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도운동, 참된 교회성장에 걸림돌”노득용 목사의 릭 조이너의 예언사역에 관한 비판적 연구(3) http://www.kportal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749기독교포털뉴스 신학대학교의 학위 논문을 검색하던 중 눈에 띄는 게 있었습니다. 릭조이너의 예언 사역에 관한 비판적 연구였습니다. 신사도운동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뿐 아니라 신사도운동의 12사도중 한명으로 불리는 릭조이너를 특정해서 비판했다는 점에서 매우 가치 있는 논문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 사이트에는 서론 부분을 뺀 나머지를 중심으로 3회에 걸쳐 요약·연재합니다. 논문게재를 허락해주신 노득용 목사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본 논문은 ‘신사도운동과 릭 조이너(Rick Joyner)의 예언사역에 관한 비판적 연구–개혁신학적 입장에서-’라는 제목으로 숭실대학교 기독교학대학원 신학석사 논문으로 2008년 6월 제출됐습니다. 시간이 지났지만 신사도운동을 이해하는데, 특히 그들의 예언사역의 허상과 릭조이너라는 핵심 인물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글입니다. <편집자주> 피터와그너
제 4 장 신사도운동과 릭 조이너의 예언사역 비판
4.1.1 예언의 어원적 의미 예언은사는 성령이 자기 어법으로 직접 말하는 성령의 나타남이다. 예언의 사전적 의미를 먼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4.1.1.1 나비 반면에 하나님이 주신 기별이나 영감없이 “자신의 마음에서 나온 말”을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처럼 사용하는 사람들을 “거짓 선지자”로 간주한다(렘 23:16,26 참고).136) 4.1.1.2 프로페테이아(προφητεια) 이에 대해 개혁신학자 김동수는 예언의 미래적인 측면보다는 현재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예언을 하나의 설교 또는 가르침과 동일시 하지는 않는다. 그는 신사도운동가들이 예언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첫째 대언은 본래 초자연적인 성격의 것인데 자연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둘째 가르침이나 설교에는 대언이라는 중요한 의미가 없다. 셋째, 세대주의자들이 공통적으로 범하는 세대분류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주님은 세대를 이 세대와 오는 세대로만 분류하셨다(마 11:16). 그리고 신학적으로 볼 때도 구약시대, 신약시대, 그리고 오는 시대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세대주의 자들은 전혀 성경의 근거가 없는 사도시대를 특수한 시대로 보는데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140) 4.1.1.3 프로페미(prophemi) 4.1.2 예언은사에 대한 신학적 두이론 4.1.2.1 예언은사 중단론 4.1.2.2 예언은사 계속론 그런데 오늘날 이와 유사한 은사운동이 여러 지역에 파급되었다. 이런 연유로 은사의 계속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시각은 부정적인 경향으로 흐르게 되었다. 피터 와그너는 신사도운동의 뿌리를 1830년대 영국의 에드워드 어빙(Edward Irving)의 주도한 소위 어빙파(Irvingtes)라고 말한바 있다.150) 성령은사에 대한 시한성에 대한 접근 방법은 각자 가진 신학적인 관점에 따라 다양하다. 오순절주의 계통과 신사도주의운동에서는 회심 뒤에 오는 두 번째 단계로서 영적인 능력과 체험적인 ‘성령세례’를 주장한다.151) 개혁주의 입장에 선 마이클 그린(Michael Green)은 신약교회에도 예언자들이 많이 있었고, 널리 퍼져 있었음을 지적하며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 가운데에서 예언이 계속될 것을 예고 하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마 10:41). 그러나 그린(Green)의 예언의 정의는 앞서 논의한 오순절 계통이나 ‘일부’ 복음주의 자들의 정의와는 다소 다른 점이 있다. 그가 말하는 예언의 특징은 예언을 행하는 사람으로 개인이나 선지자 집단을 포함하고, 예언의 기능은 ‘미래 예언’만이 아닌 특별한 직무 부여, 예수에 대한 증거, 전도, 건덕, 안위, 교훈 등 다양하다. 예언은 소위 ‘황홀경 상태의 말’이 아니다152) 라고 말하고 있다. 그 동안 계속론자의 입장은 역사적으로 압박을 받아 왔다. 오순절 계통, 신사도주의자들, ‘일부’ 복음주의 자들은 예언을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성경의 기자와는 ‘다른 권위’를 가진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예언자들의 오류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다. 4.2 신사도운동에 대한 개혁신학적 비판 4.2.1 신사도운동의 신(新)사도직 비판
교회사를 볼 때 1832년 문체에서, 1860년에 죽어서 공석이 된 사도를 채우기 위한 사도의 지정을 둘러싸고 논쟁이 있었다. 진정한 교회에서는 반드시 12사도가 있어야 한다고 고집하기 때문에, 함부르크의 스와쯔 주교는 1862년에 새사도 선출을 제안했다는 이유로 O. A. C. 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그 후 프레유스라는 목사가 스스로 ‘예언의 영감을 통해서 사도의 직’을 맡았고, 파문당한 스와쯔 주교는 자신이 사도의 직을 맡을 때까지 프레유스 목사 밑에서 봉사했었다. 이후 이와같은 신사도교회는 유럽으로부터 미국으로 퍼졌다.155) 그러나, 신사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에베소서 4:11에 나오는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라는 오중사역은사(5-fold Ministry gifts)라는 것에 대해서 개혁신학자인 로이드 존스(David Martyn Lloyd-Jones)는, 교회 안에서 일시적으로 존재하였던 어떤 직책들과 교회에 영구히 존속하고 있는 직책으로 구분한다.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직책들에는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전하는 자의 직책이며, 영구히 존속하는 집단에 속하는 직책으로는 목사와 교사를 지칭했다.156) 개혁신학자인 로이드 존스(David Martyn Lloyd-Jones)는 “사도”의 자격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본 자로서 주님에 대한 증인(고전 9:1; 15장)이 되어야 하며,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고 임명받은 자로 보았다. 또한 진리에 대한 초자연적인 계시를 받은 자로서(엡 3:2-3; 10-12) 사도적 권위뿐 아니라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자로서(고전 4:16, 빌 3:17)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자라는 것이다(히 2:4, 요 14:2). 이러한 조건으로 보면 사도직이 계승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히 사도행전 12장에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헤롯왕에게 죽임을 당하는데 그의 계승자가 임명되지 않았음을 볼 때 사도직이 임시직임울 알 수 있다. 