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리안 입장에서 본 변승우 목사의 이단성
평신대이단대책협회 이인규  |  dsmedic@naver.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3.12.04  09:23:26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이인규 대표(평신도이단대책협회, 세이연 연구위원)는 감리교도입니다. 이단내지 그에 준하는 규정을 받은 변승우 목사 또한 자신에 대해 웨슬리안이라고 표현하는 사람입니다. 감리교도 이 대표가 본 변 목사는 어떤 문제를 갖고 있을까요. A4용지 17매에 이르는 긴 분량입니다. 그러나 한 번에 게재합니다. 변 목사의 문제점을 한눈에 그려볼 수 있는 매우 유용한 자료라 생각해서입니다. 이 권사는 이 글을 본 사이트 기독교포털뉴스(www.kportalnews.co.kr)에 게재하며 변승우 목사를 비롯한, 큰믿음교회에서 대표성을 인정하는 그 어떤 사람과의 토론도 환영한다고 밝혔습니다. 혹시라도 큰믿음교회측이 이 글과 관련 반대 의견을 보내올 경우 그에 대해서도 게재할 것을 밝힙니다<편집자주>
                                                                             
웨슬리안 입장에서 본 큰믿음교회 변승우 목사의 이단성


글 이인규
세이연(세계한인기독교이단대책연합) 연구위원
평이협(평신도이단대책협의회) 대표


큰믿음교회 변승우 목사는 다음과 같이 교단에서 공식규정했다.

- 백석(2009/94/제명출교), 고신(2008/58/불건전, 2009/59/극히 위험한 불건전 사상, 그의 저술 탐독및 집회참여금지), 통합(2009/94/극단적 신비주의 형태 비성경적 이단), 합동(2009/94/참여금지), 합신(2009/94/심각한 이단성), 예성(2011. 이단성, 교류및 교제금지), 기성(2011. 집회 참석및 교류금지)

변승우.gif 변승우.gif 


종교개혁으로 시작된 개신교는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을 슬로건으로 시작했다. 변승우 목사는 이 세 가지를 모두 부정하며, 그의 이단성을 다음과 주제로 분류해 비판해보고자 한다.

 

(1) 변승우 목사는 ‘오직 믿음’을 부정한다
(2) 변승우 목사는 ‘오직 은혜’를 부정한다
(3) 변승우 목사는 ‘오직 성경’을 부정한다
(4) 변승우 목사는 웨슬리안이 아니다
(5) 변승우 목사는 회개의 참의미를 모른다
(6) 변승우 목사는 신사도운동을 추종한다 
(7) 웨슬리안이 구원의 취소를 주장하는가
(8) 결론 : 변승우 목사에게 이단성 있다.
   
1) 오직 믿음을 부정한다
변승우 목사에게 구원은 ‘오직 믿음’이 아니다. 믿는 자도 회개와 순종, 행함이 없다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천국에는 예수 믿는 모든 사람이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 말씀대로 산 사람만 들어갑니다”(아무도 너희를 대적하지 못하게 하라, 71쪽)

 

과연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이러한 주장을 우리는 행위구원론이라고 부른다. 심지어 변승우 목사는 십자가 보혈의 죄사함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주장을 하고 있다.
  
“죄 사함은 단순히 십자가 보혈 공로를 믿을 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고 회개할 때 주어집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공로를 거론하며 그것을 믿고 의지하면 무조건 죄에서 용서받고 구원받는다는 것은 진리가 아니며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믿고 의지한다고 무조건 죄 용서를 받지는 않습니다”(변승우, 주 달려 죽은 십자가, 65쪽).

 

그가 말하는 지옥의 조건은 믿음이 아니라, 회개이며 행함이며 순종이 된다. 믿는 사람조차 회개하지 못하면 지옥에 간다는 것이 바로 변 목사의 주장이다.
   
