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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적인 집회에 대한 비판
이인규
(1) 쓰러짐
빈야드 운동이나 신사도운동의 집회에는 ‘넘어지는 시간’이 있는데 그것은 푹신푹신한 양탄자 혹은 스티로폴 위로 넘어지는 시간을 말한다. 안수를 하면 쓰러지게 되는데, 훈련을 받은 요원들이 뒤에서 쓰러지는 것을 잡아주게 된다. 쓰러진 사람들이 뒤로 넘어져, 누워있는 것이다. 그들은 양탄자가 깔린 마루바닥을 하나님의 작업대로 간주하고, 이것을 성령 안에서 휴식하는 것이라 한다.
이것을 이들은 ‘입신’이라고 하기도 하며, 혹은 ‘안식, 쉼’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성령 안에서 자아의 죽음’이라는 이상한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어느 성경에서도 ‘성령 안에서 죽음’을 말한 적이 없으며, 쓰러짐을 안식이라고 말한 적도 없다. 또한 성령을 받고 쓰러진 경우도 성경은 언급하지 않는다.
이 쓰러짐의 현상에 대해서 최근 신학자들은 이와같이 넘어지는 현상이 정말로 하나님으로 부터 온 것인지 진지하게 의문을 제기하여 왔다. 이와 같은 이상한 현상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증거할만한 것이 전혀 없으며, 어떤 경우는 기도해 주는 사람이 밀어 넘어 뜨리는 수도 있고, 넘어진다는 것에 대해서 미리 알려 주므로서 최면 혹은 암시의 힘(Power of Suggestion)이 원인일 수도 있다.
그 예로 뒤에서 넘어지는 것을 잡아주는 사람이 없을 경우나 스티로폴이 깔려 있지 않을 경우에 잘 쓰러지지 않거나 혹은 뒤를 보고 엉거주춤 손을 기대고 넘어지게 된다. 쓰러지는 사람은 항상 뒤를 확인하고 쓰러지게 된다. 그것은 뒤로 넘어지면 다친다거나 옷을 더럽힐 수 있다는 의식이 넘어지는 것을 방지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자신이 억제할 수 없는 성령의 강권하는 힘으로 쓰러지게 된다면 그들은 뒤를 의식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어느 집회에서는 뒤에서 잡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큰 부상을 입게 되어 주최측을 고발을 한 여자의 경우도 있었다.
현재 빈야드운동은 공식적으로 4개 교단에서 접촉금지, 불건전한한 단체로 규정되어 있고, 특히 기성교단에서는 사이비성이 있다고 발표되어 있다.
통합(1995/81/도입금지), 고신(1996/46/참여금지, 2007/57/빈야드성 유사운동 집회 참여금지), 합동(1997/82/참여자, 동조자는 징계), 기성(1998/53/사이비성 있음),
물론 현재도 각 교단은 빈야드와 신사도운동의 유사계열에 대해서 연구와 조사를 하고 있으며, 더욱 많은 교단과 이단연구기관이 이러한 발표를 공식적으로 하게 될 것이다. 신사도운동에 대해서는 고신과 합신에서 2009년에 이단성/참여금지를 발표하였다. 또한 빈야드와 신사도의 문제로 관련하여 주님의 교회(김용두목사), 큰믿음교회(변승우목사), 예태해목사등을 비롯한 몇곳이 제명되거나 이단으로 발표가 되었다.
(2) 그들의 문제점이 무엇일까?
1) 기적과 표적을 강조하는 무질서한 현상 위주의 집회
2) 은사남용주의와 은사의 전이(임파테이션)
3) 비신학적, 비교리적, 비성경적인 체험 위주
4) 기복신앙과 물질적인 헌금을 강요
결국 교인들은 그 집회에서 행하여지는 기적과 표적을 보고 그들의 집회에 모여든다. 통계적으로 보면, 그들에 빠진 교인들은 더 많은 기적과 표적이 행하여지는 교회로 옮기게 되고, 더욱 새롭고 놀라운 행위를 하는 교회로 이적하며, 적지 않은 교인들이 이단교회로 전락되어진다.
