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12’와 김성곤 목사의 ‘두날개’ 연구 | |||||||
역사와 유래 및 문제점 비교과 용어 분석 그리고 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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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와 유래
‘두날개’와 유사한 양육 프로그램으로 먼저 ‘알파코스’가 있었는데, ‘알파코스’는 예장합신(2009/94/참여금지), 예장통합(2009/94/금이빨 사건 등 엄격 배제), 기성(2009/복음적이나 가계치유는 경계)로 규정되어 있다. 그 이전에는 ‘뜨레스디아스’와 같은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한국에 전래된 경위가 이단교회를 통하여 시작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있었다. 사실 ‘뜨레스디아스’나 ‘알파운동’은 문제제기는 있었으나 이단성을 띠었다고 할 정도까지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 뒤로 정통교회에서 일부 문제점을 ‘수정한 알파운동’이나 ‘수정된 뜨레스디아스’가 있어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에 적지 않은 교회에서 성행되고 있는 ‘G12’와 ‘D12’(두날개의 전신)부터는 심각한 문제점들이 발견되었고, 몇몇 교단에서 교류금지와 참여금지로 규정한 ‘신사도운동’을 접목시킨 증거들과 신학적인 이단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현재 ‘G12’는 예장합동(2008)에서 이단성이 있다고 공식 규정되어 있으며, 또한 ‘빈야드운동’은 예장통합(1995/81/도입금지), 예장고신(1996/46/참여금지, 2007/57/빈야드성 유사운동 집회 참여금지), 예장합동(1997/82/참여자, 동조자는 징계), 기성(1998/53/사이비 성있음)에서 규정하였고, ‘신사도운동’은 예장고신(2007/57/지극히 불건전한 사상, 관련 저술탐독 금지, 강사초빙 금지, 집회 참여금지), 예장합신(2009/94/이단성, 참여금지), 미주한인장로교연합(2012/교류금지)에서 규정하였으며, 극단적 신비주의(직통계시, 예언, 환상, 넘어짐, 금가루 현상, 금이빨 사건, 입신 등)는 예장통합(2012/97/참여금지)에서 규정하였다.
(1) G12와 D12 G12의 창시자는 ‘세자르 카스텔라노스’(콜롬비아 ICM, 국제카리스마미션 교회)로 알려져 있으며, 그는 예수님이 12 제자를 삼은 것을 기본 원리로 시작하였으며, 이 선교운동 이후에 교인들이 많이 늘어났지만, 속칭 뒷문으로 빠져나간 교인들의 숫자가 많은 것에 대해서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그 후에 그는 1985년 한국의 조용기 목사의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방문하여 순복음교회의 셀 조직을 롤모델로 사용하면서 성공을 하였다고 주장하는데, 본인이 스스로 밝히는 G12의 동기에 대해서는 1983년 “너의 교회는 하늘의 별들만큼 바닷가의 모래만큼 커져서 사람 수를 셀 수 없게 될 것이다.”이라는 예언적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또한 그의 부인도 영의 말씀을 받았다고 하는데 “12개의 돌이 있었는데, 그는 주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라고 증언한다. 즉 세자르 카스텔라노스의 G12는 신비주의적인 직통계시와 예언을 근거로 시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견해로는 카스텔라노스가 알파운동과 순복음교회의 셀 조직을 변형시킨 것이며, 그것에 신사도운동적인 성향을 접목시킨 것이라고 본다.
부산 풍성한교회의 김성곤 목사는 자신의 두날개(D12)가 G12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고 부인하였는데, 그 이유로는 G12가 2002년에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D12는 1994년에 시작되었으므로 시간적으로 두날개가 먼저라고 주장한다. 김성곤 목사는 미주 아멘넷과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김성곤 목사는 G12가 2002년에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되었다고 주장하는데, 로렌스콩의 <신사도적 셀교회>(국제 Cell Korea 한국대표본부)라는 책이 한국어로 발간한 때가 2000년이었다. 그 책 43쪽을 보면 ‘독수리처럼 날아오르다’라는 소제목이 있는데, 로렌스콩이 1984년 로스앤젤레스의 올림픽경기에서 독수리를 보고 힌트를 얻었다고 말하고 있다. 김성곤 목사의 주장대로라면 두날개는 로렌스콩이 원조가 되어 버린다. 또 2002년에 류영모 목사가 쓴 책에 <두날개로 비상하는 교회>(서로사랑)가 있었다. 심지어 김성곤 목사도 NCD를 통하여 책을 출간한 적도 있다.