“지옥에는 두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다. 세상에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100% 지옥에 온다. 또 하나는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인데 회개하지 않고 죽은 사람은 모두 지옥에 온다.”(지옥에 가는 크리스쳔, 58쪽)

 

“이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율법을 몸으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는 결코 십자가 공로가 아닙니다. 그것은 실생활에서 몸과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것을 가르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의가 없는 자는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변승우,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68-69쪽)

 

정작 변승우 목사에 대한 비판이 많아지자, 변 목사는 자신이 회개를 강조한 것이라고 변명을 했다. 그러나 변 목사는 단순히 회개를 강조하는 표현이 절대로 아니다.
그가 쓴 책의 제목은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이었으며, “진짜 구원을 받은 사람도 진짜 버림을 받을 수 있다”였다. 또 그는 자신의 메시지가 정통신학과 교리와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많은 목회자와 신학생이 자신의 주장으로 바꾸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그의 주장은 정통신학이 아니라, 정통신학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뜻한다.
   
“제가 전하는 메시지는 교단의 교리에 딱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리보다 더 성경적입니다. 그래서 지금 많은 목회자와 신학생들이 저의 설교를 듣거나 책을 읽고 자신들의 오래된 견해를 바꾸고 있습니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변승우, <지혜와 계시의 영>, pp.23-24).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변 목사는 스스로 정통교리와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왜 정통교단에서 이단이 아니라고 발표되기를 원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가? 그는 한국교회를 종교의 영, 사악한 이단 바리새인이라고 욕설을 퍼부으면서, 왜 사악한 정통교단으로 들어오려고 하는가? 

 

“지금 한국교회는 종교의 영의 영향 아래 있다. 그래서 종교적인 사람들이 정통이 되고 성령의 사람들이 이단시 되고 있다.” (변승우, 대부흥이 오고있다. p246) 
  
“가장 사악하고 극성스러운 이단인 바리새주의는 정통의 모습을 하고 있다.”(변승우, 교회에서 가장 해악을 끼치는 이단의 정체, 2007.8.12 설교) 
   
“여기 오직 믿음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역입니다. 이 말씀은 하박국에서 바울이 인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박국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합2:4,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러므로 ‘오직’이라는 단어는 로마서에서 덧붙혀진 것입니다....단지 번역과정에서 우리말 성경이 ‘오직’이라는 단어를 덧붙인 것입니다. 세계 어느 성경에도 ‘오직 믿음으로’ 라고 번역한 곳은 없습니다.“(아무도 너희를, 23쪽) 
  
그러나 공동번역과 현대인의 성경도 ‘오직’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킹제임스영어성경은 "The just"라고 번역하고 있다. 롬 1:17의 헬라어 원문에도 ‘but’에 해당되는 우위접속사가 있으며, 롬1:17의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니”라는 구절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은 ‘오직 믿음을 강조하는 반복적인 표현’이라고 설명한다. 변 목사는 오직 믿음을 부정하며 종교개혁자들과 정통신학을 비난한다.
   
“마르틴 루터는 성경에 대해 지독한 무지와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앞에서 말한 4권의 책이 행함에 의한 구원을 말한다고 하여 그 책들을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와같은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에 의해 개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오늘날 믿음과 행함에 대한 그토록 심한 편견과 무지가 교회 안에 있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102쪽)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이 말씀을(롬4:1-8) 설교할 때에 ‘현재 우리가 불의할 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 피를 믿는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 우리를 의인으로 간주해 주신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칭의이며, 이것이야말로 종교개혁을 통하여 부활된 진리의 가장 진수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장해야만 정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통은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에 일치하는 견해를 갖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주장과 일치하는 견해를 갖는 것입니다“(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이하 지옥에 가는), 168쪽) 
  
2) 오직 은혜를 부정한다
우리의 구원은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다. 사람의 자력으로는 단 한명도 구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가 오신 것이다. 변승우 목사의 눈에는 아마 아래 성경구절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그렇다면 변승우 목사의 주장을 살펴보자.
  