교황제도는 이것을 오해한 데서 기인한 것이다.157) 개혁신학자 박윤선도 “사도는 기독교 설립의 기초 성직으로서 예수님이 직접 택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단회적으로 교회 창설기에 있었고(고후 12:12), 그 후에는 계속되지 않는다(엡 2:20)"158)며, 개혁신학적 입장을 명시하고 있다. 루이스 벌콥(Louis Berkhof)도 로이드 존스(David Martyn Lloyd-Jones)와 마찬 가지로, 사도의 직분은 신약의 선지자들과 더불어 교회를 세우는 터(마 16:8, 롬15:19-20, 엡 2:20)로서, 특별한 일시적인 직분으로 본다. 루이스 벌콥은 사도들 가운데 회심한 바울을 예로 들면서 사도의 자격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사도들에게는 천국 복음전파의 사명이 있었고(마 10:7 , 막 3:14, 눅 9:2, 롬 1:1, 갈 1:11, 고전 15:3-4), 둘째는 병고치는 권능이 있었으며(마 10:8, 막 3:15, 눅 9:1, 행 19:11-12) 셋째는 부활의 증인들이었고(행 1:22, 2:32, 고전 15:8, 15), 넷째는 성령으로 충만하고(행 2:4, 9:17), 다섯째 성령과 권능으로 표적과 기적들을 행하였다(행 2:43, 5:12, 14:3, 고후12:11-12). 159) 고 제시한다. 바울은 자기의 경우 이 조건에 부합한다고 보았다( 고전 9:1; 15:8, 9; 행 9:3-8 등). 특히 바울은 디모데를 자신의 후계자라고 생각하였으나, 디모데를 결코 사도라 지칭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사도권 계승”이라는 개념을 부인한다.160). 오늘날에는 “사도적인 사역”은 존재한다 할 수 있으나 “사도라는 직임”은 종료되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사도시대의 역사를 가리켜 터 닦는 일로 비유하였다. 고전 3:10에 말하기를, 교회의 “터를 닦아두었다”하였고, 11절에 말하기를, “이 닦아둔 것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교회는 이 터 위에 서게 되는 것이다(엡 2:20; 계 21:14). 지금은 사도시대처럼 교회의 터를 닦는 시기가 이미 지나간 시기이다. 4.2.2 신사도운동의 신(新)선지자직 비판 개혁신학자 칼빈도 『기독교 강요』에서 선지자직의 소멸을 말하고 있다. 구약의 선지자들과는 별도로 예수 그리스도는 선지자들을 세워(행 11:28, 13:1-2, 15:32, 고전 12:10) 하나님의 비밀 계시를 알게 하였고(엡 3:4-5), 미래에 되어 질 일들을 미리 알게 하였으며(행 11:28, 21:8-11), 그들을 교회 미래에 되어 질 일들을 미리 알게 하였으며(행 11:28, 21:8-11), 그들을 교회의 터로 삼았다(엡 2:20). 이 선지자들은 성경이 기록된 후로 교회에서 소멸되었다.162) 또한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 왕국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로서 역할을 잘 감당하도록 하는데 가장 우선적인 역할을 했다. 그들은 유대민족의 운명과 주변국들의 운명에 대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미리 말하였다. 이들의 예언은 구속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선지자는 구약의 선지자와 예언의 연속선상에서 말하지 않고 있지만,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자 혹은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는 자의 기본적인 역할을 하는 구약의 기본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신약의 선지자의 역할은 단순히 개인의 미래의 운명을 점치는 점쟁이(fortuneteller)의 역할은 아니었다.163) 신약시대의 선지자직은 성경이 기록되는 과도기적 상황 속에서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직임이다. 그러므로 이제 사도들의 가르침과 사도성이 있는 성경을 신앙과 교회의 진리의 터로 삼고 믿음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 선지자의 역할을 가장 잘 나타내는 구절은 에베소서 2장 20절의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의 돌이 되셨느니라”이다. 이 본문에서 선지자의 역할은 하나님이 말씀을 가지고 모퉁이 돌이신 그리스도의 진리의 터 위에 교회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런데 신약의 선지자중 개인의 미래를 예언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것은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천하에 흉년이 들 것이라는 것(행 11:28)과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할 것(행 21:11)대한 예언이다. 이 경우도 자세히 살펴보면 아가보의 경우 예루살렘 교회가 극심한 가난을 극복하기 위한 준비를 미리 할 수 있도록 해준 것으로 교회의 존립과 직결되는 것이다. 바울에 대한 예언은 바울이 그 예언을 들었지만 그것을 무시했다는 사실이다. 비록 예언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한 것이라 할지라도 복음전파가 최우선이고, 복음전파 사역을 전개해 나가는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신사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경 형성시기에 존재했던 ‘사도와 선지자의 직분’은 정경이 완성되고 난 이후에는 그 자격과 역할로 인해 초대 교회역사 안에서는 사라졌다고 봐야 한다. 사라진 직분의 속성들은 영구히 존재한 직분에 편입되어 그런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하겠다. 그러므로 신사도주의자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를 받는다는 현시대의 사도와 선지자들의 주장은 주관적 환상체험과 예언에 불과하며, 비성경적이라 할 수 있다. 4.2.3 신사도운동의 은사주의 비판 신사도교회는 교회의 전통과 개혁주의 교단들과 전통적인 교단들을 부정하고 새로운 교회 체계를 추구하고, 사도직을 성령의 권위를 내세워 강조함으로써 절대적인 권력을 개인에게 위임하고 있다. 또한 사도라 칭하는 권위자는 자신이 성령의 권능을 받은 특별한 존재로 인식함으로써 개인의 비전과 목적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공동체 안에 적용함으로써 상당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개혁교회는 개인이 권력을 가질 때 성경적 교회론을 실현시킬 수 없고 부패함을 교황정치의 선례를 통해 경험하게 되었다. 신사도운동의 권력구조는 개혁교회에서는 인정할 수가 없다, 4.3 릭 조이너의 예언사역에 대한 개혁신학적 비판 즉 성경에 그러한 신비적 체험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오류가 없다는 것이다. 즉 성경시대에 있었던 ‘동일한 성령님이 성경 안에 나타난 사건과 같이 동일’한 방법으로 이 시대에 역사하고 있으니, 정당하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성서기자들의 체험은, 정경형성의 목적을 위한 하나님의 한시적인 초자연적역사라는 사실을 간과한 주장이다. 