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식 목사의 구속사 시리즈에 대한 분석과 비판

한창덕 목사 / 전 전주시기독교연합회 이단대책위원장, 예장 개혁





박윤식 씨는 2007년도부터 ‘구속사 시리즈’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2007년 제1권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 속에서 본 창세기의 족보>, 2008년 제2권 <횃불언약과 그 성취, 잊어버렸던 만남>, 2009년 제3권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영원히 꺼지지 않는 언약의 등불>, 제4권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영원한 언약 속의 신비롭고 오묘한 섭리>, 2010년 제5권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속에 담긴 영원한 언약의 약속>을 냈다.

위 저서들은 박 씨 스스로 “제 인생의 석양이 기울기 전에 저의 신앙고백이자 신학사상의 결정체인 책을 펴낼 수 있게 되어 감사할 뿐”이라고 밝힌 책들이다.

이 서적들에 대해 한창덕 목사가 비판한 내용을 축약해서 게재한다. <편집자 주>



박윤식 목사는 1991년 통합 측에서 이단으로, 1996년에는 합동 측 총회에서 이단으로, 2005년에는 합동 측에서 다시 한 번 더 이단으로 확인됐다.

그러므로 그는 여전히 공식적으로 분명히 이단자이다.


박윤식 목사의 최근 동향

박윤식 목사는 최근에 다섯 권의 책을 출판했다.

그는 그 책의 출판 배경을 보여주는 동영상에서 1960년대 초에 지리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깨달은 것을 기록한 것이라 하며, 지금까지 가르쳐온 것이라 했다.

그러므로 그 의도는 분명하다.

과거로부터 자기가 가르쳐 온 모든 것들이 여기에 다 들어있으니 ‘이것을 보고 판단해라’ 혹은 ‘이래도 내가 이단이냐?’라는 암시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책들을 서평 하거나 추천한 분들의 면면을 보면 그저 놀랍기만 하다.


강정진, 강택현, 김남식, 김호환, 나채운, 도한호, 민경배, 손석태, 성기호, 예영수, 원용국, 이일호, 이학재, 임승안, 임태득, 장광영, 조영엽, 주재용, 차영배, 홍경표, 황의춘 박사 등 한국 교회를 대표한다고까지는 할 수 없을지 몰라도 거의 거기에 버금갈 만한 인물들이 바로 이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서평하거나 추천한 내용을 보면 어안이 벙벙하다.


“저는 이 책이 성서신학(聖書神學), 특히 창세기 곧 구약성서에 관한 것이라 역사신학자(歷史神學者)로서는 어떤 형태로든지 평(評)한다는 것이 주제넘는 일이라 하여서, 전에 결례(缺禮)를 하면서까지 평하기를 고사(固辭)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놀란 것은 이 저서가 실제로는 역사신학의 대헌장(大憲章)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 성서 주석의 묘미와 통찰의 깊이는 그것이 실상은 역사적 해석의 손길 때문에 의연(毅然)히 빛을 내고 있습니다. 제가 역사학자라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 역사의 역사학(歷史學)에 대한 연구의 전제와 그 방법론 그리고 역사 서술(敍述)에 대한 예리한 판별력과 그 틀(구도-構圖)이 여기 남모르게 명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 연구의 새 계시입니다. 향후 역사 연구의 새 지표입니다”(<창세기의 족보>, 민경배 교수의 서평 중에서).


민경배 교수는 신학자인 자기도 감히 평하기가 주제넘다 할 정도로 그 책은 엄청난 것이기 때문에 역사신학의 대헌장이라 할 만하며, 역사 연구의 새 계시이고, 향후 역사 연구의 새 지표라 하며 극찬하고 있다.

이것은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그들의 서평과 추천들은 이제 누구도 감히 다시는 박윤식 목사에게 이단 시비를 벌이지 못하게 하도록 그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과 같다.


결국 박윤식 목사의 책들은 그의 이단 시비에 대해 종지부를 찍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 책들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그들이 그렇게 극찬하고 있는 것과 같이 찬사를 받을 만한 책일까?

그분들은 정말 하나님 앞에서 양심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박윤식 목사의 구속사 시리즈


박윤식 목사의 이름으로 최근에 출판된 책은 모두 다섯 권이다.

첫 번째 책은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 속에서 본 창세기의 족보>이고,

두 번째가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 속에서 본 횃불 언약과 그 성취, 잊어버렸던 만남>이며,

세 번째는 <하나님이 구속사적 경륜으로 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영원히 꺼지지 않는 언약의 등불>,

네 번째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으로 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영원한 언약 속의 신비롭고 오묘한 섭리>,

다섯 번째가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속에 담긴, 영원한 언약의 약속> 등이다.

그러므로 이 책들은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 속에서 본’이라는 말이나 혹은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으로 본’이라는 말이 대부분 들어 있기 때문에 모두 다 구속사적 입장에서 써놓은 책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실제적으로 그 책들은 구속사 시리즈 1, 2, 3, 4, 5. 이런 식으로 되어 있어서 이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사실 성경을 구속사적 입장에서 본다는 것은 옳은 방향이다.

그러나 박 목사의 책들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그 책들이 비록 하나님의 언약이나 은혜, 전적타락, 구속사, 구속사적 경륜, 그리스도의 예표라는 단어 등 구속사와 관련된 표현들을 많이 썼을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분량을 할애해 놓았기 때문에 구속사적인 입장에서 써놓은 책이라 생각하기 쉽다.

더구나 유명한 신학교의 전 현직 총장들과 다수의 교수들이 그와 같이 평하거나 추천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전체적인 내용과 방향에 있어서는 구속사와 관계가 먼 책이다.


박윤식 목사는 아직 이단에서 해제되지 않았다.

이것은 그분이 아직 공식적으로 이단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정통교회에 속한 목회자라면 당연히 그분을 향하여 고무, 찬양해서는 안 된다.

진리를 사수하고 계승하도록 해야 할 사명이 있는 신학교의 교수들은 더욱 더 그래야 한다.

그것은 이단자를 이롭게 하는 것이며 상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 현직을 막론하고 일부 유명한 신학대학의 총장들과 교수들은 왜, 무엇 때문에 그에게 그와 같이 극찬을 하며 추천서를 써 주게 되었을까?

더구나 전혀 구속사적이지도 않고, 성경도 왜곡하고 있어서 양서라기보다는 악서이기 때문에 옥석을 구분하여 성도들이 읽는 것에 대해 경고의 나팔을 불어주어야 할 그분들이 왜 그랬을까?


물론, 그 책들을 보면 부분적으로는 좋은 내용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거짓말만 하는 것보다 진실을 적당히 섞으면 더욱 치명적이 되는 것과 같이 그 책은 그렇게 보였다.

이것이 바로 그 책들을 읽고 느낀 필자의 생각이다.

그러면 이것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필자만 그렇게 보고 있는 것일까?


그 책들은 유명인들의 추천 때문이었는지, 내용 때문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30만권 이상이나 팔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영향력 있는 책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책들에 대해서는 누군가 분명히 옥석을 가릴 수 있는 평이나 구체적인 분석의 결과물을 내어놓는 것이 필요하리라 본다.

그래야 성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에 필자도 그동안 연구한 결과물을 내어 놓는다.

오직 주님께만 영광 돌려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1. 성경의 왜곡과 방향착오


최근 박윤식 목사의 책들은 전부 성경의 족보를 다룬 책이다.

그런데 그는 그 이유에 대해 첫 번째 책인 <창세기의 족보>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창세기는 기원에 관한 책이라 불립니다. 그 이유는 우주의 기원과 인류의 창조, 그리고 타락과 구원에 관한 ‘기원’이 창세기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창세기는 시작에 관한 책이자 동시에 성경 전체의 서론이면서 구속사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책이기도 합니다(사 46:10, 48:3). 그러므로 창세기의 핵심인 ‘족보’를 살펴보는 것은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창세기의 ‘족보’는 단순히 한 세대의 나고 죽었던 명단을 나열한 것이 아니고,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섭리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족보 속에 있는 인물들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거기 부가되어 설명된 중요한 사건들을 자세히 연구하고 살피면, 성경 전체에 흐르는 구속사적 경륜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신 32:7),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렘 6:16)고 하신 말씀에 주목하여, 역대의 연대가 기록된 창세기의 족보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그 참된 의미를 알고자 성경을 읽고 여러 책자들을 참고하면서 오랫동안 연구를 해 왔습니다.


