐승과 귀신의 영이 거짓 이적을 행함으로 미혹함을 여러번을 반복하여 경고하고 있다.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 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계 13:12~14).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계 16:13~14).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계 19:20).

 

모세가 애굽의 바로왕에게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요청할 때에 지팡이를 던져서 뱀이 되게 하는 기적을 보여준다. 그 때에 바로왕의 마술사들도 똑같이 지팡이로 뱀이 되게 하는 요술을 보여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이러한 기적은 반드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출7:10-12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대로 행하여 아론이 바로와 그의 신하 앞에 지팡이를 던지니 뱀이 된지라 바로도 현인들과 마술사들을 부르매 그 애굽 요술사들도 그들의 요술로 그와 같이 행하되 각 사람이 지팡이를 던지매 뱀이 되었으나 아론의 지팡이가 그들의 지팡이를 삼키니라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많은 이스라엘인들이 예수님의 행하신 표적을 보고 예수를 따랐다. 성경은 ‘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좇았다고 언급한다. 본문에서도 예수님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을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은 그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여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보고 믿는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님은 그들의 내면 중심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곧 바라바를 놔주고 예수님을 못박으라고 한 군중들이었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요2:23-24)

 

우리는 기적과 표적에 대해서 무조선 배척할 수는 없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능력과 권능을 행하시는 분이라는 것은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기적과 표적을 보고 믿는 믿음은 구원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조심하여야만 한다. 사탄도 거짓선지자나 거짓그리스도도 그러한 방법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적인 내용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정리를 해 볼 수 있다.

(1) 기적과 표적은 하나님에게로부터 온 것일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을 미혹하기 위하여 사단으로부터 온 것일 수도 있다.

(2) 하나님에게로부터 온 기적과 표적이라고 할지라도, 그러한 가시적인 현상을 보고 추구하는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3)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여지는 권능과 능력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경우도 있다.

예수님은 보지 못하고 믿는 믿음을 복된 믿음이라고 하셨으며,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며 믿음으로서 증거를 얻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20:29).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것이 하나님의 역사이고, 어느 것이 사탄의 역사인지를 구별하여야만 한다.

그러한 구별은 상당히 어려운 것이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기록된 말씀으로 분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자들이 언제 예수가 재림한다는 계시를 받았다고 예언을 할 때에, 우리는 그러한 주장에 대해서 성경의 내용과 일치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성경은 그 날과 때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시한부종말론은 거짓주장이라고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에게 표적을 보여달라고 했을 때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이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마16:4)

 

요나의 표적이 의미하는 예표의 실체는 곧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자 예수님이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적과 표적이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놀랍고 중요하고 본질적인 하나님의 기적과 표적은 바로 예수이며, 우리는 오직 그 사실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요나의 표적, 그것이 가장 중요한 복음이다.

 

2. 예언과 계시의 은사

 

예언,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월드컵 축구경기의 기간에, 유럽에서 파울이라고 하는 문어가 월드컵의 승패를 한번도 틀리지 않고 알아 맞힌다는 웃지 못할 뉴스가 있었다. 또 월드컵 예선에서 스코아를 정확히 알아맞히는 사람들에게 경품을 주는 행사도 있었는데 어느 사람들은 모든 스코어를 하나도 틀림이 없이 알아 맞추었다고 한다.

국회의원과 대통령선거만 되면 과거의 전력을 과시하는 예언가들이 대거 등장한다. 미국에서는 무역센터에 납치된 비행기가 충돌할 것을 예언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과연 그들이 예언의 초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고 어떤 확률적인 수치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와 똑같은 코메디가 기독교의 교회에서 연출되고 있다. 목사가 교인들의 장래 일을 점쳐주는 무당과 똑같은 일이 교회 안에서 기독교의 이름으로 시행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일을 예언하였는데 정확하게 맞추었다고 과거의 정확도까지 선전과 홍보를 하면서 전력을 들추어내고 있다.

어느 외국의 목사가 죽은 사람을 수백명을 살렸다는 전혀 근거가 없는 과대광고가 등장하고, 어느 목사가 기도를 하니 여름에 폭설이 내려 산불이 꺼졌다고 주장을 한다. 목사들을 신격화하고 신령한 존재로 부각시키려는 소위 마케팅이 벌어지고 있다. 과거에 무엇도 알아 맞혔고, 과거에 어떤 일도 있었다는 광고와 선전은 그 목사나 예언자를 부각시키기 위한 목적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들은 그것을 성령의 역사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문어도 성령의 역사인가? 족집게 무당들은 모두 성령의 역사인가?