만일, 이 시대에 성경에 나타난 예언과 계시적 사건이 지금 계속해서 발생한다면, “또 다른 하나님의 말씀”이 쓰여 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곧 성경의 유일사상에 배치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 제기에 대하여 릭 조이너는 ‘현재적 예언적 계시는 성경과는 다른 계시’라고 주장하는 모순적인 말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개혁신학은 성경을 통하여 성령과 그의 사역인 이적과 기사를 이해하려고 하지만, 릭 조이너는 성경(text)을 그의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지 않고, 상황(context)을 그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개혁신학 사상은 신구약성서를 신앙과 사고와 행위의 최고 규범과 권위가 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개혁신학 사상의 가장 중요한 원리이다. 개혁신학 사상이란 일차적으로 신조(creeds)나 신앙고백(confession)에 집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교회 전통이 물려 준 신조나 신앙고백의 타당성을 성경의 빛 앞에서 비판적으로 수용한다. “성서만(sola scriptura)”이 개혁신학 사상의 최고의 권위이다.164) 특히, 개혁신학측인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이승구는 “성경 이외에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오늘날에도 지속적으로 계속된다는 생각은 그동안 장로교 신학과 정통신학에서 주장해 온 바에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신약 예언자(선지자)들의 영감이 그쳐졌으므로 선지자직도 그쳐졌고, 선지자적 직임은 “가르치는 직임” 속에 편입됐다며, 한마디로 “오늘날에는 예언자(선지자)가 없고, 오직 성경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 개혁파 신학에서 주장해 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존 칼빈(John Calvin)도 기독교 강요에서 직분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 교회 정치를 주관하는 사람들을 바울은 첫째로 사도, 다음은 선지자, 셋째는 복음 전하는 자, 넷째는 목사, 끝으로 교사라고 부른다(엡4:11). 이중에서 끝에 있는 둘만이 교회내의 평상적이요, 처음 셋은 주께서 그의 나라의 초창기에 세우셨다.165) 그러나 신사도주의자들은 스스로 “사도요, 선지자”라 하고 있다. 이에 대한 교계의 많은 비판의 소리가 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예언자들이 있다”고 하는 주장은 다시 말해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주어진다”고 하는 것이므로, 이는 “가장 세련된 형태로 제시되고 있는 직통 계시파의 목소리”라는 것이 신사도운동의 잘못을 지적하는 이들의 주장이다. 4.3.2 릭 조이너의 예언은사에 대한 개혁신학적 비판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의 개념은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가 주장했듯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앞장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뜻과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을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다. 성경속에서 예언이 간혹 개인의 미래운명을 예고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결부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언자는 하나님의 입장과 계획을 선포하고 그 명령을 전달하는 자이다.167) 이러한 예언은사를 주신 이유는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몸된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어진 것이다. 또한 다른 성령의 은사도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해 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이를 두고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이승구는 “성경 이외에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오늘날에도 지속적으로 계속된다는 생각은 그동안 장로교 신학과 정통신학에서 주장해 온 바에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신약 선지자(예언자)들의 영감이 그쳐졌으므로 선지자직도 그쳐졌고, 선지자적 직임은 ‘가르치는 직임’ 속에 편입됐다”며, “한마디로 ‘오늘날에는 선지자가 없고, 오직 성경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 개혁파 신학에서 주장해 온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169) 그러나 신사도주의자들은 오늘에도 예언이 있을 수 있음을 말하면서, 에베소서 1장 17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라는 말씀을 인용한다. 그러나 에베소서 1장 17절은 “지혜와 계시의 영”이 모든 그리스도인(너희)에게 충만하여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소위 제한된 의미의 예언자들에게만 있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본문을 주로 목회자와 소위 ‘예언자’들에게만 제한해 생각하는 것은 신사도운동가들의 ‘성경 주해의 자의성(恣意性)’을 잘 드러내 준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겠다는 요엘 2장 28-30절의 예언이 자신들의 공동체에 성취되었다고 여겼다(행 2:17-18).170) 개혁신학적 입장에서 예언의 은사는 영감(spritual)된 권위의 본질상 차이와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사도직은 특수한 성격상 교회 창설과 예언의 창설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하는 기초 작업을 담당했다. 특히 예언의 은사와 같은 계시적인 은사들은 부분적인 것이기에 사도시대를 거치면서 정경이 완성되자 완전히 사라졌다171) 이러한 예언적 계시에 대하여 박윤선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예언사역은 사도의 사역처럼 계시시대(사도시대)에만 있었던 단회적인 것이다. 교회시대에는 예언의 후신으로 설교가 자리 잡았다. 현대교회에도 사도시대의 것과 같은 예언이 있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 우리가 이런 주장을 아주 부인할 수는 없다.172) 위와 같이 개혁신학자인 박윤선은 “예언의 은사는 계시 때에만 있었고, 단회적인 것이며 교회시대에는 예언의 후신으로 설교가 대신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주장하는 이유는 “설교와 예언의 기능이 같기 때문이며, 예언의 권면, 권덕, 단위(單位)를 그 기능으로 한 것처럼(고전14:3) 설교도 그러하다”는 것이다.173) 또한 개혁신학자인 웨스트민스터의 신약학 교수 리차드 개핀(Richard B.Gaffin)에 따르면 사도시대는 ‘정경개방’(open canon) 시대로서 정경이 확정되기 전 자료형성기였다고 보았고, 교회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활동하던 그 창설시기에는 ‘충분한 성경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이다.174) 그리고 개혁신학자인 도날드 메크레오드도 예언은 정경의 발전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정경이 충분하지 못할 때 일시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본다. 