창세기의 족보 속에는 경건한 역대 족장들의 신앙이 살아 꿈틀대고 있었고, 그들이 걸어간 믿음의 발자취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선명한 자욱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여자의 후손(창‘3:15)을 애타게 기다리면서 달려온 숨가쁜 심장의 고동 소리, 맥박 소리가 힘차게 울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창세기의 족보를 통하여 역대의 연대 속에 감추인 뜻을 깨닫고 많은 눈물을 흘리며 은혜의 감격 속에서 밤을 지새우곤 하였습니다.”


⑴ 책을 쓰게 된 이유와 목적


박윤식 목사가 책을 쓰게 된 배경을 알려주는 동영상을 보면, 그는 한 젊은 성도가 ‘예수님의 피가 어떻게 인류를 구원하느냐?’고 질문 했을 때 거기에 대해 답변하지 못한 뒤 입산을 결심하고, 1960년대 초 지리산에 들어가 목숨을 건 기도를 하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깨달아 깨달은 말씀을 칡잎에다 기록하고 그것을 다시 원고지에 옮겼는데, 그것을 책으로 내겠다고 약속한 뒤 50년이 지나서 이제야 책으로 내게 된 것이라 하고, 여기에는 ‘타락한 인간을 살리기 위해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 그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노심초사하시는 주님,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 그 언약의 맥을 이어온 그 애타는 사랑과 안타까운 심정이 여기에 녹아 있다’라고 하며, ‘한 줄 한 줄마다 목숨을 걸고 기도했던 노 목회자의 피와 땀이 배어있다’라고 한다.


이것은 그의 책 서문에 있는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보통 어떤 책이든지 서문에는 그 책을 쓰게 된 이유나 목적 등이 잘 나타나 있는데, 박윤식 목사의 책에도 그와 같은 이유와 목적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성경을 읽으면서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신 32:7),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렘 6:16)고 하신 말씀에 주목하여 창세기의 족보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족보란 단순히 한 세대의 나고 죽었던 명단이 아니라 거기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의 생애와 사상이 담겨 있는 것과 같이 성경의 족보 또한 그 속에 있는 인물들을 통하여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섭리가 담겨 있기 때문에 족보를 연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족보 속에서 경건한 역대 족장들의 살아 꿈틀대는 신앙과 그들의 발자취를 통하여 은혜를 받게 되었고, 그 은혜가 너무 커서 한국 교회에도 더 큰 은혜의 파동으로 퍼져 가기를 소원하는 마음에서 책을 쓰게 되었다 한다.

그래서 그는 모든 책 겉표지에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한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신 32:7)라는 구절을 써 두었다.

그 구절이 바로 족보를 연구하게 된 동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책이 시작부터 잘못되었음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⑵ 성경 왜곡과 조작


박윤식 목사가 쓴 모든 책들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신명기 32장 7절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는 말씀과 예레미야 6장 16절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는 말씀이다.

그는 이 말씀들에 근거해서 족보들을 연구하게 되었다 하면서 족보 속의 경건한 족장들의 신앙으로 인해 감격하고, 그 은혜의 감격을 전하기 위해 책을 썼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는 예레미야 6장 16절에 있는 말씀이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는 말씀인 것과 같이 역대의 연대, 즉 성경의 족보 속에는 경건한 족장들의 신앙이 선한 길로 제시되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완전히 왜곡한 것이다.


먼저 신명기 32장 7절부터 보자.


➀ 신명기 32장 7절

박윤식 목사는 신명기 32장 7절에 있는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라는 말씀을 제 1권을 짚을 때 자세하게 밝히겠지만 위대한 족장들의 신앙이라는 측면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아비와 어미에게 물어보면 그들이 얼마나 경건하게 살았는지, 그들이 얼마나 믿음으로 살았는지, 그들이 얼마나 위대한 인물들이었는지를 설명해 줄테니까 그것을 듣고 그들처럼 살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심각한 해석상의 오류이다.


박윤식 목사의 모든 책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그래서 그가 모든 책의 표지에 기록해 놓고 있는 신명기 32장 7절은 그가 주장하고 있는 것과 같이 ‘너희 조상들이 믿음생활 잘했으니 그들을 본받으라는 것이 아니다. 그 말씀은 오히려 그것과는 반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신명기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원이라는 그 큰 은혜를 잊어버리고 끝없이 불평하고 원망하다가 망한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다시는 그렇게 살지 말라는 뜻으로 한 설교이기 때문이다.


△ 이스라엘의 패역을 기억하라

박윤식 목사는 신명기 32장 7절을 근거로 하여 온갖 원어들을 다 동원해 가며 제1권에서, 그리고 나머지 4권까지 전체적인 책의 내용을 다해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을 본 받자’라는 식으로 썼다.

그러나 신명기 32장 7절이 그런 뜻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는 사실은 신명기를 조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사실을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할 유명한 신학자란 분들이 그런 엉터리 해석에 근거해서 쓴 책, 그것도 아직 공식적으로 이단자인 그분이 쓴 책에 대해서 그렇게 온갖 찬사를 다해가며 평하고 추천 했다는 것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이제 신명기 32장 7절이 나오기까지 신명기서의 내용을 중간 중간 살펴보자.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두렵건대 네가 그 목도한 일을 잊어버릴까 하노라 두럽건대 네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날까 하노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신 4:9).


신명기 4장 9절에서는 32장 7절에 있는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라는 말을 거꾸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아비와 어른들에게 물으라’가 아니라 반대로 부모와 어른들을 향하여 자식과 손자들, 즉 ‘후손들에게 알게 하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록의 형태는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내용은 같다.


그렇다면 신명기 32장 7절과 같은 이 내용이 박윤식 목사의 주장과 같이 자기들의 위대한 신앙의 모습을 후손들에게 가르치라는 것인가? 유감스럽게도 아니다.

이 내용은 그것과는 반대로 그들의 타락하고 불순종했던 일들을 잊어버리지 말고 전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케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늘 여호와를 거역하였으되…”(신 9:6~7).


이 내용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을 정도이다.

박윤식 목사의 책은 ‘기억하라’는 말을 믿음의 발자취를 기억하라는 뜻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성경은 그와 반대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뜻의 말씀은 모세의 설교 속에 계속된다.

그리고 그 설교들이 끝나자 하나님께서는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타락하고 부패할 것을 알려 주시고(31:16) 모세로 하여금 그것을 노래로 미리 가르치게 하신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기 직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내가 너희의 패역함과 목이 곧은 것을 아나니 오늘날 내가 생존하여 너희와 함께 하여도 너희가 여호와를 거역하였거든 하물며 내가 죽은 후의 일이랴”(신 31:27).


이 말씀은 박윤식 목사가 인용하면서 그의 모든 책의 근거로 삼고 있는 신명기 32장 7절 바로 앞에 있는 것으로 그의 주장과는 정반대의 말씀이다.

그래서 모세는 이런 말을 한 다음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장차 불신할 것에 대해 노래를 가르치게 되는데 그 노래 가운데 나오고 있는 것이 바로 신명기 32장 7절이다.

그렇다면 그 말씀이 그의 주장과 같이 조상들의 위대한 믿음을 본받으라고 한 것이겠는가?


② 예레미야 6장 16절

박윤식 목사가 그의 책에서 또 하나의 근간으로 삼고 있는 것은 구약성경 예레미야 6장 16절에 있는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는 말씀이다.

그는 <창세기의 족보> 서문에서 신명기 32장 7절에 있는 말씀 중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는 말씀만을 인용한 뒤 바로 이어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는 예레미야 6장 16절을 덧붙인다.

그래서 그는 신명기 32장 7절과 예레미야 6장 16절이 서로 같은 뜻이며, 예레미야 6장 16절이 신명기 32장 7절의 의미를 보다 확실하게 밝혀주고 있는 것처럼 조합해놓고 있다.