김성곤 목사가 말하는 2002년은 김삼성이라는 사람에 의하여 G12가 한국에 도입된 시간이다. G12가 카스텔라노스에 의하여 시작된 것은 1983년이고 그 이후에 싱가폴의 로렌스콩이 1986년에 G12를 시작하였으며, 로렌스콩은 자신의 책 <신사도적셀교회> 126쪽에서 1993년 10월에 한국에서 기드온 집회를 통하여 피터와그너가 자신에게 싱가폴 영적네트워크 지도를 맡아줄 것을 요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하여 1994년에 D12를 시작하였으므로 두날개가 먼저라는 주장은 잘못된 주장이다. 더욱이 셀 이론을 제시한 랄프 네이버가 로렌스콩의 FCBC교회와 협력하게 된 것이 1990년부터 5년 동안이었으며, 랄프 네이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피터 와그너의 제3의 물결은 곧 빈야드운동을 말한다. 랄프 네이버는 스스로 셀교회가 빈야드운동과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복음주의자들이 제3의 물결의 기사와 표적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하고 있다. 로렌스콩은 자신의 책 <신사도적셀교회> 157쪽에서 자신의 신앙공동체침례교회(FCBC)가 성공적인 셀교회로 전환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로 1991년 존윔버와의 집회를 말하고 있다. 그 책 157-160쪽에는 쓰러짐, 거룩한 웃음, 성령의 기름부으심, 귀신축사, 성령춤, 바닥에 구르는 현상이 등장한다. 김성곤 목사는 자신의 풍성한교회가 NCD에서 평가지수 90점을 맞았다고 자랑을 하는데, NCD의 랄프 네이버는 <신사도적셀교회>라는 책 65쪽에서 피터 와그너가 강신술의 위력에 대해서 평가한 주장을 인용하며, “우리가 지옥의 문을 공략할 때 반드시 필요한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 전통주의 교회는 그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막상 셀그룹이 사탄의 영역을 침범하면 악의 세력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라고 이원론적인 주장을 말한다. 그들이 말하는 영적전쟁은 성경에서 말하지 않는 이원론이며 세상을 하나님과 사탄의 대결구도, 선과 악의 싸움, 영과 육의 싸움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또 랄프 네이버는 자신의 책에서 셀교회를 전통적인 교회에 비교하여 새 부대의 새 포도주로 비유함으로써, 자신들을 새 부대와 새 포도주라고 비유하는 신사도운동과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피터와그너의 열두사도 중에 하나인 로렌스콩의 책에도 나타나며, 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한국교회에서 G12는 이미 1990년대부터 로렌스콩과 랄프 네이버의 영향을 받아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한국교회 목사들이 싱가폴 로렌스콩을 방문하여 G12를 배워 왔다고 전해지며, 그 와중에 D12(두날개)가 G12를 모방하여 나타났다고 보여진다. 그 이유로는 D12에서 양육을 표시하는 다이아몬드 구조가 G12와 동일하고, 그 커리큘럼과 용어가 비슷하며, 주말 수양회에서 신사도운동을 접목시킨 것도 유사하다고 본다. 특히 G12가 사용하는 특이한 용어들을 두날개도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다. <두날개를 말하다>라는 책에서, 저자 소개를 보면 김성곤 목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 삼는 비젼에 생명을 던진 사람이다. 1994년 5월, 불타는 제자비젼으로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교회로 평가받았다. 2003년 두날개선교센터를 설립하여 매년 컴퍼런스와 두날개로 날아오르는 건강한 교회로 세워지도록 섬기고 있다….”라고 말한다. 다시 정리를 하면 G12가 카스텔라노스에 의하여 시작된 것은 1983년이고 그 이후에는 피터와그너의 열두사도 중에 하나인 싱가폴의 로렌스콩이 1986년에 G12를 시작하였으며, 셀 이론을 처음으로 제시한 NCD의 랄프 네이버가 로렌스콩의 FCBC교회와 협력하게 된 것이 1990년부터 5년간이었다고 랄프 네이버가 직접 밝히고 있다. 즉 G12는 로렌스콩과 랄프네이버의 영향을 받아서 2002년이 아니라 훨씬 이전부터 한국교회에 알려졌는데, 특히 한국교회 목사들이 싱가폴 로렌스콩을 방문하여 G12를 배워서 도입한 것이며, 그 와중에 D12(두날개)가 G12를 모방하여 나타난 것이다. 그 당시 D12에서 양육을 표시하는 다이아몬드 구조가 G12와 유사하고, 그 커리큘럼이 비슷하며, 주말 수양회에서 신사도운동을 접목시킨 것도 유사하며 공통점과 유사점이 너무 많이 발견된다. 또 다른 루트로 미국 베다니교회의 마르쿠스 후센을 통해서 G12가 한국에 도입이 되었던 적이 있으며, 그러한 와중에 이성방 목사(제주열방교회)가 우연히 콜롬비아 보고타의 MCI교회에 가게 되었고, 세자로 카스텔라노스(FCBC)를 만날 기회가 있어서 그와 관계를 맺어 G12 동아시아 책임자인 리차드 옹 목사를 통해서 제주열방교회에서 G12를 시작하게 된다. 이 중에서 G12Korea라는 명칭을 사용했던 김삼성 선교사가 G12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자, ‘열두제자선교회’라고 이름을 바꾸게 되어 활동을 하게 된다. 자신이 세자르 카스텔라노스의 열두제자 중에 하나라고 주장하는 김삼성 목사(카자흐스탄 은혜교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시 말하면 G12의 유래가 신사도운동의 유래와 같다는 것을 스스로 언급하고 있으며, 신사도운동에 평신도 사역이 추가된 것이 곧 G12라고 설명한다. 특히 싱가폴의 로렌스콩(신앙공동체침례교회, FCBC, Faith Community Baptist Church)도 1986년 여의도순복음을 방문하고 G12를 도입하여 86-91년까지 70개의 셀, 94년까지 1200개의 셀로 증식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로렌스콩은 피터 와그너의 12 사도 중에 하나이며, 그가 주장한 셀교회의 명칭은 ‘신사도적 셀 교회’이었으며, 92년에서 97년까지 600명으로 성장했고 지금은 15,000명으로 성장했다고 주장하였다. 제주열방교회 G12도 결국 신사도운동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다
G12는 다양한 단체로 우리나라에 도입이 되었으며, 현재도 다양한 명칭으로 활동 중이고, 필자가 보기에는 두날개 역시 동일한 한 부류라고 생각된다.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는 거의 유사하거나 혹은 다른 용어로 사용하더라도 그 기본 셀조직과 신사도운동과의 연관성은 거의 대등소이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비건전한 신학과 기적과 표적을 보이는 현상적인 집회를 혼합하고 있다. 이들이 이러한 프로그램을 정당화하는 이유는 교회성장이라는 명칭으로 미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급격한 교인수의 성장은 대부분이 수평이동이며, 기적과 표적을 보이는 현상적인 집회로 인한 일시적인 급성장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만약 교인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프로그램들이 정당화된다면, 이러한 기적과 표적을 보여줌으로써 많은 교인들을 확보하고 있는 이단교회들도 정당화되어야 하지 않는가?