그런데 “정경이 완전한 오늘날은 성경속에서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찾을 수 있음으로 더 이상 필요가 없다”175)는 주장이다. 그러나 신사도주의자 윌리스 헤플리(Wallace H. Heflin, jr)는 “ 예언은 장래 일 뿐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일 모두를 총망라 한다176)”라고 말하고 있다. 한 사람에 대한 모든 과거, 현재, 미래를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알아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윌리스 헤플리는 영문 성경 번역본에 “예언”(prophecy)라는 단어를 “설교”(Preaching)으로 번역한 것을 지적하며, “설교는 예언이 아니다”177)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개혁신학자인 윌리암 바클레이는 그의 고린도전서 주석서에서 “예언의 은사”를 “설교의 은사”로 번역하는 편이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178)고 주장을 한다. 이에 대해 윌리스 헤플리는(Wallace H. Heflin, jr) “설교가 본질상 예언의 요소 개혁신학측 나사렛 대학교 구약학 교수인 강수명은 “히브리 사람들은 예언자를 ‘말하는 자’(Speecher=sprec hen), ‘외치는 자’(refer=r.fen) 또는 ‘고하는 자’(Vek.ndigen)로 해석한다. 지금까지는 아라비아어 Nabaa(나바아), 즉 ‘거품을 뿜으면서 말하리라’로 추측 해석했으나, 근래에는 바벨론어 Nabu(나부), 즉 ‘부르다’에서 Nabi로 ‘부름을 받는 자’(The called)로 해석 한다181)”. 즉 소명(calling) 받은 설교자는 예언자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개혁신학자인 도날드 메크레오드는 “사실상 예언의 은사가 멈추어졌다는 사실을 확신있게 주장 할 수 있다182)”며, 예언의 은사를 현대적인 설교에 적용시켜 설명하고 있다. 그의 주장을 빌리자면 “예언은 사도의 지위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터를 닦는 시기 동안에 선지자들(구약의 선조들과 마찬가지로)이 나중에 성경의 일부가 된 내용을 만들어 냈으며, 교회가 부족함이 없는 성경을 만들어 낼 때까지 예언은사는 계속되다가 그 시기 이후에는 더 이상 지속되지 않았다”는 설명이다.183) 뿐만 아니라, 신약 자체 내에도 예언은 일시적인 것으로서 고린도전서 12-14장에 나타난 교회론에 언급되어있으나 바울의 후기 서신인 목회서신(디모데서, 디도서)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고, 요한 일서와 같은 나중의 문헌에도 없는 것을 볼 때에 경전이 마무리되기 전에 다른 것으로 대처 되었다는 것을 암시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원과 관계없는 예언은 성경 66권으로 끝났다고 볼 수 있다. 에베소서 3:3-5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즉 성경만 읽어도 하나님의 계시를 알 수 있고, 다른 세대에는 사람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교회 안에는 현대판 선지지자들 때문에 혼란을 거듭하고 있다”.185) 이윤근은 “현대판 선지자들이 하는 예언은 예언이 아니요 영감과 육감을 동원하여 추측한 것에 불과하다”186)고 말한다. 그리고 차영배는 환상과 꿈으로 나타나는 부분적이고 개인적인 예언이 오늘날 아주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과 더불어 직접 나에게 계시하시는 성령의 역사와는 비할 수 없다. 우리는 성경으로 충족하기 때문에 다른 예언이 필요 없다187)고 하였다. 이와 동일하게 개혁신학자인 존 스토트(J. Stott)도 선지자의 예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성경에 있어서 선지자는 본래가 미래를 예언하는 자나 정치적인 논평가나 활기 찬 설교가나 더 나아가서 권면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입 곧 새로운 계시의 도구이다...., 또 그런 의미로 볼 때 (그것의 부차적인 의미와 사명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는 그것들이 더 이상 교회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188) 워필드나 개핀이 주장하는 은사 중단론 역시 존 스토트의 견해와 같다. 정경이 완성되면서 그것이 중단되었다는 것이 개혁신학 입장이다. 4.3.3 릭 조이너의 ‘예언사역은사’에 대한 개혁신학적 비판 이에 대하여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도 『고린도서 강해집』을 통해 “이 지혜는 최고의 지혜로서 하나님 자신에 관한 지식이다. 인간의 사고나 지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혜이다190)”라고 말한다. 개혁신학자 최성규는 다음과 같이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설명하고 있다. 지혜의 말씀의 은사는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아 전하는 것입니다(고전 2:6-7). 여기서 하나님의 지혜는 "지혜롭다"고 말할 때 의미하는 세상에서의 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바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결국 지혜의 말씀의 은사는 예수님에 대해서 지혜롭게 증거하는 은사입니다.191) 또한 개혁신학자 이윤근은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케 하는 은사(잠언9:10)”, “하나님의 권고를 듣게 하는 은사”(잠12:15). “하나님 앞에 성결케 되는 은사” (약3:17)라고 설명하고 있다192). 결론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을 따르는 학자들의 견해는 지혜의 말씀의 은사는 어떤 미래사에 대한 사건 해결의 해답을 얻고 그것을 처방 하는 것이 아니라‘하나님을 바로 아는 지식, 하나님의 뜻을 하는 지식’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능력’으로서, 그 초점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앎’ 의 은사이다. 4.3.3.2 지식의 말씀은사에 대한 개혁신학적 입장 결론적으로 지식의 말씀의 은사는 어느 개인의 신상이나 어떤 일에 대해서 초자연적으로 알아맞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을 성령의 은사로 조명 받아 탁월하게 바로 깨달아 알아 남들에게 유익하게 잘 가르칠 수 있는 은사이다. 그러므로 지혜의 말씀 은사와 지식의 말씀의 은사는 공통적으로 예언의 은사가 아니라 ‘말씀의 은사’ 이다. 이 ‘말씀’은 예언자들이 주장하는 ‘직통계시로 받은 말씀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계시로 완성된 성경말씀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올바로 통찰하여, 그 영감 있는 말씀으로 인간 본질을 진단하여 고치며, 변화시키는 데 사용하는 은사이다. 