△ 문맥의 조합과 조작

신명기 32장 7절의 일부와 예레미야 6장 16절의 조합에는 교묘한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은 ‘옛적 길 곧 선한 길’이란 말 중 ‘옛적 길’이란 말은 바로 앞에 있는 신명기 32장 7절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앞서 간 믿음의 조상들의 옛 길’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과 같은 위치에 있고, 뒤에 있는 ‘선한 길’이란 말은 그 길이 바로 믿음의 길로써 선한 길을 의미하는 것과 같은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래서 두 구절들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주 그럴 듯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서로 다른 곳에 있는 두 말씀을 문맥의 의미와 전혀 상관없이 뚝 떼어놓은 다음, 그것을 다시 연결하여 자신이 원하는 뜻으로 성경을 왜곡하는 것이며, 이단·사이비들이 주로 쓰는 전형적인 수법이다.


그러나 예레미야 6장 16절은 전혀 그런 뜻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 내가 또 너희 위에 파수꾼을 세웠으니 나팔 소리를 들으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 하였도다 그러므로 너희 열방아 들으라 회중아 그들의 당할 일을 알라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법을 버렸음이니라”(렘 6:16~19).


예레미야 6장은 예루살렘의 함락이 임박하였음을 경고하며, 하나님께서 ‘옛적 길 곧 선한 길’인 당신의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돌아오라고 하신 말씀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박윤식 목사와 같이 16절 중에서도 일부만 떼어서 보지 말고 17절까지 계속해서만 봐도 잘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분명히 17절 하반절에는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법을 버렸음이니라’고 하면서 그것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율법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래서 심지어 <아가페 열린 노트성경>에서는 아예 옆에다 16절에 대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가르치시고 인도해 오신 참된 길”이라고 주석을 해놓기도 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6장 16절은 박윤식 목사의 주장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하게 살았고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들이 선하고 착하게 산 길, 그 믿음의 길을 보고 그리로 행하라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타락하고 부패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가르치시고 인도하신 선하고 참된 그 길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박윤식 목사가 쓴 구속사 시리즈의 가장 중요한 두 기둥으로써 그 책의 모든 전제와 근거가 되는 두 구절이 이 모양이니 나머지는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2. 구속사적 해석과는 전혀 상관없는 책


박윤식 목사의 책들은 전부 표지에 ‘구속사 시리즈’라는 글귀가 붙어 있다.

그래서 첫 번째 책에는 ‘구속사 시리즈 1’이라 되어 있고, 두 번째 책에는 ‘구속사 시리즈 2’라 되어 있으며, 나머지 책들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이 책들은 표지만 보면 누가 보아도 ‘아, 구속사적 입장에서 성경을 해석해 놓은 책이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필자가 그 책들을 읽어본 바로는 구속사적 입장의 해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 입장의 해석이었던 모범적 해석이었으며, 그것도 온전한 모범적 입장의 해석이 아니라 반쪽짜리 모범적이었고, 반구속사적 입장에서 해석해놓은 책이었다.


그러면 그 책들은 왜 반구속사적인 책들인가?


그 책들이 성경을 구속사적 입장에서 해석해 놓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구속사적인 입장에서 해석해 놓은 책이라는 필자의 주장에 대해서는 구속이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며, 구속사적 해석이 무엇인지 구속사에 대해 조금만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읽어도 쉽게 지적할 수 있는 내용이다.

왜냐하면 박윤식 목사의 구속사 시리즈는 구속사적 성경해석에서 가장 금하고 있는 것들을 근간으로 삼고 써진 책이기 때문이다.


⑴ 모범적-구속사적 논쟁

1930년대에 화란의 개혁교회 내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의 일상적인 설교 관례에 대해 반대를 제기하였다.

그들의 불평은 설교자들이 역사적 본문에 언급된 사람들을 으레 본받아야할 모본으로, 따라야할 모범으로 제시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범적 설교”란 말이 생겨났으며, 결국 ‘모범적-구속사적 논쟁’이 시작되었다.


구속사적 해석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구속사적 접근의 창시자라 불릴 수 있는 스킬더를 비롯해 스피엘, 판데이크, 판 드 피엘, 페인호프 등이었고, 이들과 논쟁했던 모범적 입장의 사람들은 바빙크, 데이크, 다우마, 하이젤, 스켈하아스, 스트레이프케르크 등이었다.


여기에서는 박윤식 목사의 책이 정말 구속사적 입장에서 써졌는가 만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므로 구속사 논쟁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자세하게 언급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더라도 홀버다와 더 크라아프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들어보면 구속사적 성경해석의 원리가 무엇이며, 그와 반대편에 있었던 모범적 해석이 무엇인지, 그리고 필자가 왜 박윤식 목사의 책들이 반구속사적이라 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

구속사적 입장을 강조했던 홀버다의 주장을 먼저 들어보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경은 많은 역사들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 계속 진행되는 하나님의 계시의 한 역사, 늘 점진하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한 역사를 담고 있다. 그리고 성경에 이름이 기록된 다양한 인물들은 모두 이 하나의 역사에서 그들 자신의 독특한 위치를 부여받았으며, 이 역사에 대해 그들의 독특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이야기를, 그들이 서로 간에 갖는 그 관계 속에서, 그들이 구속사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가지는 그 일관성 속에서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시드니 그레이다누스, 권성수 역,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 pp.55~56).


홀버다는 성경에 나타난 역사는 일관성 있게 진행되는 단 하나의 역사이기 때문에 거기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은 구속사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모범적 해석을 주장했던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들이 구속사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다만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보면서도 성경에 나오는 어떤 인물이나 사건의 경우에 대해서는 본받아야할 좋은 모범으로, 그리고 또 어떤 인물들에 대해서는 피해야 할 경고적 모범으로 볼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구속사적 해석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역사적 본문을 보다 큰 단위의 한 부분으로 보지 않는다면, 만약 유기적인 연결 관계로 보지 않고 상황들을 단편적으로 본다면, 건전한 해석에 이를 수 없고, 따라서 좋은 설교를 할 수도 없다”고 하면서 그것을 ‘단편적 해석’이라 하며 반대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특히 전체에서 한 사람의 일부, 그의 성격의 일부, 그의 경험의 일부, 그의 행동의 일부 등을 떼어내서 설교하는 것을 ‘원자적 해석’이라 하며 배척하였고, 무엇보다 성경에서 발견되는 소위 믿음의 영웅들에 대한 위인전과 같은 ‘전기설교’를 가장 싫어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설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는 사람을 높이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간곳이 없게 만드는 인간 중심의 설교이고, 결국 성경도 무용지물로 만들고 말기 때문이었다.


사실,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빼버리고 어떤 것을 본받고 교훈으로 삼기 위해 성경을 보게 되는 것이라면 구태여 성경만 볼 필요가 없다.

명심보감에도 좋은 말씀은 있으며, 심지어 불경을 봐도 교훈으로 삼을 내용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속사 논쟁이 한창일 무렵 구속사적 입장에서 성경 전체를 해석했던 더 크라아프는 그의 책 <약속 그리고 구원>이라는 책의 서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주로 사람들이나 그들의 믿음을 매력적인 모범으로, 그들의 죄악들을 거부해야 할 모범으로 말해서는 안 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를 말해야만 한다.”


박윤식 목사의 책이 왜 반구속사적인 책인지 구속사의 논쟁을 통해 살펴보았다.

그의 책은 족장들의 위대한 신앙의 발자취를 본받고 따르자는 방향으로 쓴 것이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구속사적 해석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결국 그 책은 구속사적 해석이기는커녕 구속사적 해석을 주장했던 분들이 가장 싫어했던 ‘전기설교’와 같은 형태의 주장을 하게 되었고, 전체적으로 인간중심적인 모범적 해석을 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⑶ 구속과 구속사에 대한 이해

성경에 나오는 구속이란 단어의 정확한 의미만 알고 있었어도 박윤식 목사는 ‘성경의 족보에 역대 족장들의 신앙이 꿈틀대고 있다’라고 하며 그들에 관한 책을 쓰면서 표지에 ‘구속사 시리즈’라는 말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① 죄와 구속

성경에서 구원을 나타내는 단어는 주로 ‘소테리아’(swthriva)로 ‘구출’을 의미한다.

그러나 구속을 나타내는 단어는 ‘뤼트로시스’(luvtrwsi")로 ‘풀다’, ‘파괴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뤼오’(luvw)에서 온 것이며 ‘속전’ 혹은 ‘속전의 값’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본래 구속을 나타내는 ‘뤼트로시스’란 단어는 노예시장에서 생겨난 것으로 쇠고랑을 차거나 묶여 있는 노예를 ‘값을 주고 사서 풀어주는 것’, 즉 노예 해방을 의미했다.