1999년 2월에는 캐시 루너라고 하는 자가 엔카운터 운동을 G12에 도입하였는데, 지도자의 명칭을 사도라고 불렀고, “참석자는 오순절의 예수의 제자와 같이 술 취한 영을 받았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Encounter 운동은 원래 보통 10∼15명의 참가자와 1∼2명의 촉진자(facilitator)로 구성된다. 2∼5일간의 합숙훈련을 하게 되는데, 참가자들은 이 훈련을 통해 공석상에서는 말하지 못했던 자기신념이나 감정 등을 솔직하게 표명함으로써, 자기성장이나 대인관계의 발전과 개선을 꾀한다. 미국의 심리학자 K.레빈의 인간관계를 위한 기법훈련으로서의 트레이닝 그룹(training group)과, C.R.로저스의 심리학적 성장을 위한 베이식 인카운터 그룹(basic encounter group)으로 대표되는, 여러 가지 집중적 그룹의 경험이 ‘인간성 회복 운동’으로써 1960년대에 미국 전역에 확산되었다. 현재 G12에서 행하고 있는 인카운터그룹이란 곧 이와 같은 합숙훈련과 같은 소규모적인 집회의 양육 프로그램을 의미한다. 이러한 엔카운터 운동은 G12 뿐 아니라 두날개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단지 그 명칭이 ‘수양회’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것뿐이다. 그 후에 G12가 예장합동에서 이단성이 있다고 규정되자, 이 운동은 D12로 명칭만 바뀌게 되는데, 그 프로그램도 약간의 변화가 있으며 그들 내부에서는 비록 다르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달라진 점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쉽게 말하자면 대외적으로 명칭의 변화만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즉 D12가 두날개로 다시 바꾼 것이다.
(2) G12와 두날개의 비교
○ 커리큘럼의 비교 G-12 ① Win(전도단계) ② Consolidate(양육단계) ③ Disciple(제자훈련) ④ Send(파송단계) ○ 다이아그램의 비교
또 랄프네이버는 G12로 알려진 세자르 카스텔라노스의 ICM 교회에서 행하여지는 내적치유수양회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으며, 전통주의 교회로부터의 해방, 소위 ‘혼연’이라고 불려지는 ‘Soul-tie’라는 용어와 ‘견고한 진’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이런 것들은 현재 모두 두날개에서 그대로 가르치고 있는 용어이다.
즉 알파운동이 G12로, G12가 D12로 바뀌고, D12가 두날개로 바뀐 것으로 보면 이해가 빠르게 될 것이며, 알파운동이 빈야드가 접목되었다면, G12는 신사도운동이 접목되었고, 두날개는 신사도운동뿐 아니라, 다락방과 같은 심각하고 위험한 많은 이단성이 혼합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면서 두 날개의 문제점이 외부로 쉽게 표출되지 않았던 이유는 수양회에서 있었던 현상적인 집회에 대해서 외부로 비밀을 지키라는 가르침이 있었고, 현상적인 집회에 대해서는 용어를 바꾸라고 가르쳤으며, 교회에서는 하지 말라는 내부적인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으로 본다. 특히 양육교재는 질문형식으로 기록되어 있고, 그 답변은 내부에서만 가르치게 되어 있으며, 내부적인 강의는 외부로 유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두날개의 내부 강의는 그 강의를 직접 참가하였던 교인들이 필기로 쓴 녹취록 외에는 증거가 없다. 그러나 필자는 세 명의 참가자가 쓴 녹취록의 필기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최근에는 두날개 내부에서 강의하는 강사의 자료를 획득하였으며, 그 모든 내용이 거의 동일하였다. 심지어 다른 교단에서 입수한 녹취록과 직접 두날개를 도입했단 목회자의 증언도 그 내용이 동일한 것을 발견하였다. 특히 문제점을 파악하지 못하는 유명목사들이나 교수들을 앞에 세우고 그들을 방패막이로 삼는 방법은 많은 이단들이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G12의 창시자인 세자르 카스텔라노스는 MCI 교회의 목사이다. 그의 책을 보면 그가 예수를 직접 만나거나 예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수십번을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중요한 문제도 아닌 일상적인 경우에도 직접 주님이 말씀을 하신다는 것이다. 소위 ‘하나님의 음성 듣기’이며, 다시 말하면 세자르 카스텔로노스는 직통계시를 주장하는 신비주의자로서 자신을 신령한 존재로 부각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G12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며, 예수님이 손으로 자신을 만지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손길이 만지는 곳마다 무거운 죄가 벗겨진다는 이상한 주장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거듭난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러한 거듭남은 성경에 단 한 번도 기록된 적이 없으며, 죄사함은 예수를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어떤 손길이 닿아서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자신이 예수를 직접 만나고 대화를 하며, 또 천사를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음 글은 세자르의 부인, 끌라우디아의 글이다. 두 번을 세례 받는 것도 문제지만, 자신의 세례받는 것을 마치 예수님이 세례를 받는 것과 비슷하게 표현하고 있다. 더욱이 두 번 세례를 받는 것을 예수님과 유사한 장면으로 표현하고, 그녀는 예언, 방언통역, 사람의 중심을 볼 수 있는 은사도 받았다는 것이다.