“그런데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한다’는 말씀 그대로 복음서를 읽을 때에 수없이 이런 부분들이 나오지만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신학자와 목회자와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직 믿음’이니 ‘은혜로 받는 구원’이니 하면서 사실은 자기들이 사용하는 단어들의 의미조차 제대로 모르면서 주의 진리를 대적합니다”(아무도 너희를 대적하지 못하게 하라, 87-88쪽) 
  
심지어 변 목사는 거듭남(중생)과 칭의도 기독교와 전혀 다른, 행위구원론을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그는 도덕적인 변화, 인격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거듭남은 도덕적인 변화와 인격적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좁은 개념의 거듭남이며 그 결과를 뜻한다. 거듭남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다. 그 외에도 변 목사의 책을 보면 행위구원론이 분명하다고 보이는 내용들이 많이 발견된다.
   
“A.W.토저는 ‘개혁없는 중생은 없다’라는 제목의 탁월한 글에서 지극히 중요한 지적을 하였습니다. “도덕적 개혁이 있을 때까지 영적 중생이 있을 수 없다. ···죄인이 자기 생활방식을 기꺼이 개혁하려고 하지 않는 한 그는 중생의 내적 체험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인기있는 복음주의 신학의 나무 밑에서 잃어진 지극히 중요한 진리이다”(변승우,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150쪽) 
  
“성경은 도덕적인 변화 즉 인격과 생활의 변화를 거듭남의 매우 중요한 표증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성경의 이러한 가르침에서 벗어나서 성경구절로부터 이끌어낼 논리적인 결론들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변승우, 지옥에 가는, 156쪽) 
  
“그리고 T.L. 오스본 역시 거듭남의 비밀이란 책에서 거듭남에는 의지의 결단에 의해서 죄에서 돌이키는 내면의 변화와 목적의 변화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능동적인 의지를 가져야만 합니다. 그러면 능동적인 의지만 가지면 됩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은혜의 수단(믿음이나 거듭남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체인 성경을 읽거나 말씀을 듣는 것, 자백, 기도 등의 노력을 의미하는 것)을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변승우, 지옥에 가는, 151쪽) 
  
그렇다면 교회사에서 어떤 인물이 거듭남(중생)을 도덕적인 개선이며 의지의 행동이라고 주장하였을까? 우리는 교회사를 통하여 행위구원론자로서 대표적인 이단이었던 펠라기우스가 그렇게 주장하였음을 알게 된다.
  
(중생에 대한 다양한 견해) 
펠라기우스의 견해 : 펠라기우스에 의하면 사람의 자유와 개인적 책임은 그가 언제든지 죄를 짓는 것처럼 죄를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고 한다. 단지 의식적인 의지의 행동만이 죄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중생은 단순히 도덕적 개선으로 구성된다. 그것은 전에 율법을 범하는 것을 선택한 사람은 지금도 그것에 순종하여 살기를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루이스벌콥, 벌콥조직신학 하권, 기독교문사, 230쪽) 
  
펠라기우스는 “If I ought to, I can do” 라고 말하였다. 그는 원죄를 부정하였으며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로 의인이 될 수 있으며 거듭날 수 있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더 놀라운 변 목사의 주장이 있다. 사람은 스스로 의가 있어야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놀라운 행위구원론을 변 목사는 그의 책에서 주장하고 있다. 그는 로마서 5장의 우리에게 값없이 전가되는 예수의 의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변 목사는 사람에게 의가 있어야만 하나님에게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결국 그가 말하였듯이 “죄가 하나라도 있다면 지옥에 간다”는 주장과 일치하고 있다. 그는 온 인류의 죄사함을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의 십자가 대속을 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안에 의가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안에 의로움이라고 전혀 찾아 볼 수 없으며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만큼이나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거룩하심에 비추어볼 때 완전히 모순되는 일이기 때문이다"(지옥에 가는, 166쪽) 