노예가 되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다.

예를 들면, 전쟁에 져서 전쟁포로가 되거나 돈이 없어서 빚 때문에 팔린 경우, 흑은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아예 처음부터 노예가 된 경우 등이다.

그러나 어떤 형태가 되었건 노예란 자신의 능력으로 쇠고랑을 풀고 해방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그는 아예 노예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노예에게는 긍휼과 능력 있는 구속자, 즉 그 빚을 대신 갚아줄 대속자가 필요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 모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진단과 은혜의 처방이다.

그래서 그분은 구속자를 보내기로 하신 것이었다.


그러면 죄와 상관없는 노예의 대속, 즉 노예의 구속과 성경에서 말하는 인류의 구속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 노예 해방과 성경의 구속

성경에서는 ‘죄’를 나타내는 단어가 경우에 따라 여러 가지로 쓰였다.

그런데 그중에 하나가 ‘빚’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대표적인 예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라는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주기도문의 내용이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죄라고 번역된 단어가 바로 ‘빚’을 나타내는 ‘오페일레마’(ojfeivlhma)라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고 하면서 모두가 다 죄인이라 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하셨고, 바울 또한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롬 6:17)라고 했기 때문에 종합하면 결국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 갚아야할 빚이 있는 노예란 의미가 된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빚을 의미하는 오페일레마라는 단어가 죄에서 구속받아 천국 가는 것과 관련해서, 그리고 그 빚(죄)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되기도 한다.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 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나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23~35).


일만 달란트와 일백 데나리온에 관한 비유는 주기도문 중에 나오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에 대한 주석과 같은 말씀이다.

그런데 주기도문에 나오는 이 용서에 관한 말씀은 잘못 이해하면 또 다른 구원의 조건이 되거나 또 하나의 구원의 방법이 될 수가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해주어야 한다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되거나 누군가를 용서해 주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면 아마 수도 없는 구원의 조건이나 방법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마태복음 6장 12절의 말씀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라 이미 주님을 따르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신 것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구원 받은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값없이 받은 하나님의 놀라운 용서의 은혜를 알고 구원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용서하며 살 수밖에 없고 사소한 것도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 나오는 임금에게서 값없이 받은 용서의 은혜, 즉 임금에게 졌던 일만 달란트의 빚(죄)은 도대체 어느 정도에 해당하는 것일까?


△ 20만년의 품삯

예수님 당시 한 데나리온은 하루의 품삯이었다.

그리고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에 해당했다.

그러므로 일만 달란트는 6,000×10,000 = 60,000,000 이므로 6천만 일이나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다시 년으로 환산하면 1년은 365일이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있는 안식일이나 기타 휴일을 제외해야하므로 아무리 잘 잡아줘도 일 년은 300일 정도 일 할 수가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그것을 다시 60,000,000 ÷ 300 하면 200,000 년, 즉 일만 달란트는 20만년이나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어떤 사람이라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쓰지 않으며 이십 만년 동안이나 일 해서 돈을 벌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기껏해야 100여년 남짓하게 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의미는 명백하다.

인간이란 누구를 막론하고 다 죄인이며, 하나님 앞에서 그 죄 값을 스스로 해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는 반드시 구속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 죄인이다’라고 하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노아(창 6:9)와 아브라함(약 2:21), 기생 라합(약 2:25), 마리아의 남편 요셉(마 1:19)과 아리마대 사람이며 공회원이었던 요셉(눅 23:50), 그리고 백부장 고넬료(행 10:22) 등과 같이 직접적이거나 거의 직접적으로 의인이라 칭한 사람들이 있고, 에녹(창 5:24), 욥(겔 14:14), 다니엘(겔 14:20) 등 의미적으로 의인이라 칭한 사람도 있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의인으로 거론되기도 하고 있기 때문이다(잠 17:15, 사 5:23, 45:25, 눅 18:14, 행 13:39, 롬 3:24, 26, 4:2, 5:1, 9, 18, 8:30, 33, 고전 6:11, 갈 2:16, 딛 3:7).


그러나 이와 같은 구절들은 잘 분석해 보면, 실제적으로 죄를 짓고 있는 악인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에서 의인이라 하거나, 믿는 자에 대한 칭의로, 말씀대로 순종하며 의롭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그리고 이와 같은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의인이라 한 경우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 죄인으로써 구속자가 필요한 것이다.


② 구속사적 해석

앞에서는 ‘구속’이란 단어의 의미를 살펴보았기 때문에 이제는 구속사적 해석의 실 예를 통해서 박윤식 목사의 책이 왜 잘못된 책인지 살펴보자.


성경에서 의인이라 했던 대표적인 사람 중의 한 명이 노아이다.

그래서 박윤식 목사와 같이 노아를 믿음의 발자취를 남긴 위대한 족장, 혹은 믿음의 영웅이란 측면에서 그를 보게 되면 그는 본받아야할 모범이 될 뿐만 아니라 그가 의로웠기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식으로 오해할 가능성까지 있게 된다.

왜냐하면 창세기 6장을 보면 당시의 모든 사람들은 다 타락하고 부패해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것까지 한탄하실 정도였지만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창 6:9)고 하면서 그를 의인이라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그 의를 보시고 방주를 짓게 하여 그를 구원하셨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해서 다 홍수로 멸망당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식의 해석은 행위구원과 같은 방식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 아니라 모세가 그 영광을 가로챈 것과 같은 방식, 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 아니라 인간 노아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과 같은 잘못된 해석이다.

뿐만 아니다. 이것은 구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모범적 해석으로써 단편적 해석이며, 원자적 해석이고, 전기적 설교와 같은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해석은 구속사적 성경해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성경의 사상과도 완전히 반대적인 해석이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는 것이 구속사적 해석인가?


구속사적 해석은 그가 의인이 된 것은 ‘그가 의로웠다’라기보다 그로 하여금 의인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였다’라고 보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성경에서는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창6:9)고 하면서 그를 칭찬하기 바로 직전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


노아가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로 살아갈 수가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창6:8~9)는 순서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노아가 의롭게 살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에서 강조해야할 것은 노아가 의인이었기 때문에 그 의를 기초로 해서 구원 받았다고 하며 그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이 노아로 하여금 의롭게 살도록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창세기 6장을 잘 살펴보면 당시에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타락하고 부패했는지를 잘 밝혀주고 있다.

온 세상에는 죄가 가득 했고, 사람들의 생각하고 계획하는 모든 것들이 항상 다 악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으로 근심하시고 탄식하시며 모두 다 쓸어버리실 계획까지 세우셨다고 하셨을까?


그러므로 성경의 이와 같은 표현은 노아든 누구든 당시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도 예외 없이 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 받아야 마땅한 죄인이었다는 것이며, 그것을 잘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는 말씀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는 이 말씀은 ‘그러나 노아는 의인이었다’라는 문장과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아는 의인이었다’는 말은 ‘그러나’라는 반의어적 접속사가 잘 나타내고 있듯이 앞에 있는 주장들을 뒤집는 것으로써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죄인이었지만 노아만은 예외로 ‘죄인이 아니었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는 말씀은 전혀 그런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앞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 인정하는 것으로써 노아가 비록 죄인이었고 멸망당해야 마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입히셨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 또한 근본적으로는 구속이 필요한 죄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은 ‘은혜’라는 단어만 생각해 봐도 잘 알 수가 있다.


은혜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란 무언가를 해 놓고 마땅히 그 대가로 당당하게 받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해 놓은 것이 없지만 그분의 무한하신 긍휼과 사랑의 결과로 ‘값없이 거저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창 6:9)는 말씀만 보고 노아가 선택받고 구원 받은 것이 그가 의롭게 살았기 때문이라 한다면 성경을 잘못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구속사적 해석이 되려면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단순히 그렇게만 보면 성경 전체를 통해 증거 되고 있는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 되기 때문에 성경 전체를 하나의 역사와 하나의 계시로 보며, 성경에 기록된 다양한 인물들을 그 계시의 역사 속에서 구속사의 중심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보는 구속사적 해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보는 것이 구속사적 해석인가?


이것이 구속사적 해석이 되려면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하여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인의 후손을 약속 하셨다.