세자르 카스텔라노스가 셀 조직을 강화시킨 이유도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직접 말씀해 주셨다고 한다. 결국 예수님은 세자르에게 다른 교회로 보내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세자르의 예수님은 세자르의 교회만을 위한 분인가보다.
또 세자르는 레즈비언의 영을 가진 여인을 축사하였다고 주장하며, 이것을 영적전쟁이라고 그의 책에서 말한다. 그런데 왜 세자르는 한꺼번에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무려 6개월 동안 이 여인을 축사할 수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이 책은 세자르가 주님을 직접 만나고, 그 음성을 들었던 수십 건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결국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G12가 주님이 직접 알려준 것이라는 것이며, G12를 반대하는 것은 곧 주님을 반대하는 결과가 될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자르와 그의 부인에게 나타난 주님은 이단들이 주장하는 직통계시와 다름이 없으며, 비성경적이다.
‘두날개’라는 의미는 건전한 신학과 건전한 성령의 역사의 양면을 뜻한다고 한다. 두 날개에서 가르치던 실제 내용을 녹취한 내용이 부산 풍성한교회의 서로 다른 몇 사람으로부터 제보 받았는데, 그 내용으로 보면 두 날개는 알파나 G12보다 더 심각한 신학적인 문제점이 있음이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운동이 우리나라에서 수천교회를 통하여 양육교재로 활용되고 있었을까? 알파코스의 문제점은 성령에 대한 양태론적인 표현, 가계저주론 그리고 교회마다 다르지만 주말수양회에서 행하여지는 빈야드운동의 현상적인 집회였다. 그러나 두날개는 알파코스와 같이 단순한 양태론으로 설명한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자체를 공동체로 표현하고 있고, 예수가 십자가에서 부활한 후에 비로소 삼위일체 공동체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이상한 주장까지 하고 있다. 예수가 성육신하고 있었을 때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었는가? 또한 삼위일체는 어떤 공동체를 뜻하는 개념이 아니다. 두 날개의 녹취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주님의 십자가의 가장 큰 고통은 죄로 인한 공동체의 관계에서 분리되는 것이었음. 그래서 십자가로 인해(죽음) 그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는 것임.”이라는 내용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내용이다. 예수께서 죄로 인하여 삼위일체라는 공동체에서 분리되었는가? 그리고 죽음으로 삼위일체라는 공동체로 들어갔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또 두날개는 가계저주론과 죄 유전론을 가르치고 있다. 2013년 가계저주론을 도입하여 가르쳤던 이윤호 목사는 그동안 잘못 가르친 것에 대해서 모두 회개하고 수정을 하겠다고 발표하였는데, 두날개는 가계저주론을 가르치고 있다. 두날개는 자신들이 예수를 믿으면 가계의 저주가 끊어진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가계저주론과 다르다고 변명을 하지만, 가계저주론이 ‘끊어지는가’ 혹은 ‘안 끊어지는가’라는 문제가 중요한 본질이 아니라, 가계저주론을 가르친다는 자체가 문제이며, 가계저주론자들이 가르치는 성경구절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더 중요한 본질적인 문제는 두날개에서 이런 가르침을 받음으로써 가계저주를 끊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두날개를 도입하지 않은 교회는 가계저주가 계속 미치고 있는 것이 되지 않는가?(가계저주론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구체적으로 다루어 보자.)
심지어는 다락방의 문제가 되었던 용어들을 약간 바꾸어 그대로 적용하고 있는데, 두날개는 다락방의 양육프로그램 내용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기도응답권, 사단결박권, 천사동원권 등은 다락방의 독특한 교리로서 많은 비판을 받았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두날개에서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다락방의 문제 있는 교리를 용어만을 약간 바꾼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인간론에서도 매우 문제점이 나타나는데, 단순한 삼분법이라면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영과 혼과 육을 각각 분리하는 이상한 삼분법을 가르치며, 은사는 영을 뚫고 혼과 육이 나오는 것이며, 영접기도는 하나님의 영이 육과 혼을 뚫고 들어가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매우 이상한 논리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주장은 손기철 장로의 주장에도 나타난다. 인간은 살아있을 때에 영과 혼과 육, 또는 영혼과 육이 연합된 전인적이며 총체적인 존재로서 사람이 죽을 때에만 비로소 분리된다.