정보를 알아내는‘지식의 은사’가 아니라 말씀을 바로 알게 하는 것이 ‘지식의 말씀의 은사’이다. 4.3.3.3 영분별은사에 대한 개혁신학적 입장 이 사건은 성령이 충만하였던 사도 베드로가 ‘사단, 즉 악령이 가득찬’198) 아나니아의 상태를 직접 본 경우의 은사로서 영분별 은사이다. 또한 이윤근은 영분별 은사는 “거짓 선지자를 가려내는 것”(마7:15-20), “거짓 이적을 가려내는 것”(마24:24), “거짓 복음을 가려내는 것”(갈1:8)이라고 말하고 있다.199) 이에 대해 칼빈은 ‘영들 분별함’은 스스로 중요한 인물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을 “일상의 상식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특별히 예리한 각도에서 재어 볼 줄 아는 영적인 판단력”이라 했다. 이것은 “소수의 신자들에게 하나님이 부여한 은사로서 그리스도의 참된 사역자와 거짓된 사역자를 선명하게 분별하는 은사”로 말하고 있다.200) 이러한 은사에 대하여 차영배는 “신약 성경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구약을 제외하고는 객관적인 판단기준이 되어줄 기록된 말씀이 없었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완성과 함께 영들 분별의 은사는 그 필요성이 적어지게 되었다”고 설명한다.201) 다시 말하면, 이 은사는 계시의 기록인 성경이 완성되기 이전에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영분별의 은사가 주어지지 아니했다 할지라도 속이는 영, 거짓 영에 대하여 바로 분별할 수 있는 진리의 표준인 성경을 통해서 가능하며, 열매를 보아서도 악령의 역사를 판단 할 수 있는 시대이다(갈 5:22-23). 릭 조이너는 이러한 은사들은 각각의 독립된 은사이기 보다는 예언사역을 위한 은사로 간주하기 때문에 각 ‘은사의 독립성’을 훼손하게 된다. 성령의 은사 중 일부라도 예언사역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상호보완 하는 관계로 존재하는 것이다. 구원의 진리를 증언하는 하나님 말씀사역을 위해 은사들이 필요한 것이며, 교회사역과 봉사를 위해 각 은사의 고유한 목적이 있다. 결코 그 어떠한 은사도 예언사역을 위한 은사가 아니다. 제 5 장 신사도운동과 예언사역의 장단점과 제언 문태성에 따르면 신사도운동의 긍정적인 면은 신앙생활에 대한 “성도들의 적극적인 참여도를 증폭”시켜,202) 예배에 집중하게 만들고, 모든 “교인들의 자원을 개발한 것”이다. 그래서 각 평신도들이 다양하게 은사별 사역을 감당하도록 해준 것이다. 이러한 각 성도들의 은사개발과 적극적인 예배자로서의 삶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또한 신사도운동은 문화사역에 많은 도전을 준다. 현대적 기기를 동원하거나, 좋은 음향 시설, 영상 등을 사용하는 것은 기존 교회들에게도 보편화된 현상이다. 이러한 현대적 기술들의 접목은 메시지 전달에 있어서 좋은 효과를 주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문화를 사용하여 “불신자들을 교회로 불러들이는 방법론에 있어서 그들은 접촉점”을 잘 활용하고 있다.203) 그리고 신사도운동은 목회자의 리더십에 영적은사(예언사역)를 더함으로 영적 열매와 교회성장에 큰 성과를 얻을 수 있다. 이 운동은 성도들로 하여금 “영적인 관심”을 갖게 하고, 기도하도록 “성도들을 깨우고 마음에 불”을 붙여준다204). 신사도운동은 “성령 충만한 지도자와 성도들을 만들어 내고, 성도들과의 하나 되는 교제와 하나님과의 산 교제”를 갖게 만든다.205) 신사도운동에서 추구하는 성령의 체험은 한 사람의 개인적 갱신을 가져오고, 기사와 표적을 통해 나타나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는 교회공동체의 부흥과 갱신을 가져오기도 한다. 이들이 추구하는 “은사 사역은 초대교회의 일상적인 사역에서도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206) 5.2 신사도운동과 예언사역의 단점 결국 신사도 운동은 ‘직분에 대해 잘못 해석함’으로써 은사론의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사도시대의 ‘한시적인 직분’을 현대에 적용함으로써 은사론이 ‘능력중심의 신앙’으로 변질되었다. 그러므로 신사도운동은 성도의 재능과 은사를 개발하는데 탁월한 면이 있지만 잘못된 은사론과 능력 중심의 신앙으로 빠질 위험이 있다. 또한 신사도주의자들은 기존 교단을 “낡은 가죽부대”라고 묘사하면서, 전통교회는 현대 사회와 문화에 적합하지 않는 “17세기 이후의 교회 체제를 아직도 유지하고 있으며, 이제는 이러한 교회체제가 현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과 양육하는 일에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한다.209) 그런 의미에서 자신들이 속한 신사도교회를 “새 가죽부대”라는 것이다.210) 그뿐 아니라 신사도주의자들은 기존교단에 강한 불신을 가지고, 전통교단은 ‘종교의 영’에 사로잡혀 있는 형식적 집단으로 여긴다. 특히, 교회성장에 있어서 부적절한 체제라는 판단을 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다양한 학자들에 의하여 주장된 것인데 한스 큉(Hans K.ng), 하워드 스나이더(Howard Snyder)등이 이러한 이론을 정립하여, 신사도운동을 새로운 교회 체제로 탈바꿈하기 위한 학문적인 작업들을 시도한 것이다.211) 신사도주의자들은 교회의 형식적인 모든 영역에서 현대문화를 적용시키는데 너무 관대하다. 신사도운동은 문화와 기독교가 매우 가까운 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문화를 적극 활용하신다는 견해를 취하고 있다. 신사도주의자들은 문화를 기독교와 별개의 것으로 보지 않았으며, 문화를 통해 그리스도를 전하는 도구로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음을 보여 주려 하였다. 이들은 그리스도와 문화의 긴장성이 존재함을 인정하면서도 교회와 문화 공동체 사이에 긴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러나 개혁주의 입장에서 볼 때, 성경이 말하는 세상은 악이다. 세상의 족속이 하나님의 대적이 되며(시17:14; 요15:19), 현 시대는 악한 세대이며(갈 1:4; 엡 2:2; 골 2:8), 이 세대에서 ‘세상적’이라는 말은 죄의 유혹됨을 가리킨다. 하지만 세상은 파멸의 대상인 동시에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자비와 사랑(요 3:16)을 통해 보존된다. 그런데 신사도교회의 문화관은, 이러한 세상의 악한 면조차도 수용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즉 세속화될 수 있는 요인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문화를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과 복음과 사랑의 봉사를 통해 세상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212) 또한 신사도교회의 단점으로는 은사운동을 통해 지도자의 지도력에 대한 절대적 권위를 부여함으로서 지도자의 권위에 반대할 수 없게 만들어, 지도자의 부패를 조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신사도교회 지도자들은 교회 제도권 안에서의 직분을 임직 받아 교회치리의 권위를 위임받은 것에 의하여 사역을 하려하기보다, ‘성령에 의하여 받은 초자연적이며 탁월한 능력을 수여 받은 자’로서의 사역자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사도라 칭함 받거나 선지자(예언자)로 불려지는 자들에게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독자적인 권력이 주어지는데, 그 권력은 견재 할 수 있는 길이 없다. 