그 여인의 후손은 물론 신약에서 여인의 후손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런데 노아 당시에 그 언약은 중대한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셨음을 탄식할 정도로 세상이 악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 쓸어버려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당신의 신실하신 약속은 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신실하신 약속을 지키고자 한 사람 노아를 선택하셨고 그에게 은혜를 입히셔서 방주를 짓게 하심으로 인류를 보존하시고, 그 결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인류를 구원하게 하신 것이며, 이런 입장에서 보면 노아 또한 결국 그리스도 때문에 은혜를 입게 되어 구원받게 되었다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기에서 그리스도를 보게 되며 그분을 보내신 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속사적 성경해석이다.


3. 구속사 시리즈 각 권에 대한 문제점


박윤식 목사의 책들은 전형적인 모범적 성경해석, 그것도 반쪽짜리 모범적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며 구속사적 해석이라기보다는 반구속사적 해석을 한 책이다.

왜냐하면 그는 족장들을 위대한 인물들로 보고, 성경에 메시아와 관련된 족보를 일종의 경건의 족보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각 권들의 중요한 문제점들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살펴보자.

각 권의 내용들을 비록 간략하게 살펴보더라도 그 내용들을 보면 왜 이 책들이 구속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어떻게 성경을 왜곡하는지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⑴ 제 1권

박윤식 목사는 제 1장에서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는 제목으로 신명기 32장 7절을 기록해 놓은 다음 “신명기서는 40년 광야 여정을 마치고 죽음을 목전에 둔 모세가 선포한 세 편의 고별설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20세 된 노장 모세가 위대한 생을 보내고 비장한 심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최후의 훈계이자 마지막 유언으로 선포했던 말씀입니다”(창세기의 족보, p.19)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또한 “모세는 광야 2세대가 가나안 입성 후에도 지속적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의 세대가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이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창세기의 족보, pp.19~20)라고 하기도 하였고, “모세는 그 모든 옛날과 역대 연대의 걸음을 집중적으로 주목하게 함으로써, 그 신앙의 발자취가 가나안 땅을 차지할 그들의 신앙으로 이어지기를 바랬습니다”(창세기의 족보, p.20)라고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신명기 32장 7절은 완전히 반대로 해석해 놓은 것이며, 모세 또한 그의 일생을 살펴보면 불신으로 얼룩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챘다가 가나안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영광스럽지 못한 최후를 마치게 되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그가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 해내는 큰일을 행하고 많은 능력을 나타내기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은혜로 쓰임 받은 결과였을 뿐이지 결코 위대한 생만을 살았다고는 볼 수가 없다.


그리고 그는 또한 모세가 광야 제 2세대들에게 가나안 입성 후에도 지속적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의 세대가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선포했다고 했다.

그러나 싯딤에서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다가 염병에 걸려 2만 4천명이 죽고, 비느하스가 대낮에 음행하는 시므리와 고스비를 창으로 찔러 죽인 사건(민25:1~18)은 광야생활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생긴 제 2세대들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마치 광야에서 믿음으로만 살았던 것처럼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지속적으로 믿음으로 살게 하기 위해 말씀을 선포했다고 한 것’은 그들에 관한 족보를 경건의 족보로 만들기 위한 조작에 불과하다.


⑵ 제 2권

박윤식 목사는 제 2권에서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언약에 대해 상당히 많은 분량을 할애해 놓고 있다.

그 내용은 거의 옳고 좋은 내용이 많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전체적인 흐름의 내용을 위한 일종의 미끼나 속임수처럼 보인다.


이와 같은 사실은 제 2권에서 전체적으로 책의 방향을 어떻게 이끌어가고 있는지 확인해 보면 드러나게 된다.

박윤식 목사는 제 2권 서문에서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그 경건한 자손들이 가나안에 정착할 때까지의 구속사를 통하여 횃불 언약이 성취되는 과정을 연대기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노력하였습니다”라고 하면서 제 2권의 책의 방향을 나타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언약에 대해 해설한 다음 전체적인 내용을 서문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이끌어 간다.

그래서 필자는 그 언약에 관한 해석이 미끼나 속임수와 같은 것이라고 느꼈던 것이다.


아무튼 제 2권의 서문에서 밝힌 책의 방향은 시작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을 나타내 주며, 그와 같은 입장에서 써진 전체적인 내용 또한 그렇다.

왜냐하면 아브라함 또한 모세와 마찬가지로 죄악과 불신의 삶도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먼 이국까지 따라온 마누라를 두 번이나 팔아먹는 파렴치한 짓을 했고(창 12:10~20, 20:8~18),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한 결과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을 낳기도 하는 등(창 16장) 죄로 얼룩진 삶을 살았다.


그래서 신약성경 로마서 4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기도 한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롬 4:1~2).


이것은 아브라함의 삶을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것이다. 그의 삶은 ‘자랑할 것이 없는 삶’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그의 삶에 대해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는데도 그를 왜 경건하다 하며 높이려 하는가?

그러므로 박윤식 목사의 책은 아예 방향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물론 여기에 대해 그는 히브리서 11장에 있는 말씀을 근거(히 11:8)로 하여 ‘그가 믿음의 사람이었다’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야 한다.

성경은 믿음을 가리켜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며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자랑하지 못할 것(엡 2:8~9)이라 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여러 가지 실수가 있고 죄도 지었지만 끝까지 참으시고 그에게 믿음을 주셔서 그와 같이 믿게 하시며 성장케 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분께 영광 돌려야지 아브라함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과 같은 그런 주장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는 또한 62페이지에서 “횃불 언약 이전의 구속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형성하기 위한 ‘경건한 자손’한 사람을 찾는 과정이었고, 횃불 언약 이후의 구속사는 그 ‘한 사람’의 경건한 자손들이 한 민족을 형성하고 온 땅에 충만하여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창 15:5).

한 개인과 가정을 통해 역사하시던 하나님의 구속사가 이제 한 민족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는 전환점이 바로 횃불 언약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잊어버렸던 만남, p.62)라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주장 또한 그야말로 코미디와 같은 주장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경건한 한 사람을 찾기 위하여 기다렸다가 마침내 특별하고 의롭고 경건하기까지 한 아브라함을 만나 그로 인하여 경건한 자손을 낳아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을 말씀하셨다는 것은 파렴치한 아브라함, 자랑할 것이 없는 아브라함, 그리고 불평과 불만의 세월을 살았던 그의 후손들의 광야와 그 후 가나안 땅에서의 역사를 볼 때 말도 되지 않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횃불 언약의 주인공으로서 요셉은 실로 엄청난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 축복의 뿌리는 하나님을 향한 요셉의 위대한 신앙이었습니다”(같은 책, p.412)라고 하였고, 또한 “요셉이 횃불 언약의 주인공으로서 횃불 언약을 성취시키는 축복을 받게 된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것에 대하여 성경은 “샘 곁”의 신앙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같은 책, p.413)라고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축복의 뿌리는 그의 신앙이 아니라 그에게 그런 신앙을 갖게 하시고 은혜를 주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을 하나님에게서 그 영광을 빼앗아 요셉에게 주는 것과 같은 그의 해석은 구속사와 아무런 관계가 없고 성경과도 아무런 관계없는 잘못된 해석이다.


⑶ 제3권

박윤식 목사는 제 3권에서 “마태복음 족보에 부정한 여인들의 이름이 기록된 것은, 죄인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를 보여줍니다”(언약의 등불, p.98)라고 주장했으며, 또한 “예수님은 자신의 족보를 깨끗하게 보존할 수 있었지만, 죄인을 구하기 위하여 종의 형체를 취하시려 함에는 불법과 불륜, 근친상간으로 얼룩진 이방 여인들을 자신의 조상으로 삼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으신 것입니다”(같은 책, pp.98~99)라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이 비록 죄악으로 얼룩진 삶을 살았을지라도 여인의 후손에 관한 신실하신 주님의 약속이 변치 않고 이루어져서 그 약속대로 결국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하셨다는 구속사를 보여준 것이지 예수님의 자기 비하의 족보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의 해석은 잘못된 것이며 구속사적 해석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해석이다.