특히 방언과 같은 은사를 강조하면서 설명하는 것을 보면 지나친 은사남용주의에 치우치고 있다. 현상적인 집회가 표현하는 쓰러짐, 진동, 입신, 웃음, 짐승소리, 투시 등을 자연스러운 성령운동으로 언급하며, 특정한 이단들을 지지하는 듯한 내용까지도 발견되며, 은사남용 특히 방언을 정통신학과 다른 방향으로 장려하고 있으며, 신사도운동의 인카운터와 임파테이션등을 가르치며, 이러한 현상적인 운동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수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명칭을 바꾸어 사용하라고 가르치거나, 셀에서는 이러한 신사도운동적인 현상집회를 마음대로 하되 교회에서는 하지 말라고 은폐하고 있다. 더욱이 올바르고 건전한 신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학적인 지식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며 신학과 편견을 버리라고 가르치고 있다. 김성곤 목사는 두날개라는 의미가 건전한 신학과 건전한 영성운동의 두가지를 뜻한다고 말하였는데, 신학적인 지식을 비판하며 버리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과 함께 고의적이며 인위적인 은사남용주의를 권장하고 있다는 점이 그 이중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위의 녹취록을 보면 제3의 물결(빈야드)에 대해서 자연스러운 성령의 역사라고 가르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이단들의 현상적인 집회가 부정적으로 매도되었다고 가르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러한 현상을 기름부음이라고 말한다. 더욱이 성경적인 단어로 바꾸어서 사용하라고 권장하고 있다.
더욱이 셀에서는 마음놓고 하되, 교회 안에서는 하지 말고 교회 사정에 따라서 하라고 가르친다. 만약 이것이 정당하고 건전한 성령운동이라면 왜 이렇게 용어를 바꾸라고 말하며, 또 교회에서는 사용하지 말라고 금지를 권장하고 있을까?
특히 두날개는 신사도운동이 주장하는 이원론적인 문제, 귀신론 등과 신사도운동의 피터와그너나 신디제이콥스 등이 주장하는 용어도 그대로 가르치고 있었다.
두날개의 양육교재를 보면, 소위 불건전한 ‘내적치유’ 혹은 ‘영성훈련’을 하는 단체들과 신사도운동에서 사용하는 ‘쓴 뿌리’와 ‘견고한 진’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다. 특히 다락방에서 사용하는 가계저주론과 조상죄 유전론을 두날개에서는 여과없이 도입을 하였다. 두날개의 전인적 치유수양회 책에 나오는 김성곤 목사의 서문을 살펴보자. 그는 마치 두날개의 전인적치유수양회에 참가하여야만 쓴뿌리와 견고한 진의 치유와 회복이 가능하며 다시 거듭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과연 이들이 사용하는 이 용어들이 과연 성경적인 내용인지 살펴보자.
(1) 쓴 뿌리 많은 단체에서 사용하는 ‘쓴 뿌리’에 대한 주장은 비성경적인 오역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러한 용어를 자주 사용하는 단체들은 ‘쓴 뿌리’라는 용어에 대해서, 마치 인간의 내면에 어떤 악의 뿌리 혹은 죄의 근본과 같은 잠재의식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내적치유 단체에서 주로 사용하는 ‘쓴 뿌리’라는 개념은 과거의 상처나 원한이 치유되지 않고 남아 있어서 현재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양육프로그램을 가르치는 두날개와 G12 등은 종이에 과거의 상처나 약점, 질병을 모두 기록하여 그것을 불에 태움으로써 쓴 뿌리를 치유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심지어 어느 단체는 “우리를 묶고 있는 쓴 뿌리가 모두 뽑히라.”는 대적기도와 선포기도를 하므로써 귀신이 묶고 있는 우리의 영혼이 자유롭게 되어 치유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두날개에서는 이것을 Soul-Tie(혼연)라고 부른다. 우리는 성경을 인용하되, 성경과 일치한 올바른 해석을 적용하여야만 그것을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이단들과 심지어 사이비집단들조차 성경을 인용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쓴 뿌리’라는 용어는 그러한 의미가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쓴 뿌리’는 어느 개인의 과거의 상처, 혹은 악의 뿌리나 죄의 근본을 뜻하는 의미가 아니라, 공동체에서 나타날 수 있는 우상숭배자 또는 배교자를 말한다. 다른 번역성경을 보면 그 의미를 이해하기 쉽다.
히브리서 본문은 구약의 신명기를 인용한 것이며, 신명기 본문도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나타날 수 있는 배교자, 또는 우상숭배자를 독초와 쑥의 뿌리로 비유한 것이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서로를 살피는 과정에서 주의하여야만 하는 몇가지의 문제점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인데, 성경은 계속되는 세가지의 경우를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로 적용한다. 첫째, ‘쓴 뿌리’는 쓰고 독이 있는 열매를 내는 것으로서, 신명기에서는 우상 숭배와 연관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인용을 통해서 완고한 기질로 인해서 생겨나는 불신앙과 배교가 수신자들의 공동체에 팽배해지지 않도록 조심할 것을 경고한다. ‘쓴 뿌리’에 ‘쓴’은 ‘피크리아’로써 bitterness로 번역된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 4번 기록되었는데, 히브리서 본문과 행 8:23, 롬 3:14, 엡 4:31에서 사용되었으며 모두 ‘악독’으로 번역되었다. 쓴 뿌리는 먹을 수 없는 독초를 의미하며 특히 ‘뿌리’는 ‘퍼진다, 증식된다’는 뜻과 ‘싹, 눈이 나온다’는 뜻을 의미하기도 한다. 둘째, 음행하는 자와 셋째, 망령된 자를 말한다.