언제부터 기독교가 이렇게 되었는가?

 

필자가 잘 아는 목사는 재미삼아 그들의 예언을 들어보았는데, 그들은 현재 목사에게 장차 주의 종이 될 것이라고 예언을 했다고 한다. 최근에 그들의 예언을 들어보면, 자신의 예언이 틀릴 것을 우려하여 상징적인 비유를 사용하여 두루뭉실한 예언을 하고 있는 것이 일반 무당들의 상투적인 수법과 동일하다.

성경은 예언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을까?

성경에서 예언은 개인의 장래를 점쳐주는 무당의 행위가 아니다. 그러한 장래 일을 점치는 행위는 성경에서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는 일이다.

 

미3:11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신18:10-12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들에게와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며 너희가 꾼 꿈도 곧이 듣고 믿지 말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29:8-9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1) 선지자의 예언은 하나님의 멧세지를 공동체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신 18:18-20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무릇 그가 내 이름으로 고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내가 고하라고 명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만일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헬라 이방적인 개념에서 ‘선지자’란 하나님의 신탁자를 뜻한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의 선지자란 자기의 느낌이나 해설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수정함이나 해석함이 없이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구약에서 선지자라는 단어는 “나비, 로에, 호제”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그 원래의 개념은 “보다”는 의미를 갖는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보여주시면 선지자는 그 말씀을 본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이 곧 선지자의 예언이다.

 

벧후 1:20-21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2) 예언은 항구적인 초능력이 아니다

 

다시 말하여 선지자는 항상 어떤 예지나 예언의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주관적인 해석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을 공동체를 위하여 전달하는 것뿐이다. 즉 예언은 그 사람이 갖고있는 어떤 항구적인 능력이 아니다.

 

민 11:2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신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신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아니하였더라

 

사울도 한정적으로 예언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신이 임하였기 때문이다.

 

삼상 10:10-12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 전에 사울을 알던 모든 사람이 사울의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함을 보고 서로 이르되 기스의 아들의 당한 일이 무엇이뇨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고 그곳의 어떤 사람은 말하여 이르되 그들의 아비가 누구냐 한지라 그러므로 속담이 되어 가로되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더라

 

고전 13:8-9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행 19:6-7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3) 기록된 성경이 곧 선지자를 의미한다

 

렘 23:1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또한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선지자라는 단어는 기록된 성경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선지자라는 것이 반드시 어떤 직분적인 의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성경이 곧 선지자의 글이기 때문이다.

 

눅 16:29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눅 24: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4) 성경에서 예언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는 것이다.

 

고전 14:4-5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렘 23: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거짓 몽사를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이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다시 말하여 공동체의 유익이 없는 예언은 거짓예언이다. 특히 돈이나 금품을 받고 개인의 장래를 점쳐주는 행위는 하나님을 빙자한 거짓예언이다.

물론 성경에서는 개인을 위한 예언도 드물게 있다. 예를 들면 요셉, 다윗, 바울과 같은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그 개인은 그 공동체에 대단히 비중을 차지하는 경우로서, 개인적인 장래일을 점을 쳐준 것이 아니며,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공적인 의미를 포함한다고 보아야 하며, 개인에게 미리 장래의 일을 알려줌으로서 그것을 사전에 그것을 피하거나 변경하게 함으로서 대처할 수 있도록 하는 예언이 아니다.

 

예를 들면, 신약성경에는 선지자가 바울에게 위험을 알려주는 예언이 있다.(행21:11)

바울에 대한 예언은 그 공동체에서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 위험을 피하라고 바울에게 말하지는 않았으며, 그 예언을 들었던 사람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권고를 한 것이지만, 바울은 예언을 해달라고 요청을 한 적도 없고, 올라가지 말라는 주위의 권고를 듣고 피하지 않으며, 그대로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 즉 사도바울의 개인을 위한 장래 일을 점치는 것이 아니었다.

 

(5) 예언은 개인의 장래를 점치는 행위가 아니며, 그러한 행위는 성경에서 엄격하게 금지된 거짓선지자의 행위이었다

 

성경은 오히려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 무당을 용납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는가?