이로 인해서 교회재정의 상당부분을 개인적인 권위로 결재할 수 있으며, 장로들과 위원회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말 앞에 아무런 반대의견을 낼 수 가 없다. 그들은 교회 구성원들에게 이러한 사도적 지도력의 권위는 ‘성령’께서 직접 주시는 것으로 ‘개개인’에게 위임한 영적 권위라고 주장하며 ‘신뢰’하라고 꾸준히 강조하고 있다. 213) 이러한 시도는 16세기 종교개혁을 통해서 교황주의의 개인적인 권력구조에 대항하였는데, 다시 “사도라는 개인을 중심으로 한 초법적인 권력구조를 부활시키는 것”으로서, 개혁주의 교회론 입장에서도 수용할 수 없다.214) 개혁주의교회는 칼빈의 신학을 바탕으로 오직 하나님과 성경 중심의 신학이며, 교회론에 있어서도 개인권력의 위험을 알고 회중중심의 민주적인 정치 체계를 정립하였다. 신사도운동은 ‘사도’라는 직분의 정의에 있어서도, 대교회나 네트워크의 지도자를 명명하는 보편적인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그들이 처음부터 주장한 성령의 특별한 능력을 받은 지도자의 모습과 사뭇 다른 것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이러한 운동은 “피터 와그너의 연구 결과물이며 그의 사상이 대형교회들과 네트워크에 적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215) 신사도운동의 은사사역 문제점에 대해서 한스 큉(Hans K.ng)과 브리즈(D.Brdge)와 피퍼(D. Pnyper)는 “은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주어진 일상적인 것인데, 그것을 특별하고 기적적이고 감각적인 형상처럼 오해하기 때문에 오용될 위험이 있음”을 지적한다. 또한 은사는 여러 가지 임무 수행을 위해 주어진 것인데도, 오직 하나의 특정한 것으로 믿기 때문에 위험성이 있다. 그러므로 은사는 그리스도 몸 전체를 위한 것으로 어떤 특정한 계급이나 특정 신분의 소수에게만 한정된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신사도운동은 은사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생기는 신비주의 현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하고 자신의 체험만을 절대적으로 강조하는 신앙적 독선자”가 될 수 있다216). 또한 목회자의 지도를 거부하고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동을 하게 되고, 감정적 신앙생활로 흐르기 쉽고, 감정의 변화에 따라 신앙도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성도들이 이런 예언사역자들을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고, 기복신앙에 빠질 수 있으며, 특히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보다는 성령에게만 치우쳐 성부, 성자에 대한 무관심으로 변질 될 수 있다.217) 5.3 신사도운동과 예언사역에 관한 제언 이 오중사역은사는 교회에서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도록 하는 목적이 있다. 개혁교회에서도 은사에 따라 교회에서 새로운 직임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라 사료된다. 이러한 열린 의식을 가지려면, 먼저 사도직이나 예언은사 등에 대한 차등 있는 규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점을 제시하는 신사도주의자 마이클 비클218)은 『예언사역의 여정』에서 예언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왜 기록하여 성경 안에 포함시키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트리니티대학 신학부 교수인 웨인 그루뎀(Wayne Grudem)의 『예언의 은사』(The Gift of Prophecy)의 내용을 소개하며 설명한다. 그루뎀은 구약의 예언자들은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말하도록 부름을 받고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신약에서는 오직 열두사도만이 그와 똑같은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말하고 기록하였다. 모든 다른 예언들은 성령님께서 인간의 생각이나 마음속에 일으키신 어떤 것에 대한 보고로서 매우 인간적이며, 따라서 부분적으로 옳지 않을 수도 있었다.219) 마이클 비클은 그루뎀(Grudem)이 사도적 권위를 가진 자들에 의해 전해진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과 신약의 선지자들이 받은 ‘영감 있는 메시지’ 사이에, 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성경의 권위와 예언적 말씀”을 구분하며, ‘사도나 사도적 권위를 가진 자’와 ‘일반적인 신약의 선지자들’을 구분하고 있다. 그루뎀(Grudem)의 주장처럼 영감의 ‘본질적인 권위에서 차등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영감의 차등 있는 유형론’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 즉, 오늘날의 사도나 선지자, 예언은사 등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가진, 정경인 하나님의 말씀과 영감의 질이나 권위가 같은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내용’(general content)만 하나님의 지도를 받은 예언이다. 그루뎀의 주장은 구약의 선지자와 동일한 절대적 권위의 연속선상에 있는 부류는 신약의 선지자(예언자)가 아니라, ‘사도들’이다. 그러므로 “다소 낮은 권위를 가진 영감의 차등이 있는 예언”은 오늘날도 존재하며, 그것은 매번 성경을 통해 평가를 받아야 한다.220) 개혁신학적 입장에서도 완전한 신적 권위를 가진 ‘무오(無誤)’한 예언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검증받는 ‘유오(有誤)’ 함이 있는 ‘낮은 권위의 예언’을 수용함으로 정경을 부인하지 않고, 예언의 가능성에 문을 열어 놓을 필요성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성령의 은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며, 교회 성장의 원동력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성령의 은사에 대한 그릇된 사고는 성령에 대한 오해에 의해서 기인하는 것이다. 칼빈은 고린도전서 12장-14장의 신령한 은사에 대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바울의 말로부터 고린도 신자들이 여러 가지 다르고 서로 보완하는 영적 은사들을 얼마나 충분하고 충만히 가졌는지 추론할 수 있다. 우리는 오늘날 이러한 은사의 결여와 전적인 결핍성을 슬퍼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감사하지 못함에 대한 정당한 매다. 하나님의 보화창고는 아직도 비어 있다, 그의 자비는 적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은사에 합당하지 않고 그의 자비를 받지 않으려 한다.221) 칼빈은 고린도교회에 주어진 각종 은사가 오늘날 중단되었다고 보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은사가 오늘날 우리 가운데 결여 되어 있는 것은 우리가 믿음이 없고, 은사를 수용할 태도가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김영한은 오늘날 특히 개혁교회내에 성령의 은사가 메마르고 있다는 사실을 칼빈처럼 슬퍼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222) 이러한 칼빈의 대를 잇고 있는 개혁신학자들 가운데 김영한, 차영배, 바빙크 등은 은사의 영속성을 주장하고 있다. 