현재 미국의 일부 신사도운동 인사들은 사람이 벽을 통과할 수 있다, 교통사고로 잘려진 다리가 자라난다, 한사람이 두 장소에 동시에 나타날 수 있다는 주장까지 하며, 결국 사람은 죽지 않을 수 있다는 영생을 주장하는 극단적인 발언까지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기적과 표적으로 강조하는 신앙은 점점 더 강도가 높은 신비주의로 발전하게 되며, 무속적인 신앙의 성향이 되고만다. 현재는 미국에서도 많은 기독교들의 경계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들이 주로 주장하는 것이 있는데, 빈야드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웨슬레목사도 쓰러짐의 운동을 하였다고 주장한다. 물론 처음에는 웨슬레도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매우 신기하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토론토 축복 조사보고서>의 저자 스탠리 젭에 의하면, 웨슬레는 1740년 5월 21일자 일기에 웃음의 영이 있어 웃어대는 여인에 대해서 “마귀가 한 사람을 그렇게 갈기 갈기 찢어놓는 모습은 일찍이 본적이 없었다. 마침내 그녀는 기진맥진해서 그리스도께 도와 달라고 외쳤다. 그러자 그녀를 괴롭히던 심한 고통이 사라졌다라고 기록하고 있다“고 말한다.
웨슬레는 후에 소위 ‘빈야드운동의 영적 현상’에서 볼 수 있는 쓰러짐과 부르짖음같은 현상을 사탄의 역사로 보고 있었다. 웨슬레의 1743년 3월 21일 일기에서는 매일 밤마다 설교하는 동안 큰소리로 부르짖는 사람들의 경우에 대한 분석 결과를 말한다. 한번도 발작해 본적이 없으나 마침내 이러한(넘어지는) 현상을 체험하게 되는데, 사람들은 쓰러지는 순간에 몸에 힘은 완전히 빠지고, 격렬한 고통에 사로 잡히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쓰러지는 현상이 일어날 때 어떤 사람은 마치 칼로 그들의 내부를 찌르는 것처럼 느꼈다고 말하고, 또 다른 사람은 마치 무거운 짐이 그들 위로 내려 누르고 짜서 땅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처럼 느꼈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가슴이 터질듯이 부풀어 올랐으며, 또 다른 사람은 마치 심장이, 모든 내부가, 몸 전체가 조각 조각으로 찢어져 버리는 것처럼 느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요한 웨슬레는 어떻게 보았던가?
- 이런 징후를 나는 어떤 자연적인 원인으로 돌릴 수도 없고, 또한 하나님의 영(성령)의 영향으로 돌릴 수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로 올 때에, 사단이 그들을 찢어 버린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1759년 11월 25일자 일기에서는 “처음에 이러한 역사(쓰러짐의 현상 등.)는 의심할 여지없이 전적으로 하나님께로 부터 온 것임을 확실히 믿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부분적으로 믿는다.”고 자신의 입장을 밝혀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영호목사의 빈야드 연구보고서에서 발췌)
웨슬레는 이 일기에서 특별히 무엇이 위험한가를 지적하고 있다.