혹간은 음행을 영적,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둘째와 셋째를 한 가지 문제점으로 포함시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어째든 히브리서 저자는 본문에서 창 25:29-34의 ‘에서’의 경우를 인용함으로써 공동체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림으로ㅆ 하늘이 주신 복을 세속적인 것으로 바꾼 행위를 ‘망령된 것’이라고 언급한 것이다. 정리하자면, 히브리서 본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경우로써, 공동체에서 나타날 수 있는 우상숭배와 배교, 음행, 망령된 것의 경우를 서로 서로 살피라고 경고하는 내용이다. 다시 말하면, ‘쓴 뿌리’는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과거의 상처, 악의 뿌리나 죄의 근원과 같은 뜻을 의미하지 않으며, 성경에서는 공동체에서 나타나는 배교자 혹은 우상숭배를 하는 사람들을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단어를 인용하여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2) 견고한 진을 파하라 ‘견고한 진’이라는 용어를 최근에 소위 내적치유, 영성운동을 하는 단체에서 사용하고 있는데, 이들이 사용하는 ‘견고한 진’이라는 용어는 성경에서 이들이 사용하는 의미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랄프 네이버도 이러한 용어를 영적전쟁의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G12의 인카운터 소그룹을 포함하며, 최근에 유명한 선교단체들과 많은 교회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양육프로그램의 과정에서 종이에 죄, 약점, 질병, 과거의 상처 등을 종이에 적어 불에 태우며 죄가 없어졌다고 하는 의식을 하고 있다. 특히 두날개 프로그램에서는 그러한 의식을 ‘견고한 진을 파한다.’라고 칭하는데, 당사자가 종이에 죄를 적어 태울 때에 옆에서 참가자들이 “견고한 진을 파하라.”라는 구호를 세 번 외친다고 한다. 언제부터 기독교가 죄에 대한 회개를 이러한 무속적인 의식을 통하여 하였는지 참으로 개탄스럽다. ‘회개’(메타노에오)란 ‘방향수정’을 뜻하는 단어이며 불신으로부터 믿음, 죄로부터 돌이키는 내면적인 전향을 의미하며, 죄를 종이에 적어 불에 태운다고 죄가 없어지지 않으며, 회개는 이런 어떤 의식을 뜻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종이에 적지 않은 죄는 없어지지 않는가? 그 이후에 다시 짓는 죄는 하나도 빠트림이 없이 종이에 적어 두었다가 다시 태우는가? 이러한 형식적이며 상징적인 행위보다 보다 진정한 회개의 방법을 가르쳐야만 하지 않는가?
인카운터라고 하는 양육프로그램의 주말수양회에서는 쓰러짐과 넘어짐, 진동, 입신, 임파테이션 등과 같은 신사도운동의 현상적 집회를 도입하면서 그것을 용어를 바꾸어서 사용하도록 하거나, 외부에는 절대 비밀로 하라고 가르친다는 제보까지 들어오고 있다. 최근에 자주 등장하는 ‘견고한 진을 파하라’는 용어는 피터와그너의 신사도운동 연맹의 자칭 사도로서, 소위 예언자이며 중보자라고 하는 신디 제이콥스의 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주장에는 영적도해와 귀신축사와 같은 사상이 포함되어 있다. 이 성경구절은 고후 10:4을 인용한 것인데, 이 성경구절은 결코 그러한 뜻이 아니다.
본문을 잘 읽어보면 “우리가 견고한 진을 파하여야 한다.”는 우리의 행동방침이나 강령을 뜻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견고한 진’이란 사탄의 진도 아니며, 소위 죄의 통로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우리의 과거 죄악이나 약점이나 상처를 뜻하지 않는다. 본문은 우리가 비록 육체를 가졌으나 인간적인 소욕을 따르지 말고 성령의 인도를 따른다면 그 성령의 무기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견고한 성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의미로서,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견고한 진을 파하여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따르면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견고한 진이라도 무너지게 된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견고한 진’이라는 것은 죄의 근원이나 과거의 상처를 뜻하는 고유명사 또는 상징적인 표현이 아니라, 어떤 성이나 요새라고 하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결국 무너진다는 형용사적인 의미의 단어일 뿐이다. 고후 10:3-4에 대해서 다른 번역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견고한 진’은 헬라어 ‘오퀴로마’가 사용되었는데 ‘견고하다’는 별도의 뜻을 가진 단어는 원문에는 없으며, 그 의미는 원래 ‘성, 요새’라는 뜻이다. 즉 ‘성, 요새’라는 단어가 비유로 사용된 것이며, 즉 성령의 무기를 가지면 ‘성과 요새와 같은 아무리 견고한 것들도 무너뜨릴 수 있다.’는 비유적인 내용이다. 이것을 육체를 가진 우리가 인간적인 방법이나 행위로서 견고한 진을 파하여야만 한다고 해석을 하는 것은 성경본문과 정반대적인 해석이 된다.