이러한 점치는 행위, 무당에 대해서는 성경은 많은 곳에서 절대금지를 경고하고 있으며, 그러한 자들은 죽이라는 구절도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하는 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복술자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신18:10-12)

 

성경은 수없이 많은 부분에서 거짓선지자를 조심하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과 장래를 미리 알게 해준다는 수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실제로 존재하였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들 중에서는 사람의 장래 일을 점쳐준다는 소위 복술자, 길흉을 말하는 자, 무당들이 포함되었을 것이고, 성경이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라고 강조하며 경고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겔 13:9 그 선지자들이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 것을 점쳤으니 내 손이 그들을 쳐서 내 백성의 공회에 들어 오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렘 14:14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복술과 허탄한 것과 자기 마음의 속임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도다

 

(6) 예언이 정확히 성취되지 않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 아니라, 목사나 예언자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그는 거짓선지자이다. 예언을 하는 자는 그의 명예와 모든 것을 걸고 반드시 검증을 받아야만 한다. 예언이 틀려도 그냥 넘어가서는 절대로 안된다.

 

신 18:20-22 내가 고하라고 명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만일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

 

예언은 성경적인 내용으로 검증되어져야만 하며, 그 예언이 주관적이었거나, 하나님 이외의 이름을 높이거나, 그 예언이 조금이라도 틀리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로서 처벌을 당하여야만 한다.

 

겔 13:3 주 여호와의 말씀에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우매한 선지자에게 화가 있을진저

 

렘 27:15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니 내가 너희를 몰아내며 너희와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을 멸망시키기에 이르리라 하셨나이다

기적과 이사는 거짓선지자들과 거짓그리스도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기적과 이사로 성도들을 미혹하는 것이다.

 

막 13:2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벧후 2:1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그래서 성경은 이러한 선지자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혹은 “여호와의 신이 임하여”라고 말하고 있었다. 선지자들의 가장 중요한 사명을 공동체의 사역을 알리는 것이었으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멧세지를 전달하는 것이었으며,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장차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실 그리스도의 출현을 알리는 것, 즉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3. 계시의 종결성

 

계시에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있다.

특별계시는 (1) 현현 (2) 전언(傳言) (3) 기적 등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물론 오늘날도 특별계시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성경도 특별계시이다. 대부분의 일반 교회에서는 계시의 종결성을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직통계시의 종결성을 뜻한다. 그러나 혹간 사람들이 어느 성경에 계시와 예언이 끝났다는 구절이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러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계시의 종결에 대해서 이해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계시의 종결이라는 주장은 앞으로 계시가 모두 끝났다는 뜻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러한 계시나 예언은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성경적인 검증을 받아야만 한다는 뜻으로 이해를 하면 확실하다. 지금 수많은 이단들이나 사이비집단의 교주들은 대다수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들이 모두 성경과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 계시를 거짓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여 계시나 예언은 성경적인 내용을 벗어날 수가 없다. 만일 계시나 예언이 성경과 벗어나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은 변치 않는 속성을 가지신 분이 아니라, 오히려 두 말로 식언하시는 분이 되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1) 성경은 객관적인 계시이며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만약 이것을 부정한다면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성경의 객관성과 완전성에 대해서 모든 기독교인들은 인정을 하여야만 한다. 우리의 구원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성경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신앙은 재점검을 받아야만 할 것이다. 다시 말하여 계시나 예언은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분별해야 하지만, 성경 말씀은 이미 사실이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온전히 입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오한전한 성경이 없던 시대에는 예언과 계시가 필요하였지만, 성경이 있는 시대에는 거꾸로 예언과 계시가 성경으로 검증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여, 성경의 객관성과 성경의 온전성을 인정한다면, 기록된 성경만으로 충분하다는 뜻이 된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 1:1,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라는 본문에서 예수의 말씀은 곧 신약성경말씀을 뜻하며, 신약의 기록이 곧 하나님의 최종적이며 온전한 계시임을 증거하고 있다. 신약 계시에 추가할 또 다른 계시가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사도요한도 계시록 마지막 부분에서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말하고 있다(계 22:18-19). 이것 역시 계시록에 기록된 하나님의 종말적 예언의 말씀이 충분하다는 것을 증거한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성경은 능히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다는 것이다.

즉 성경의 완전성, 객관성을 인정한다면, 더 이상의 계시나 예언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곧 그것이 계시의 종결성이다. 만약 다른 계시가 필요하다면 성경은 불완전한 기록이 되어진다.