즉 “위험한 것은, 진동, 환상, 입신 등과 같은 현상이 우리의 내적인 역사(변화)에 필수적인 것이라 하여, 이러한 현상 없이는 안되는 것처럼 생각하여, 특수한 현상을 너무 강조하는 것이고. 또 다른 위험은 아마도 이러한 특별한 현상을 너무 과소 평가 하든지, 전적으로 정죄 하든지, 또한 하나님의 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하나님의 역사에 방해가 된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하여 주의를 요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행크 헤너그라프는 그의 책에서 웨슬레목사의 견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 웨슬레는 1773년 열렸던 집회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그때 한 찬송을 30번 혹은 40번을 계속 반복하여 부르자 그곳에 있던 몇몇 사람들의 몸이 심하게 떨리는 현상이 일어났다. 이런 현상에 대해 웨슬레는 “사탄은 사람의 단순성을 자극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역사를 불신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740년 브리스톨 집회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는 일이 일어났다. 이런 현상에 대해 웨슬레는 “나는 몇몇 사람들이 이상한 행동을 하며 사탄에게 농락당하는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랐습니다”라고 말했다. 잠시 후 ‘웃음의 영’이 다시 돌아왔다. 참석했던 한 여성이 “사탄에게 아주 강력하게 사로잡혀서 거의 숨이 넘어갈 때까지 웃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욕설을 퍼부으며 하나님을 모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엄청난 힘으로 발을 구르며 저항하는 바람에 네다섯 사람이 간신히 그 여자를 저지할 수 있었다”. 웨슬레는 이런 현상이 분명 악마적인 것이라고 여겼고, 기도를 통해 겨우 그 현상을 멈추게 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운동, 329-330쪽)
말하자면 실제로 아무렇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 마치 무엇인가를 보고 느낀 것처럼 가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한 하나님의 영(성령)의 권능에 진정으로 압도된 사람의 부르짖음이나 진동하는 동작을 흉내내는 사람도 있음을 가정해 볼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자신이 성령의 능력을 직접 체험하고 있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챨스 웨슬레, 조지 휫필드와 같은 위대한 부흥사들은 웨슬레의 집회에서 나타는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을 제지했다고 말한다. 1739년 1월 1일 집회에 참석해 쓰러지는 광경을 목격 했던 자요 웨슬레와는 친형제인 찰스 웨슬레도 ‘빈야드 운동의 영적 현상들’을 사탄의 탓으로 돌린 사실을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요한 웨슬레의 말에는 주님의 능력이 존재했다. 그래서 원수는 회중 가운데에서 울부짖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음성을 안들리게 하고 복음을 죄인들로 부터 막는 그 끔직한 고함들을 질서의 하나님께로 돌리지 않고 분명히 사단의 짓으로 돌린다.”
조지 휫필드가 설교를 할 때에는 30,000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 중에는 쓰러지거나 몸을 떠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휫필드는 “표적들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표적에 하나님의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마귀가 반드시 이 일에 간섭을 한다고 나는 믿는다”(박영호, 빈야드운동평가, 231쪽)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고 말한다. 또 휫필드는 “나는 오늘날 기적들의 반복을 주장하는 자들의 영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외적인 기적들은 필요가 없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메시야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말씀을 통한 성령의 내적역사만이 필요할 뿐이다”(같은 책, 232쪽)라고 말한다.
필자는 힌두교와 불교, 이스람교와 이단집단에서 행해지는 쓰러짐과 격렬한 진동, 웃음소리등을 보여주는 동영상을 갖고 있다. 즉 타종교나 이단종교에서 행하여지는 이러한 행위들은 그러한 형태의 집회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3) 쓰러짐의 현상에 대한 성경적 반증.
“성령 안에서 죽임을 당한다.”는 표현은 성령은사 집회의 사람들이 뒤로 쓰러지는 현상을 묘사한 것이다. 무속적인 종교의 입장에서 보면 “성령 안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이라고 불리는 쓰러짐은 “어떤 영에 사로잡혀 황홀경에 빠지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빈야드의 쓰러짐은 단순한 것으로서 그런 현상도 아니다.
성경을 보면, 쓰러짐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마귀의 역사라고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가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마17:15)라고 요청하였다. 마귀에 걸린 바로 그 사람은 예수님께 오자 넘어졌다.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막9:20)
이러한 쓰러짐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귀신의 역사이다. 성경은 귀신이 경련을 일으키게 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땅에 엎드러져 거품을 흘린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눅 4:35)
성경은 귀신이 그 사람을 넘어 뜨리고 나왔다고 말한다. 그런데 마귀에 의해 넘어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병자들의 병을 고칠 경우 오히려 일어나게 하셨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5:8)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막5:42)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눅8:55)
성령이 왜 우리를 쓰러지게 하는가? 우리는 쓰러질 어떤 이유도 없으며, 쓰러지지 않는다고 우리의 신앙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쓰러지지 않으면 우리가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 쓰러지지 않으면 우리에게 성령이 내주하지 않는가? 쉽게 말하자면, 쓰러짐은 아무 유익도, 아무 소용도 없는 불필요한 현상이다.