그런데 그는 같은 책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시기까지 신앙의 계보를 계속 이어 온 신앙의 발자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직 언약에 충실한 믿음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이어진다는 사실을 명확히 깨달아야 합니다.’(같은 책, p.105)라고 하면서 앞에 있는 주장과 전혀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그는 분명히 앞에서 ‘부정한 여인들’ 혹은 ‘불법과 불륜, 근친상간으로 얼룩진 이방 여인들’이란 표현을 쓰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언약에 충실한 믿음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이어진다’라고 하면서 또 다시 전체적인 그의 책들의 주장의 기조를 이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그와 같은 상반된 주장은 일종의 물타기나 자기 합리화처럼 보인다.


⑷ 제 4권

제 4권도 3권처럼 전체적인 내용은 같다.

박윤식 목사는 여기에서 “두 번째 14대의 첫 머리에 이방인 헷 사람 ‘우리야’가 등장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혈통보다 믿음을 더 중요시 한다는 것을 보여주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심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신비롭고 오묘한 섭리, p.59)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왜곡이다.

왜냐하면 우리야가 비록 예수님의 족보상에 등장하기는 했지만 그분의 계보로써 등장하는 것, 즉 그분의 육신적인 조상으로써 등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범죄를 지적하기 위해서 등장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마 1:6)라는 본문만 읽어보아도 명백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의 족보를 경건의 족보나 믿음의 족보로 만들기 위해 그렇게 조작하고 있다.


그가 쓴 제 4권의 전체적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빠짐없이 이어지는 혈통의 기록이 아니라 구속사적 경륜을 기록한 ‘신앙적 족보’임을 나타내셨습니다”(같은 책, p.244)라는 주장에 잘 요약되어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구속사적 해석과 정반대되는 것으로 성경의 가르침과도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 창자가 빠져나와 죽은 사람

구약성경에 보면 남왕국 유다의 열왕들 가운데 아주 나쁜 왕들이 여럿 있었다.

그 중에 한 명이 바로 므낫세이다.

전승에 의하면 이사야 선지자가 그에 의해 톱으로 켬을 당해 죽었다 하니 그가 얼마나 비신앙적이며 악한 왕이었는지 알만 하다.

그래서 박윤식 목사의 주장대로 한다면 그는 예수님의 족보가 신앙의 족보이기 때문에 그 족보에 없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있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다.


여호람(요람)은 아주 악한 왕으로서 즉위 하자마자 자신의 아우들을 몰살시켰으며(대하21:4), 산당들을 많이 만들어 음란하게 우상숭배하게 하였고(대하 21:11), 엘리야의 말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다가 창자가 빠져나와 비참하게 죽었고 열왕의 묘실에도 장사되지 못했다(대하 21:12~20).

쉽게 말하면 그는 불신자로 살다가 온갖 죄를 다 지은 후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비참하게 죽은 타락한 왕이었다.

그렇다면 그를 구원 받은 사람이라 할 수가 있을까?

그런데도 그가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되어 있으니까 믿음의 사람이라 할 수가 있을까?

그는 경건한 사람이었을까?


박윤식 목사의 주장대로 하자면 예수님의 족보는 믿음의 족보이고 경건의 족보이기 때문에 그 또한 믿음의 사람이요 경건의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가 정말 믿음의 사람이었는가?


⑸ 제 5권

박윤식 목사는 제 5권에서도 같은 주장들을 되풀이 한다.

그래서 그는 “성경은 ‘여자의 후손’ 한 분을 고대하면서 아담과 하와의 가족을 시작으로 경건한 계통을 보존하며 끊임없이 이어가는 거룩한 족보의 역사입니다”(영원한 언약의 약속 p. 102)라고 하였고,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가는 거룩한 선민의 족보”(같은 책 p. 120)라 하기도 하였으며,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3:15에서 여자의 후손으로 메시아가 오신다는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보존해 오신 것입니다. 이 기간은 여자의 후손이 나올 때를 기다리신 하나님 자신의 인고(忍苦)의 세월이었습니다. …이 기간은 약속대로 ‘여자의 후손’을 낳게 되는 ‘동정녀’ 마리아와 ‘의로운 자’ 요셉을 찾기 위해서 동분서주하신 하나님의 수고와 열심의 세월이었습니다”(같은 책 pp. 403~404)라고 했다.


그는 여기에서도 제 2권에서 하나님께서 한 사람 아브라함을 찾았다고 한 것처럼 한 사람 의로운 요셉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셨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은 앞에서 이미 아브라함이나 여호람 등을 통해 설명한 것처럼 성경의 가르침과는 완전히 다르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고 있는 족보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신실하신 언약은 변하지 않았으며, 약속대로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구원하셨다는 주님의 은혜가 나타나 있다.

그래서 거기에는 부정한 이방 여인도 기록되어 있으며, 남의 아내를 취하고 살인한 다윗에 관한 사건도 기록하고 있고, 므낫세와 같은 사람도, 여호람과 같은 사람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사실을 왜곡 조작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훼손하고 있는 박윤식 목사의 책들은 구속사적으로 성경을 해석한 것도 아니고, 방향이나 내용도 다 잘못된 비성경적인 책이다.


4. 성경에 나타난 족보의 의미


중세의 어셔 주교가 족보를 가지고 구약의 연대를 B.C 4004년으로 계산해 냈다.

그래서 그 후 많은 사람들은 구약의 역사를 약 4000년, 신약의 예수님 이후 오늘까지를 약 2000년, 이렇게 해서 인류의 역사가 약 6천 년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의 족보들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기록된 것이다.

연대 계산용으로 빠짐없이 기록한 것이 아니라 사안별로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족보마다 그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근거로 연대계산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실제적으로 성경의 족보들을 비교 대조해 보거나 족보에 기록되어 있는 인물들의 삶을 연구해 보면 확인해 볼 수가 있다.

박윤식 목사도 성경의 족보가 빠짐없이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아담부터 시작해서 연대를 일일이 계산하여 옆에다 기록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특별한 목적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부터 성경의 족보를 가지고 왜 연대계산을 해서는 안 되는지, 그리고 성경의 족보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⑴ 족보로 연대 계산을 할 수 없는 이유

아브라함 이후부터는 어느 정도 연대계산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뿐만 아니라 세속의 여러 문헌들까지 참조했을 때 가능한 것이지 성경의 족보만을 가지고는 그것마저도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족보의 구조상 도저히 빠질 수 없을 것 같은 것들도 조사해 보면 빠진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브라함 이전 시대나 세속의 기록까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성경에만 기록되어 있는 홍수 이전까지의 연대에 대해 성경의 족보만을 가지고 계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족보를 가지고 인류의 역사를 알아낸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① 정확한 대 수를 기록했어도 빠져 있다.

마태복음 족보에서는 아브라함 이후부터 예수님까지를 14대, 14대, 14대로 나누어 기록해 놓고 있다.

그러므로 대 수까지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 족보만을 놓고 본다면 누락되어 있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요람과 웃시야 사이에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가 빠졌으며, 요시야 다음에 여호아하스 여호야김(엘리야김)이 빠져 있다.


② 몇 대 손이라 하면서도 빠져 있다.

구약성경 에스라 7장 1절부터 5절에 보면, 누구는 누구의 몇 대 손이요 누구는 누구의 몇 대 손이라는 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이 족보도 족보만을 놓고 본다면 구조상 아무도 빠지거나 누락되어 있으리라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여기에도 역대상 6장에 있는 족보와 비교해 보면 빠진 것이 있다.


“이 일 후 바사 왕 아닥사스다가 위에 있을 때에 에스라라 하는 자가 있으니라 저는 스라야의 아들이요 아사랴의 손자요 힐기야의 증손이요 살룸의 현손이요 사독의 오대손이요 아히둡의 육대손이요 아마랴의 칠대손이요 아사랴의 팔대손이요 므라욧의 구대손이요 스라히야의 십대손이요 웃시엘의 십일대 손이요 북기의 십이대손이요 아비수아의 십삼대손이요 비느하스의 십사대손이요 엘르아살의 십오대손이요 대제사장 아론의 십육대손이요”(스 7:1~5).