개혁신학자인 김영한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개혁신학은 교리에 얽매여 메마르며 성령의 역사를 간과한 지성 주의적이고, 주지주의적인 신학으로 알려져 왔음을 지적한다. 결국 이러한 메마른 성령 이해는 루터나 그의 계승자인 칼빈의 전통에서 떠나 역사적 과정에서 변질된 사상이라고 말한다.223) 이와 같이 오늘날 미국개혁 교회도, 사도시대와 더불어 기적과 초자연적인 은사가 그쳤다는 위필드를 대표로하는 구(舊)프린스톤 학파의 견해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방언 등 “성령의 은사에 대해 좋을 수 있다”는 긍정적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224). 이런 맥락에서 김영한은 “카이퍼의 오순절 성령강림의 단회성 주장은 오순절 성령 강림을 구속의 유일한 역사적 사건(eventurm historicurm unicum remisionis)으로 봄으로써,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단일회성’(once for all)이 갖는 대표의 원리와 혼동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십자가와 부활의 유일한 구속 사건과 같은 객관적이고, 법적인 대표의 원리를 오순절 사건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구속의 사건은 단일회적이나 성령의 역사는 영속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김영한은 “역사적인 오순절 사건이 다시 되풀이 될 수는 없으나 오순절에 임한 동일한 성령이 오늘날 교회에도 역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설명했다.225) 개혁신학자 차영배도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을 사도들이 우리들을 대신하여 받음으로써, 우리들이나 또는 그날 회개한 3,000명의 성도들이 성령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신학의 은사론에 대한 방향은 성령의 생동적 사역을 향하여 열려야 한다. 오순절 신학이나 성결교 신학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성령이 주시는 기쁨과 자유 속에서 누리는 생동적 체험이 결여된 것을 겸허하게 수용해야 한다. 화란 개혁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도 개혁신학이 성령의 구체적인 체험이 빈약한 것을 시인하였다. 후기의 어그스틴도 『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God) 22권 8장에서 마찬가지로 “초자연적인 성령의 생동적 역사가 오순절 이후에도 지속하고 있음”을 그의 목회 경험과 관련하여 강조하고 있다.226) 다만 어거스틴은 초대교회의 기적과 오늘날의 기적의 차이를 “알려짐의 영역” 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초대교회는 어느 곳에서나 모든 회중에게 알려졌다면, 오늘날의 기적은 어느 제한된 지역 안에서만 일어나는 사건으로 국한된다는 사실이다.227) 그러므로 개혁신학의 성령론은 체험보다 하나님 말씀을 강조하는 개혁 신학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생동적 성령사역을 수용하고, “성령의 신학”을 “말씀의 신학”과 병행하여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성령의 은사론도 이해하여야 한다. 개혁신학은 개인의 마음에 중생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사역만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의 다양성을 통한 창조의 보존, 이성과 양심, 중생과 성화, 교회와 선교, 문화와 역사에 일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연구되고 강조되어야 한다. 동시에 성령의 은사뿐만 아니라 성령의 열매론을 더 중요하게 다루어 균형을 이루도록 제시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 김영한도 “교회는 이 세대가 상실하고 있는 하나님 말씀을 바르게 들려주어 역사와 시대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한다”고 한다. 그것은 “성경의 권위를 복권시키는데서 출발하며, 좀더 시대에 맞는 학문적이고 포괄적인 성경관을 정립하여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228) 제 6 장 결 론 이와 같이 피터 와그너가 주장하는 신사도운동은 대략 오중사역은사(5-fold Ministry gifts)에 기초한 세 가지 특징을 갖는다. 첫째, 사도직분의 현존성이다. 신사도운동은 초대교회 시대의 은사들과 직분들을, 현존하는 교회의 은사와 직분과 동일시하고 있다. 더 자세히 말하면, 신사도주의자들은 “사도직은 현시대에도 존재하는 직분”으로써, 성령의 권능과 특별한 은사를 받은 자가 성령의 계시를 받아 교회를 이끌어 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사도직은 초대교회 당시 특별한 목적을 위해 한시적으로 존재하다가 정경의 완성 이후 사라졌다는 개혁신학 입장과 상충된다. 개혁주의신학은 ‘사도’와 ‘선지자’의 직분과 그에 대한 은사는 특별계시의 기록이 완성되기 이전 단계에서 활동하도록 허락된 것이며, 더 이상 지속되거나 계승되지 않은 임시적인 직분(extraordinary office, 혹은 temporary office)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초가 되셨으며, 사도와 선지자들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의 터 위에 세워진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와 신약의 사도는 성령의 은사에 따라 하나 님의 말씀을 정리하기 위해 특별한 시대에서 특별하게 쓰임 받은 일시적이고 시대적인 직분이다. 둘째, 선지자(예언자) 사역의 현존성이다. 신사도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신비주의적 영적체험을 통해 예언을 한다. 이런 예언사역을 하는 선지자직의 현존성을 주장한다. 신사도주의자들은 선지자(예언자)의 현존성을 정당화 하기위해, 성경에 기록된 사도들의 계시 체험과 동일시한다. 성경에 기록된 그들과 같은 방법으로 예언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바울이 “셋째 하늘”에 갔던 체험(고후 12:2~3)을 인용하며, 자신들도 이와 같은 영적경험들을 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바울이 “셋째 하늘”에 갔던 체험은 바울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그렇게 되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신사도주의자들은 이러한 체험을 갖기 위해서, 인간의지로 간절히 추구하며 매달린다. 이런 점에서 신사도주의자들의 신비체험과는 다르다. 