필자가 직접 참여한 이러한 집회에서 잘 아는 교우 하나가 안수를 받고 쓰러졌다. 필자는 집회 후에 “왜 쓰러지게 되었는가?”라고 질문하였으나 “그냥 쓰러졌다”는 답변을 들었을 뿐이다. “안쓰러지면 민망할 것이 아닌가?”라는 이야기를 한다.
타종교와 이단집단에서도 쓰러짐이 나타난다. 그것도 성령의 역사인가? 이미 19세기 초반(1800년대)에 쉐이커교에는 쓰러짐의 현상이 있었다고 말한다.
행크 해너그라프의 빈야드와 신사도운동의 가짜 부흥운동이라는 책에 의하면 베니힌의 오클라호마의 집회에서 쓰러져있는 엘라 페퍼드라는 여인 위로 다른 사람이 쓰러짐으로 평소 앓던 병의 합병증으로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고 한다. 또 노스캐롤라이나 집회에서 헌터라는 부부가 집회를 할 때에 에버린 퀴켄달이라는 사람이 쓰러지다가 등뼈가 부러져 그 치료비로 3억6천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있었다고 한다. 만일 뒤에서 붙잡아 주는 사람이 없다면, 쓰러지는 사람들은 결코 자신있게 넘어지지 않으며, 뒤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만약에 진흙탕 물에서 이러한 집회를 연다면 쓰러지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4) 빈야드 영적 체험 비판.
우리는 존 윔버가 주장하는 빈야드 현상들이 성경적인 배경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즉 빈야드운동은 비성경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살펴 보아야만 한다. 물론 존 윔버를 비롯한 빈야드운동자들은 그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많은 성경구절을 인용하지만 그의 성경 인용은 대부분 적절하지 않다. 예를 들면 존 윔버는 넘어지는 현상에 대해서 에스겔 1:28을 인용한다.
그러나 에스겔이 엎드린 것은 성령이 임해서 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엄과 권능을 느끼고 스스로 에스겔이 엎드린 것이다. 또꼬꾸라지는 현상이 성령의 역사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예수를 잡으러온 군사들(요18:6), 무덤을 지키던 파수군(마28:4), 귀신이 꼬꾸라진 것(막9:20)의 성경구절을 제시하지만, 군사와 파수꾼등은 사실상 하나님의 은혜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며,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아니었으므로 성령의 역사와 전혀 무관한 것이다.
성경은 성령을 받고 그 성령의 힘으로 뒤로 쓰러졌다는 구절이 단 하나도 없으며, 어떤 위엄과 권세를 느낌으로 자신이 (앞으로) 고의적으로 엎드린 적은 있었다.
참된 신앙의 정서는 ‘쓰러지게 될 것’이라는 집단최면, 감정이나 느낌, 흥분 상태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말씀을 통한 내적인 감동과 조명을 통해 오기 때문에 육신에 나타나는 반응이 참된 정서의 기준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성령충만은 비록 외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할 수 있어도, 결국은 내적인 성령의 충만감을 뜻한다.
그리고 넘어지고 딩구는 현상, 술 취한 듯한 현상, 짐승소리를 내는 행위, 몸부림을 치는 행위, 웃거나 슬퍼하는 행위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은 무질서한 하나님이 아니며,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찾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이것들이 하나님과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보이는 그대로 믿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종류의 은사와 기적, 표적에는 항상 가짜가 끼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존 윔버는 성경을 중심으로 현상을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체험적인 현상을 성령의 역사로 인정하고 후에 성경구절을 짜맞추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존윔버는 엡5:18을 인용하여 “성령에 취하라”라고 말한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그러나 엡5:18은 “성령에 취하라”고 말하지 않으며, ‘술 취하는 것’(get drunk with) 대신에 ‘성령 충만하라’(be filled with)고 말할 뿐이다. 그 성경본문은 술 대신에 성령으로 취하라고 하든지, 혹은 쓰러지라는 의미가 아니다. 술에 취하여 사리에 대해서 분별을 하지 못하는 것을 경고하고 비판하며, 오히려 성령충만으로 인한 분별과 각성, 즉 ‘깨어있음’을 경고하는 내용이라고 보아야 한다.