“아므람의 자녀는 아론과 모세와 미리암이요 아론의 아들들은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이며 엘르아살은 비느하스를 낳았고 비느하스는 아비수아를 낳았고 아비수아는 북기를 낳았고 북기는 웃시를 낳았고 웃시는 스라히야를 낳았고 스라히야는 므라욧을 낳았고 므라욧은 아마랴를 낳았고 아마랴는 아히둡을 낳았고 아히둡은 사독을 낳았고 사독은 아히마아스를 낳았고 아히마아스는 아사랴를 낳았고 아사랴는 요하난을 낳았고 요하난은 아사랴를 낳았으니 이 아사랴는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세운 전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행한 자며 아사랴는 아마랴를 낳았고 아마랴는 아히둡을 낳았고 아히둡은 사독을 낳았고 사독은 살룸을 낳았고 살룸은 힐기야를 낳았고 힐기야는 아사랴를 낳았고 아사랴는 스라야를 낳았고 스라야는 여호사닥을 낳았으며 여호와께서 느부갓네살의 손으로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을 옮기실 때에 여호사닥도 갔었더라”(대상 6:3~15).


에스라 7장에는 므라욧부터 아사랴 사이에 ‘아마랴, 아히둡, 사독, 아히마아스, 아사랴, 요하난까지 무려 여섯 대나 빠져나가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도저히 빠질 수 없는 구조 속에서도 빠진 것으로 보아 성경의 족보를 가지고 연대 계산을 한다는 것은 정확한 연대 계산이 아니다.


③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기록도 있다.

구약성경 역대상 26장 24절을 보면 “모세의 아들 게르솜의 자손 스브엘은 곳간을 맡았고”(대상 26:24)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 구절만을 놓고 보면 사태의 심각성을 못 느낄지 모르겠다. 모세의 아들 게르솜의 ‘자손’이 스브엘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23장 16절에 “게르솜의 아들 중에 스브엘이 족장이 되었다”(대상 23:16)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결국 스브엘은 모세의 아들 게르솜의 아들이었다는 뜻이다.


역대상 23장, 26장의 배경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이다.

그때 다윗은 게르솜의 아들 스브엘에게 곳간을 맡은 자가 되게 했다.

지금 식으로 얘기하자면 다윗은 게르솜의 아들 스브엘에게 경제부 총리쯤 되는 높은 자리에 앉힌 것이다.

그렇다면 그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일까?


게르솜은 다윗보다 얼마쯤 전의 사람이었을까?


광야생활 40년(신 8:2), 사사들이 통치했던 기간 450년(행 13:19), 사울의 통치기간 40년(행 13:21), 게르솜은 적어도 다윗보다 500년 전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다윗은 오백년도 더 된 사람의 아들에게 장관이 되게 했다는 것이다.

이것 또한 우리나라 식으로 얘기하자면, 조선 초 개국공신이었던 정도전의 아들을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경제부 장관으로 삼았다는 것과 같다.

그러면 이게 가능한 것일까?


그런데 이것보다 더한 것도 있다.

역대상 2:6에 보면 “세라의 아들은 시므리와 에단과 헤만과 갈골과 다라닌 모두 다섯 사람이요”라고 되어 있다.

세라는 야곱이 애굽으로 이주할 때 기록되어 있는 70명의 가족 명단에 나오는 이름이다.

그런데 세라의 아들로 기록된 시므리와 에단과 헤만과 갈골과 다라는 솔로몬 시대의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들 간에는 적어도 900년의 간격이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실들을 보았을 때 성경의 족보를 가지고 연대를 계산한다는 것은 잘못이다.


④ 나이까지 기록되어 있는데도 공백이 있다.

아마 성경의 족보를 가지고 연대를 계산해 낼 수 없는 가장 확실한 이유는 나이까지 기록되어 있는데도 공백이 있다는 사실이 아닐까 생각한다.


구약성경을 보면 ‘레위 - 고핫 - 아므람 - 모세’ 이렇게 야곱의 아들 레위로부터 모세까지 4대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런데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에 대해서 출애굽기 6장 20절에서는 “아므람이 그 아비의 누이 요게벳을 아내로 취하였고 그가 아론과 모세를 낳았으며”라고 하며, 민수기 26장 59절에서는 “아므람의 처의 이름은 요게벳이니 레위의 딸이요 애굽에서 레위에게서 난 자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모세는 그의 어머니쪽으로 계산하면 레위부터 3대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들의 나이가 기록되어 있다.


고핫은 출애굽기 6장 18절을 보면 133세의 수를 살았으며, 아므람은 137세(출6:20), 그리고 모세는 80세 때 부름을 받았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430년 있었으므로 여기에는 217년의 공백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그랜드 주석 민수기 1장의 난해 해설에서는 모세의 부친 아므람과 고핫 사이에 6~7대의 간격이 있을 수 있다고 했고, 윌리엄 헨리 그린은 지금으로부터 약 140년 전이 이미 그의 창세기의 연대에 관한 연구 논문에서 “아므람과 요게벳이 아론과 모세의 직계 부모가 아니라 조상들이었다”(구약신학논문집 제1권, 윤영탁역, p. 41)라고 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실들을 고려해 보았을 때 성경의 족보를 가지고 연대 계산을 한 것은 정확한 계산이라 하기 어렵다.


⑵ 성경에 나타난 족보들의 의미

박윤식 목사는 성경에 나오는 족보를 경건의 계보, 혹은 믿음의 족보라는 식으로 보았다.

그 결과 그는 앞에서 살펴본 것들과 같이 성경을 왜곡하고 조작하게 되었다.

모든 것을 잘못 해석한 신명기 32장 7절과 예레미야 6장 16절을 근거로 하여 거기에 맞추어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주장대로 하자면 므낫세나 여호람 같은 사람도 우리가 본받아야할 사람으로서 거룩한 믿음의 발자취를 남긴 자들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또한 성경의 족보에는 빠진 것들이 있기 때문에 족보를 가지고 연대를 계산해낼 수 없다고 하면서도 계산한 연대를 계속해서 기록해 두었다.

아마 자신이 얼마만큼 연구했는지 그 깊이를 보여주고자 한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가 족보들을 그 지경이 되도록 해석해 놓은 것을 보았을 때 그는 성경에 나오고 있는 족보의 의미를 전혀 파악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족보들은 어떤 의미로 기록된 것일까?


① 인류의 두 계보

성경의 맨 처음에 나오는 족보는 가인의 족보이다(창 4:16~24).

그리고 바로 이어서 나온 족보는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5~26)라고 하는 말씀과 함께 이어서 나오고 있는 아담으로부터 셋으로 이어진 족보이다(창 5:1~32).


그러므로 이 두 족보는 명백하게 비교 대조를 위해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에 맨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는 가인의 족보(창 4:16~24)는 그가 아벨을 죽인 이후에 나온 것으로써 유다서 1장 11절에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라는 말씀이 있고, 그의 후손 가운데 가장 악한 사람으로서 성경에 나타난 두 번째 살인자요 최초의 일부 다처주의자인 라멕(창 4:23~24)이 가인으로 이어진 칠 대 손인 것에 비해 셋의 출생 때 ‘다른 씨’를 주셨다 하였으며, 그의 족보 바로 이전에 셋이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다고 했을 때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6)고 하면서 하나님과 관련시켰고, 유다서 1장 14절에서는 “아담의 칠 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되”라고 하면서 그가 사람들의 경건치 않음에 대해 심판을 선언하며 경고하였다고 하는데 그는 가인의 후손으로 칠 대 손인 에녹과는 정반대로 삼백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음을 맛보지 않고 승천한 경건의 극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난 맨 처음의 두 족보는 실제적인 삶을 산 사람들을 통하여 크게 두 종류의 길을 걸어갈 사람들을 계시해 주고 있다.

하나는 가인의 길로 간 사람들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어서 7이라는 완전 숫자로 상징된 라멕과 같이 타락의 극치로 갈 수밖에 없는 멸망 받을 사람들이며, 또 한 종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자들로써 가인과는 ‘다른 씨’의 사람들로써 라멕과 대칭이 되면서 궁극적으로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게 될 에녹과 같이 구원받을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 두 족보는 칠 대로 서로 맞춰진 것과 같이 축약된 족보임이 암시되고 있다.

그러나 창세기 5장에 나온 족보는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라는 말을 반복된 것과 같이 선택받은 자들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선언하신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임을 나타내며, 수명 또한 점점 줄어가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② 타락한 인간

창세기 6장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취하여 극도로 타락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가인의 후손들과 셋의 후손들이 통혼하여 결국 홍수로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그 후 불경건한 자들이 다 죽고 노아의 가족만 남았지만 그들의 후손들 또한 급속도로 부패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창세기 10장에 나온 족보들은 창세기 4장과 5장에 나온 족보와 완전히 다른 의도와 배경 속에서 나온 것이다.