‘견고한 진’이 구체적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무엇이라고 지칭하는 자체가 매우 이상한 해석이다. 예를 들자면 마17:20에서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라는 성경구절에서 아주 작은 것으로 비유된 ‘겨자씨’를 인간의 몸 안에 실제로 있는 어떤 고유명사적인 개념으로 해석하여 “우리가 겨자씨를 갖어야만 한다.”는 주장과 무엇이 다른가? 더욱이 ‘견고한 진’은 종이에 죄를 적어 불태우면 죄가 없어진다는 무속적인 행위나 대적기도, 선포기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내용이다. 이러한 외적 행위들은 성령하나님의 강한 무기도 아니며, 영적인 것이나 내면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생각을 종이 위에 쓴 육적이며 의식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양육프로그램과 적지 않은 선교단체들이 교류금지와 이단성으로 발표된 가계저주론을 가르친다는 제보가 들어오고 있으며 녹취록에도 어김없이 가계저주론이 나타난다. 그런 저주가 어느 인위적인 프로그램의 대적기도와 선포기도로 없어진다는 주장은 어떤 성경적 근거를 갖고 있는가? 최근에 널리 행하여지는 양육프로그램들은 현상적인 것을 보여줌으로서 교인들을 수적으로 불러모으는 것이 첫째 목적이기 때문에, 비신학적이며 비성경적인 내용들을 문제 삼지 않고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사전에 검증을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3) 기름부음
기름부으심은 성령의 내주(중생, 거듭남)를 뜻하는 용어이다. 신사도운동에서는 기름부음을 ‘하나님의 임재’라고 가르치는데, 두날개에서도 동일한 주장을 가르치고 있다. 더 놀라운 것은 거듭남(중생)과 기름부으심을 각각 다른 사건으로 본다.
(4) 번영신학, 기복신앙 신사도운동의 소위 부의 이동, 가난의 영을 끊는다는 가르침과 같으며, 예수를 믿으면 가난에서 벗어난다는 노골적인 기복신앙, 소위 번영신앙을 가르치고 있다.
(5) 정통신학의 비난과 부정 신학 때문에 성령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라고 가르침으로써, 성도들에게 신학을 거부하게 하거나 비난하도록 하고 있다. 과연 이러한 주장이 건전한 신학을 한 날개로 본다는 주장일까? 그러한 주장은 곧 두날개가 정통신학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6) 가계저주론 가계저주론을 우리나라에 도입하였던 모 목사는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신문에 자기사상의 문제점을 올리고 회개하였다. 그러나 두날개는 가계저주론을 도입하여 가르치고 있는데, 이것은 다락방을 모방한 것으로 추측된다. 두날개의 ‘전인적치유수양회’ 교재를 보면 잠언 26:2을 인용하면서 가계저주론을 가르치고 있다. ① 잠언 26:2 “까닭 없는 저주는 이르지 아니하느니라”. 잘못된 주장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짜맞추기식의 성경해석은 언제나 오류를 초래하며, 그러한 수법은 이단들이 주로 사용하는 수법이기도 하다. 성경의 본문 전체를 잘 살펴보자
가계저주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본문을 인용하여 모든 저주는 이유가 있다는 식으로 해석을 하며, 조상의 죄를 정당화시키려고 해석을 한다. 그러나 본문은 아무리 읽어도 가계저주론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까닭 없는 저주는 이르지 아니하느니라.”는 말은 내가 받는 저주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뜻이 아니며, 더욱이 조상의 죄 때문에 저주가 일어났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 성경본문의 뜻은 “나에게 저주가 이르렀을 때에 그 저주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수동형의 뜻이 아니며, 본문은 “아무 이유없이 상대방을 저주하면 안된다.”는 능동형의 뜻을 말하고 있다. 예를 들면 내가 어떤 사람을 아무 이유없이 개인적인 감정으로 미워하고 증오하여 저주를 한다고 하여도 그 저주는 그 상대방에게 아무 효과도 미치지 않는다는 뜻으로서, 이유없이 저주를 하지 말라는 의미인 것이다.
잠언 26:2은 가정에 닥친 저주나 조상의 죄 때문에 내가 받는 저주의 근거를 제시하는 구절이 전혀 아니며, 반대적인 의미로서 남을 이유없이 저주하지 말라는 뜻이다. 즉 정당한 이유와 근거도 없이 상대방을 저주하여도, 그러한 저주는 상대방에게 미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잠언 26:2은 가계저주론을 지지하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가계저주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반격할 수 있는 성경구절이 된다는 것을 알자. 본문은 아무에게나 조상의 저주가 미친다고 하는 가계저주론 주장자들과 같이, 정당한 이유없는 조상의 죄에 의한 가계저주는 다른 사람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➁ 출애굽기 20:4-6
성경에서는 수많은 부분에서 죄에 대한 책임이나 의를 행한 공로는 항상 그것을 행한 당사자 개인이 적용된다. 그러면, 출애굽기 20:4, 5에서 말하는 아비의 죄를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한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성경본문은 하나님께서 가장 혐오하시는 십계명의 ‘우상숭배와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가계저주론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에게 묻자. 성경적인 예를 들어 열왕기하를 보면, 하나님이 15년 동안이나 수명을 연장하여 준 히스기야왕은 여호와에게 순종한 선왕이었으나(왕하20:6), 그 1대의 아들 므낫세는 우상을 숭배한 사악한 왕이었다. 또 2대 후손인 므낫세의 아들 아몬도 악을 행하였으나(왕하21:20), 그 3대인 아들 요시야는 여호와께 순종하는 왕이었다(왕하22:2). 과연 저주의 3-4대와 은혜의 천대를 문자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가? 여호와 하나님에게 순종한 히스기야왕의 후손은 왜 1대와 2대에서 여호와를 거절하는 사악한 왕들이 나타났는가? 왜 히스기야의 후손은 천대까지 은혜를 받지 못하였는가? 그리고 므낫세는 왜 3-4대까지 저주를 받지 않았으며, 므낫세 2대의 요시야는 여호와께 순종하여 칭찬을 받는 왕이 나타났는가? 혹시 가계저주론자들은 므낫세와 요시야를 포함하여 히스기야 때문에 그 천대의 후손들이 모두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것인가? 과연 조상의 죄가 유전되어질까? 출애굽기20장 4-6절의 본문에서 우상숭배를 하는 자들의 경우 3-4대까지 죄를 묻고,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천대까지 은혜를 베푼다는 구절은 과장법과 강조법적인 표현으로 해석되어져야만 한다. 즉 후손들에게 죄를 묻지 않는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를 하는 자들의 경우는 3-4대까지 죄를 묻겠다는 표현을 함으로서,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아주 싫어하신다는 강조법적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바로 함께 나타나는 평행구절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천대까지 은혜를 베푼다는 것은, 하나님은 자신에게 순종하는 백성을 아주 기뻐하신다는 것을 강조법으로 적용한다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➂ 가계저주론과 반대가 되는 성경구절 가계저주론과 정 반대가 되는 성경구절은 성경에 매우 많으며 다음과 같다.