(5) 성령의 역사
그들은 이런 현상적인 집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지 말라”라고 말한다. 그러나 빈야드운동과 신사도운동이야말로 왜 성령의 역사를 축소시키는가? 성령의 사역을 고작 쓰러뜨리고 딩굴며, 가짜 금가루를 뿌리는 유치한 존재로 만들고 있는 자들이 누구인가? 신앙적으로 아무 유익도 없고 불필요한 일을 왜 성령께서 행하시는가? 쓰러지지 않고 웃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하며, 성령이 없는 것인가?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성도에 대한 주요한 사역은 아래와 같다. 쓰러지고 가짜 금가루를 주는 성령이 아니시다. 성도에게 적용하시는 성령의 본질적인 사역은 다음과 같다.
1)죄를 깨닫게 함(행5:31-32).
2)거듭나게 하심(요3:3,5).
3)성도와 함께 함(롬8;11).
4)진리를 깨닫고 믿게함(요14:26).
5)하나님의 자녀됨을 증거함(롬8:16).
6)위로함(요14;16-26).
7)기쁨을 줌(롬14:17).
8)분별력을 주심(고전2:10-16).
9)열매를 맺게 함(갈5:22).
10)은사를 주심(고전12:3-11).
11)성령 충만케 함(헹2:4).
12)거룩하게 하심(롬15:16).
십수년 전 인터넷 이전에 하이텔, 천리안과 같은 전화 모뎀을 통한 온라인 통신이 있었다. 필자는 그 당시부터 이단들과 토론을 해왔는데, 그중 한 사람과의 토론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는 차를 몰고 주차장에 들어갈 때에 기도를 하면 성령께서 주차할 빈 곳을 만들어 주신다고 했다. 더 나아가서는 자신이 점심을 무엇을 먹을 것인가를 성령께서 정하여 주신다고 말했다. 필자는 이 사람에게 잘못된 신비주의라고 하였고, 이 사람과의 토론은 결국 그 사람의 욕설과 함께 종료되었다. 그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을 알려주고 가르쳐 주는 성령께서 욕설을 하라고 가르쳐 준 모양이다.
이러한 신앙적인 형태를 우리는 신비주의라고 부른다. 물론 필자는 하나님의 기적과 이사를 더 이상 없다고 무조건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느 개인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원할 때마다 그 개인의 이익을 위하여 매번 기적을 만들어 주신다는 신앙은 신비주의라고 보아야 한다. 성령께서는 주차장 요원이 아니시다.
자신은 설교준비를 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 목사가 있다는 것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성령께서 무엇을 설교할 것이며, 무엇을 말한 것인가를 모두 정하여 주고 가르쳐 준다는 것이다. 자신이 설교준비를 위하여 열심히 노력한다고 하면 자기의 위신과 체면이 낮아지는가? 필자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큰믿음교회 변승우목사는 성령께서 자신의 책 제목과 내용을 계시하여 준다고 주장하지만, 그는 이단성을 지적받게 되자 그의 책, ‘지옥에 가는 크리스쳔’을 수정하고 고친다. 변승우목사의 성령은 자신의 계시를 바꾸고 수정하기도 하는가?
필자는 이단 세미나를 요청하는 곳이 있으면, 기도와 함께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자료수집을 하여 모든 준비를 한다. 특히 구원파나 일부 형제교회, 지방교회 등은 신학과정과 목사제도를 부정하는데, 회중 중에서 아무나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설교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왜 사람들은 이러한 주장을 할까?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이 매우 신령한 존재라는 것을 부각시키려고 한다고 보여진다. 또 자신들의 학습적 무능력이나 결함을 감추고 위장하기 위하여, 자신의 주장이 성령으로부터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하며,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 위한 우월적인 생각으로 이러한 주장을 하기도 한다. 특히 이러한 경우는 이단, 사이비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흔히 발견되는 공통점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성령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도, 전혀 성경에 맞지 않는 주장을 한다. 실제로 수많은 이단들의 교주들이 자기의 주장을 성령이 가르쳐 주었다고 하거나, 천사가 계시를 하여주었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는가? 사도바울은 기록한 말씀을 진리의 기준으로 제시하였다. 바울과 아볼로도 기록한 말씀으로 본을 보였다는 것이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전4:6).