창세기 4~5장의 족보가 선택받지 못한 자들의 불경건과 선택 받은 자들의 경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창세기 10장의 족보는 노아의 후손들의 계보를 알려줌과 동시에 홍수 후에 하나님께서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 8:21)고 하신 것처럼 인간이란 얼마나 타락하고 부패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며, 바벨탑의 사건은 바로 그것에 관한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부분을 전체시 해서 창세기 5장의 족보를 보고 성경의 모든 족보를 다 경건의 족보라는 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③ 구원의 새 지평

창세기 11장에 나온 족보는 창세기 5장의 족보가 “죽었더라”라는 말이 반복되었던 것과는 다르게 “낳았으며”란 말이 계속 반복 되었다.

이것은 누군가 낳아서 그가 역사 무대 위에 등장하게 될 것을 의미하는데, 과연 구원의 계시의 새 지평을 열어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이 등장하게 된다.

‘~ 아버지’란 말은 교회 음악의 아버지라고 하면 ‘세바스찬 바흐’라고 하듯 없었던 것을 새로 있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기는 했지만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 존재를 의미한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구원의 도리는 이미 이전부터 계시 되었지만 아브라함부터 본격적으로 펼쳐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족보는 노아의 후손들이 다 참석해서 범죄 하였던 바벨탑의 사건에 이어서 나온다.

그러므로 이 족보는 사람들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실하신 메시야의 약속을 이루시고자 아브라함을 등장시키는 은혜의 족보임을 알 수가 있다.


④ 소망의 족보

구약성경 역대상에 나온 족보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이 있었다.

예를 들면 “모세의 아들 게르솜의 자손 스브엘은 곳간을 맡았고”(대상 26:24)라고 하면서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모세의 손자가 약 500년 후에 경제부 총리가 된 것처럼 기록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손이나 아들은 같은 뜻이며, 비록 고대 사람의 자식이라 해도 당시의 사람들은 그 의미를 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으로 번성했던 다윗 왕가를 회상하며 다윗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끊어지지 않고 이루어질 것을 고대하면서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서 그렇게 해놓은 것이다.


⑤ 은혜의 족보

마태복음에 나온 족보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과 요셉, 그리고 예수님으로 이어진 하향식 족보이다.

그러나 다윗의 후손이었던 요셉은 예수님의 실제적인 아버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이 아니라는 논쟁에 휘말릴 수도 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서는 또 다른 다윗의 후손인 마리아의 족보를 마리아로부터 시작한 상향식으로 기록한 것처럼 보인다.


마태복음에 나온 14대, 14대, 14대는 분명 의도적인 기록이며 생략된 기록이다.

그렇다면 왜 마태는 그와 같이 14대씩으로 나누어서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였을까?


마태복음의 족보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다윗과 관련된 족보이다.

그래서 다윗 이전에는 왕정시대가 아니어서 왕이 아니라 족장들이 기록되었고, 나라가 망해버린 이후에는 왕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왕이 아닌 사람들이 기록되었지만 다윗 이후 나라가 망하기 전까지에는 모두가 다 왕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다윗에게만 왕이란 칭호가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다윗이 바로 만왕의 왕이요 진정한 왕이신 주님의 예표였다는 것이다.

마태복음에 14대라는 말은 바로 이와 관련하여 나온 것으로 보인다.


파피아스란 분에 의하면 마태복음은 본래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 한다.

그렇지만 신약성경이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을 때 그것은 결국 히브리어로 기록된 것이 헬라어로 번역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는 아라비아 숫자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마태복음의 ‘십 사’는 아라비아 숫자의 14가 아니며, 히브리어가 수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아주 의미심장한 기록으로 보여진다.


히브리어의 단어는 첫 번째에서 열 번째까지는 1부터 10까지의 수치를 가지고 있고, 그 다음부터는 20, 30... 이런 순으로 올라간다.

그래서 다윗(dwID)이란 단어는 히브리어의 네 번째 단어와 여섯 번째 단어, 그리고 다시 네 번째의 단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합치면 14가 됨으로 14대, 14대, 14대란 말은 다윗, 다윗, 다윗이란 말도 된다.


그러므로 마태는 구약성경에서 오리라 하셨던 다윗(겔 34:23~24, 37:24~25)이 바로 예수님이며, 예수님이야말로 만왕의 왕이라는 입장에서 아주 의도적으로 그와 같이 쓴 것으로 보인다.


박윤식 목사의 회개 문제


박윤식 목사가 과거에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었건 간에 요즘 나온 그의 책을 보았을 때, 그는 지금은 건전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살펴본 바와 같이 그의 책은 구속사 시리즈라 했지만 구속사와는 정반대의 책이며, 성경도 많이 왜곡하고, 방향도 아주 잘못되어 있어서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좋은 책으로 추천할 만한 책이 아니라 성도들로 하여금 성경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갈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조심해서 읽도록 하거나 아예 금서로 지정해야할 만한 책으로 보인다.


물론,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많이 연구한 흔적이 보이고 좋은 내용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3년 6개월 7일 동안 기도하다 깨달아 쓰게 된 책이라 하지만 어떤 것을 연구하여 거기에 원어적인 내용을 더한 것이 아니라 ‘원어풀이식 책’이라는 것과 참고도서들이 모두 다 1980년대 이후에 출판된 것이라는 점은 그가 정말 이 책의 저자일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튼 그가 진정한 저자라 하더라도 전체적인 내용으로 보았을 때, 필자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엉터리처럼 보이는데 수많은 유명 신학자들이 극찬을 하고 추천을 한 것에 대해서는 심히 유감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그의 책 가운데에는 이런 내용도 있었다.


“작금에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다한 종교들도 자기 교파를 중상모략하고 헐뜯는 일이 없는데, 유독히 우리 기독교에서 종교 연구가임을 자처하는 몇몇 분들이 거짓말을 지어내며 사실을 왜곡한 말과 글로 신실한 사람들을 이단시하고,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사냥하며 죽이고 있다는 것이다. 구원 역사의 황혼기라고 불리우는 이 시대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다니시는 주님의 심정을 가지고(마 18:14, 눅 15:4, 요 6:39), 한 사람이라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뜨거운 열심히 전도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한 때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거짓말과 중상모략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영혼들을 실족시키고 괴롭힌다면 그 마지막이 어떠하겠습니까? 사람들 앞에서 천국 문을 닫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남들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자들에게는 큰 화가 있을 뿐입니다(마 23:13). 요한계시록 21장 8에서는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 곧 둘째 사망에 참예한다고 말씀하고 있으며, 요한계시록 22:15에서는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다고 준엄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삶은 나그네길입니다(대상 29:15, 벧전 2:11). 인생은 마치 석양의 그림자같이 신속히 지나가며, 반드시 한 번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그 때에 지나온 모든 삶의 진실들이 그대로 밝혀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모든 거짓과 불경건한 어두움의 일을 버리고(롬 13:12), 지혜로운 다섯 처녀처럼 기름을 준비하여 영혼의 등불을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환히 밝혀야 합니다(마25:1~13, 잠20:27, 시119:105). 그때 세상은 평강이 강같이, 의(義)가 바다 물결같이 넘쳐흐르게 될 것입니다(사48:17~18)”(신비롭고 오묘한 섭리, pp.394~395).


그분이 정말 과거의 잘못을 회개하였으면 총신대 교수들을 고소하였을까?

그리고 책 가운데 이런 글을 썼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뿐만 아니다.

그의 책 가운데에서 직접적으로 과거의 통일교 사상을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그 흔적으로 보기에 의심할 만한 것들은 있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그가 족보를 경건의 족보로 보고 있는 전체적인 내용이 그 사상과 관련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는 족보를 경건의 족보로 보는 가운데 “가인은 소속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창세기의 족보, p.76)라고 한 것이나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로서 셋을 주어 위로와 소망을 주셨습니다”(창세기의 족보, p.131)라고 한 것 등은 얼마든지 그의 ‘씨앗 속임’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것들이 사실이라면, 그의 책 속에는 아직도 여전히 통일교 사상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그의 책은 ‘구속사 시리즈’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구속사적인 해석을 해놓은 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 출처 : 교회와신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