성경은 아비의 죄가 아니라 당사자의 죄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틀렸다고 말할 것인가? 하나님은 당사자의 행위와 행실로 보응을 하신다.
또한 신약성경에서도 예수님이 직접 죄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과연 성경본문이 저주는 가계를 따라 흐른다는 뜻인가? 혹은 죄가 조상때문이라고 해석하여야 하는가? 유대인들은 질병을 자신의 죄나 조상의 죄때문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예수님은 소경은 부모의 죄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예수님은 사고나 재앙을 당하는 것도 특별히 죄가 많아서 당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요점은 죄가 원인이 아니라 회개치 않는 것이 원인이며, 회개하지 않으면 종말적으로 모두 망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이러한 가계저주론, 영적전쟁과 같은 가르침은 이원론을 가르치는 불건전한 신학이 된다. 마치 인간의 저주나 불행, 사고나 가난, 질병 등은 모두 사탄 때문으로 간주하여, 이 세상을 하나님과 사탄의 대결구도로 보고, 사탄을 대적하고 쫓아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으로 보는 이원론이 되고 만다. 이러한 주장은 그동안 다락방과 베뢰아에서 가르치던 주장이었다. 두날개는 처음에 D12라는 명칭으로 랄프 네이버의 셀교회 이론을 도입하였는데, 랄프 네이버는 피터와그너의 열두사도 중에 하나인 로렌스콩과 함께 1990년부터 5년간 싱가폴 FCBC교회에서 함께 사역을 한 사람으로서, 두날개에서 그러한 양육프로그램을 만드는 과정에서 신사도운동과 빈야드운동의 용어와 은사남용주의를 도입하였으며, 빈야드운동과 신사도운동의 현상적인 집회를 접목하였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그것을 교회 안에서는 숨기고 위장함으로써 외부적으로 보이지 않게 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고 보여진다. 또한 신학적으로도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는데, 가계저주론과 이상한 공동체의 개념으로써의 삼위일체, 그리고 인간론에서도 매우 이상한 삼분법을 적용하고 있었으며, 이것은 다락방교재와 손기철 장로를 모방한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두날개에서 사용하는 일부 용어들은 소위 불건전한 내적치유단체와 영성운동단체에서 사용하고 있는 비성경적인 해석을 근거로 하는 잘못된 용어들이 매우 많은데, 두날개는 여러 곳에서 문제가 있는 용어와 사상을 여과없이 모방하였기 때문이다. 두날개는 건전한 신학과 건전한 성령운동을 슬로건으로 시작하였다고 하였으나, 스스로 정통신학을 비판하고 부정하는 가르침이 나타나고 있으므로 더 이상 건전한 신학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이단들의 사상을 일부 도입하였고, 또 성경적인 양육프로그램도 아니며, 빈야드운동과 신사도운동을 접목함으로서 건전한 성령의 역사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리고 전도를 하지 못하는 셀을 암세포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함으로써, 올바른 복음을 전하는 사명감을 잊어버린 채, 마치 교회가 어떠한 방법이든지 다만 수적인 전도만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 이 때문에 적지 않은 교인들이 상처를 입은 채 다른 교회로 옮기는 일이 허다하며, 교회가 분열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목회자를 중심으로 하는 피라밋식의 군사 조직을 인위적으로 강요하는 프로그램도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특별히 상당히 많은 교회에서 두날개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풍성한교회는 그동안 잘못 가르친 것을 대외적으로나 또는 교회에서 모두 인정하고 그동안의 과정을 재교육시켜야만 할 것이며, 이러한 문제점들을 한국교회에 공식사과하고 모든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끝까지 개편하여야만 할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잘못된 프로그램을 방치하고 덮으려고만 했던 김성곤 목사를 비롯한 교계의 유명한 목사들과 교수들을 중심으로 한 지도위원과 자문위원들은 모두 책임을 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최근에는 교재를 바꾸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러나 교재를 외부적으로 수정하고 고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잘못 가르친 것을 솔직하게 모두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발표하고, 과거 잘못 가르친 교사나 리더들에게 다시 재교육을 시켜야만 할 것이며, 이러한 재교육과 재편성을 위하여 교계의 유명목사나 신학자들이 이름만 빌려주는 방법이 아니라, 실제 책임을 갖고 참여하는 양육프로그램으로 바꾸어져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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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녹취자료 폭로됐네요.
참고하세요..
"현대종교 탁명환의 비열한 이단만들기 수법"
http://www.ecumenicalpress.co.kr/n_news/news/view.html?page_code=&area_code=&no=15553&code=&s_code=&ds_code=
(녹취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yXaU7n5Gm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