심지어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도 자의적으로 말하지 않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말씀을 증거한다. 즉 기록된 성경과 다른 복음을 전하거나, 다른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들은 모두 거짓선생이며 거짓 선지자이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라”(요 16:13-14).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할 것이요”(요15:26).
성령께서 개인적이며 일상생활적인 것까지 일일이 직접적으로 가르쳐 주는 것은 아니다. 정말 그렇게 가르쳐 주셨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또 자기 자신에게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모두 성령의 감동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신앙이라고 단언하여도 좋다. 어떤 목사는 어떤 일을 앞두고 “예감이 좋지 못하거나 기분이 좋지 않으면 성령이 반대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고 한다.
특히 마이클 비클의 IHOP이나 큰믿음교회는 선지자학교, 예언자학교를 만들어서 개인에 대해서 예언을 하도록 한다. 어느 성경에 장래의 점을 쳐주고 예언을 하여 주라고 말하는가? 오히려 성경에서는 점을 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더욱이 점과 복술은 성경에서 금지하고 있다(레 19:26, 신 18:10, 신 18:14, 왕하 17:17, 렘 14:4, 렘 27:9, 렘 29:8, 미 5:12, 계 9:21, 계 18:23등).
어떤 사람은 아침에 성경책을 임의로 펼쳐서, 손가락으로 짚는 구절을 정하여, 그것이 성령께서 자신에게 계시를 주는 메시지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을 들었던 적이 있다. 기독교는 이런 속된 무속적 신앙이 아니다.
성령은 개인의 장래를 점을 쳐주거나 예언을 하여주거나, 일상생활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일일이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오실 성령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
성령이 모든 것을 가르쳐 주므로 공부나 학습이 전혀 불필요하다는 주장은 잘못된 주장이다. 주관적인 신비주의자들은 인간교사를 부정하고 오직 성령으로만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하거나, 직접계시만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보면, 초대교회는 교사라는 직분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고전 12:28, 14:19, 롬 12:7, 엡 4:11)
즉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진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인간 교사를 도구로 사용하셨다. 이러한 성령의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이신 교회에 덕을 세우도록 주어지는 것이다(고전 14:12).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에서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는 말씀을 발견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며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인도하는 교사들은 기도하며 최선을 다하여 공부하고 미리 준비하여야 한다. 성령의 가르침이란 인간의 노력을 전혀 배제하여도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의 노력으로만 되는 것은 아니며,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도우심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도 잊으면 안된다.
시편의 기자는 이렇게 기도하였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아볼로는 학문이 많고 일찍 주의 도를 배운 사람이었으나 그는 요한의 세례만 알던 사람이었다.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행18:24-25).
그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성경을 자세히 풀어 배움을 받고 나서부터, 공중 앞에서 성경으로 유대인들을 이기게 되었고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거하게 되었던 것이다(행 18:26-28). 아볼로는 초대교회의 성경교사였으며 지도자였다. 훗날 바울은 아볼로에게 고린도교회를 다시 방문해 달라고 권유하기도 한다(고전 16:12).
참고로 마틴 루터는 아볼로가 히브리서의 기자일 것으로 추측하기도 하였다. 바울은 성경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3:6).
즉 하나님께서 자라나도록 역사하시지만, 인간 교사의 노력과 가르침을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인간 교사의 노력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함께 동참되는 동역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아볼로나 자신의 노력이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아볼로와 자신이 모두 하나님의 동역자임을 말하였다(고전 3:9). 아볼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성경의 가르침을 자세히 배운 후에야 그도 역시 성경 교사가 되었던 것이다(행 18:24-28).
안디옥에서는 스데반의 순교때문에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복음이 전파되어 교회가 세워졌는데, 바나바와 바울이 일년간을 그 교회에 머물면서 가르쳤을 때에야 비로소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행 11:26).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 11:2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