 

(2) 계시와 예언이 성경과 다르다면 이단적인 주장이 된다.

 

이단이란 아주 황당하고 해괴망측한 주장을 하여야만 이단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비성경적인 주장을 가르치는 곳이 곧 이단이다. 특히 구약이나 신약에서 예언이나 계시, 선지자들은 어느 개인의 목적과 이익을 위하여, 그 개인의 장래에 대해서 점을 쳐주거나, 장래의 일을 알려주었던 적은 없다. 사사나 선지자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혹은 교회와 같은 공동체를 위한 하나님의 계시나 예언을 전하였다. 그들에게는 객관적이고, 완전한 진리의 기준이 되는 성경 66권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백성에게 예언과 계시를 전해야 하였다. 신약성경이 정경화가 된 시기는 AD 4세기경이다. 신약성경의 그림자이며 예표가 되는 구약성경이 정경화가 된 것도 BC 2세기경이었다.

 

(3) 성경은 선지자나 신령한 자보다 권위가 더욱 높다.

 

초대교회에 자신을 신령하다고 하는 자칭 거짓사도들과 거짓선지자들이 나타났다. 바울은 그러한 선지자나 신령한 자들의 주장이 진리가 아니라, 자신의 편지 즉 신약성경이 주의 명령이라고 단언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전 14:36-37). 바울의 서신은 그것이 곧 주의 명령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이 바울의 최초의 서신이라고 하는 데살로니가전서 2:13에도 등장하는데, 바울은 데살로니가교인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을 감사하고 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얼마 후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를 기록하는데, 그 이유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었다. 바울은 이 서신의 권위에 대해서 엄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살후 3:14).

 

바울의 이러한 주장은 심한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살 정도로 확고하다. 바울의 서신, 즉 신약성경과 다르면 이단이라는 이야기이다. 바울은 성경과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서는 저주를 받는다고 강하게 비난한다. 하늘의 천사라고 할지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은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6-9).

 

어떤 계시나 어떤 예언, 심지어 천사가 전하여준 것이라고 할지라도 성경과 다른 복음은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완전성과 계시의 종결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베드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벧후 1:14-16).

 

특별히 베드로는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명하신 것을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과 동일한 신빙성을 갖는 것으로 말하였다.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벧후 3:2).

 

더욱이 베드로는 바울의 서신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5-16).

 

바울의 서신을 "다른 성경과 같이 억지로 풀지말라"고 설명할 수 있었다는 것은, 바울의 서신을 성경으로서 인정하였다는 명백한 증거라고 말할 수 있으며, 역시 베드로는 바울의 사도성을 인정한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된다.

바울의 서신에 대해서 "(주님에게로부터)그 받은 지혜대로" 썼다고 베드로는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례는 많이 발견되는데, 유다서 17, 18절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유 1:17-18).

 

유다는 "사도들의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이라고 언급하면서 벧후 3:3을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벧후 3:3).

 

이 유다서 본문이 말하는 것은 베드로후서가 "사도의 가르침"으로 이미 인정을 받으면서 널리 읽히고 있었으며, 즉 베드로의 사도성이 이미 정립되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특별히 사도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서신, 그리고 계시록을 기록하였다. 사도요한은 요한서신에서 자신이 목격자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았다고 말하고 있으며, "우리가 이것을 쓴다"고 언급하고 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요일 1:1-4).

 

사도요한은 계시록에 대해서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계 1:2)라고 서두에서 밝히고 있다. 게다가 사도요한은 자신이 기록한 계시록에 대해서, 그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거나 감하는 행위에 대해 무서운 저주를 선포함으로, 자신의 기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당당히 선포합니다. 성경의 완전성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계시의 종결성은 성경의 완전성에 근거를 둔 것이다. 즉 성경의 완전성과 객관적인 진리의 기준임을 인정한다면, 더 이상의 계시와 예언은 필요가 없다는 것이 바로 계시의 종결성이다. 그 계시나 예언도 성경말씀에 부합되는지 검증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사도들이 전하는 주의 명령이며, 주님의 가르침이다.

다른 복음은 없으며, 하늘의 천사에게 받았다고 할지라도 성경과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게 된다. 사도 요한은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자"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사도들의 말(우리의 말)로 미혹의 영에 대한 영적인 분별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 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