베드로가 경험했던 “비몽사몽”이라는 것도(행 10:10) 사람의 소원으로(혹은 계획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요한이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된” 사실(계 1:17)은 주님에 대한 계시를 본 뒤의 일어난 모습이고(계 1:12~16), 계시를 보기 위한 방편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신사도주의자들과는 다르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다니엘도 먼저 계시를 본 뒤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어 깊이 잠들었고”(단 8:16-18), 천사가 그에게 다시 말씀한 것도, 그가 잠든 동안에 된 일이 아니라, 그를 “일으켜 깨운 후에 된 일(단 8:18)”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성경적 계시는 사람이 정상적으로 깨어있는 때에 받은 것이다. 그러나 신사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신비 체험들은 이와 반대로, 모두 다 “계시를 보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 문제이다. 이에 대해서 개혁교회는 전통적으로 성령강림의 단회성을 주장하며 기적의 은사들은 사도들의 시대와 함께 끝났다는 “은사 중단론” 견해를 취해왔다. 카이퍼(A. Kuyper), 워필드(B. B. Warfield), 호크마(A. A. Hoek듬), 던(J. D. G. Dunn), 개핀(R. Gaffin) 등이다. 워필드는 1918년 『가짜기적』(Counterfeit Miracles)에서 “기적을 일으키는 교회들”(a miracle-working church)은 사도적 교회에 합당하나, 기적적인 종류의 영적 은사들(charismata)은 “사도적 교회와 함께 불가피하게 지나가 버렸다”고 말했다. 이들의 주장은 여러 은사는 사도 시대에 터를 닦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은사로 규정하며, 정경이 완성되면서 그쳤다는 주장이다. 그 근거로 고린도전서 13장 8절의 “온전한 것이 올 때 부분적으로 행하던 것이 폐하리라”는 말씀을 제시한다. 여기서 온전한 것이란 완성된 정경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선지자라는 직분이 현존할 수 없고, 또한 선지자라는 자들의 예언사역도 비성경적 신비주의라는 사실이다. 셋째, 릭 조이너가 주장하는 예언사역이다. 이 예언사역도 개혁신학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운동이다. 왜냐하면 릭 조이너가 주장하는 예언사역을 통해 나타나는 사상은 비성서적인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다는 ‘직통계시’의 해석을, 체험자 자신의 ‘내적감화에 의한 예언해석론’으로 인한 ‘예언의 오류성’과 그리스도인들도 사단의 지배를 받고 살고 있다는 ‘사단 지배론’이다. 또한 오늘날도 예언자가 존재한다는 ‘선지자 존재론’과 전통적 교회는 종교의 영에 사로잡혀 있다는 식으로 교회불신을 조장하며, 이문제로 인해 발생하는 교회갈등을 거룩한 전쟁으로 보는 ‘교회 내전론’이다. 성경적인 초자연적 체험이나 기적은 우리의 필요를 위하여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 편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하실 때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적을 행하시기 위하여 이적을 행하신 것이 아니고, 이적을 통하여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표적을 구하는 자들을 향해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 꾸짖으셨다(마 12:39). 그런 의미에서 예언사역의 참 목적은 교회의 유익을 위하고 덕을 세움이다. 우리가 기대하는 앞일을 예견하는 그래서 안일을 꾀하는 그런 목적으로 주어지지 않았다.229)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선포되는 설교를 계시적인 성령의 음성으로 받아 들여 적용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릭 조이너는 특히 예언사역을 감당할 선지자가 오늘날 현존하며 그들의 “예언은 하나님의 음성이다”라고 계속 주장함으로 개혁교회의 가르침과는 대척적인 주장을 펴고 있다. 개혁신학에서는 한마디로 오늘날에는 사도와 선지자(예언자)가 없고, 미래적인 예언도 성경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 신학의 입장에서는 릭 조이너의 주장을 비성경적이며 반성경적인 주장이라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성경에다 어떤 계시의 내용을 더하려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예언사역자들의 주장은 개혁신학적 성경관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사상이다. 개혁신학은 신약 선지자(예언자)들의 영감이 그쳐졌으므로, 선지자직도 그쳐졌고, 선지자적 직임은 ‘가르치는 직임’ 속에 편입됐다고 본다. 한마디로 ‘오늘날에는 선지자가 없고, 오직 성경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 개혁파 신학의 주장이다. 그러나 설사 성령의 은사에 대한 열린 자세로 신사도 운동과 조이너의 예언사역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성경이외의 계시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 성경이 계속 더 쓰여 질 수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 신사도운동의 이론적 특성들은 오히려 참된 교회성장에 걸림돌이 되는 체제를 가지고 있으며, 기존의 복음에 대하여 강한 불신을 보이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전통교회를 종교의 영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난하며, 신학과 신앙, 교회 체제를 부정한다. 신사도주의자들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며, 기존 교회의 형식과 틀을 변형시키는 것이 마치 개혁인줄 착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사도나 예언자의 존재와 환상과 계시의 정당성을 위해 성경을 자구적으로 해석하고, 성도들을 신비체험 위주의 신앙을 갖도록 강요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도직의 부활과 예언자들의 계시를 통해 지도자 개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과 예언을 주장하며, 성도들에게서 영적, 정신적 자유를 박탈하는 모습들을 드러내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오히려 교회성장이 목적이 아니라 영혼구원을 우선으로 하며, 사도들의 가르침과 정경 말씀의 기초 위에 든든히 서가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으로 본다. 이제는 체험보다 하나님 말씀을 강조하는 개혁 신학의 성령론에 대한 전통을 계승하면서 역동적 성령은사 사역을 수용하고, ‘성령의 신학’을 ‘말씀의 신학’과 병행하여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성령의 은사론도 이해하여야 한다. 개혁신학은 개인의 마음에 중생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사역만이 아니라, 다양한 성령의 역사를 통한 창조의 보존, 이성과 양심, 중생과 성화, 교회와 선교, 문화와 역사, 치유, 은사를 통해 일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연구하고 강조해야 한다. 동시에 성령의 은사뿐만 아니라 성령의 열매론을 더 중요하게 다루어 균형을 이루도록 제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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