"만일 우리가 행위를 믿음의 행동이나 표현으로 이해한다면, 행위는 우리의 칭의에서 배제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믿음으로만 아니라 행위로도 의롭다함을 얻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은 마음 속에 있는 믿음 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 마치 몸의 움직임과 활동이 몸에 있는 생명의 표현이듯 믿음이 가지고 있는 생명의 표현인 행위들도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말입니다"(지옥에 가는, 127쪽) 
  
"무엇보다도, 목회자들이 너무나도 복음에 물을 타서 희석시켜서 복음전파는 더 이상 의를 전파하는 것이 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즉 귀신도 가지고 있는 사변적인 믿음을 낳을 뿐 사람들로 하여금 의를 행하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교회 안에서 노아나 롯처럼 의로운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그러므로 구원받는 사람이 적다는 것은 결코 이상한 말이 아닙니다”(변승우, 주여, 30쪽)                 

3) 오직 성경을 부정한다 

“내 손에는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다림줄이 있다.” (변승우, 다림줄 103-104쪽) 
   
다림줄이란 건축에서 수직을 받는 기준이 되는 추가 달린 줄을 뜻한다. 변승우 목사는 자신이 성경해석의 다림줄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그는 성령님께 세계에서 유일한 성경해석의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또 성령에게 책의 제목과 내용까지 계시받으며, 영적비밀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자신의 해석만이 옳다고 하는 사이비교주의 주장과 유사한 것이다.
  
“이것을 보여주시며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통하다. 이것을 어찌 방언 통변이나 다른 은사들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 은사를 누구에게 줄까? 미국, 영국, 독일, 유럽과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사람을 찾다가 너를 발견하고 너에게 이 은사를 주었는데 너는 이 은사로 인해 내게 한 번이라도 감사한 일이 있느냐? 늘 방언 통변이나 신유의 은사를 주지 않는다고 불평만 하지 않았느냐? 내가 다른 작은 은사들을 주고도 감사기도를 받는데 이런 엄청난 은사를 주고도 감사하다는 말은 못 듣고 늘 불평만 들으니 이 얼마나 원통한 일인가?”(변승우,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한 기도원 원장의 말은 인용함)‘하나님은 도대체 변 전도사님(변 목사를 의미함)에게 무슨 은사를 주셨습니까? 무슨 은사를 주셨기에 아홉 가지 은사를 다 체험한 저에게 저렇게 당돌한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누가 기록했느냐?’ ‘성경은 선지자와 사도들이 기록했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이므로 성경의 저자는 성령님이십니다.’ ‘네 말이 옳다. 나는 이 시대의 많은 나의 종들에게 말씀의 은사를 주었다. 그러나 성경 저자들이 성경을 쓸 때에 임했던 그런 영감을 준 사람은 이 종 하나뿐이다.나는 그에게 단순히 말씀의 은사가 아니라 성경 저자들이 성경을 쓸 때 가지고 있었던 그런 영감을 주었다. 이 말을 오해하지 말아라. 이것은 그가 다시 성경을 기록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성경은 이미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할 것이다. 그가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틀림이 없을 것이며, 내가 직접 하는 말과 같을 것이다. 그러니 이 은사를 어찌 다른 은사들과 비교할 수 있겠느냐?’”(변승우,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변 목사는 자신의 설교와 책 제목, 책 내용까지도 성령이 계시하여 주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증보판에서 책의 내용을 수정한 적도 있다.
  
“성령님께서 순간적으로 제게 부어주신 설교는 대게 새롭고 영적인 비밀을 담고 있으며 매우 중요하다(변승우, 대부흥이 오고 있다, 237-238쪽, 240-241쪽).
                                     
“성령께서 책 제목과 내용들을 계시해 주셨다” (변승우,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9쪽). 
  
변승우 목사는 자신을 성경해석에서 유일화, 절대화, 사도화하고 있지만, 실제로 변승우 목사의 성경해석을 보면 거의 기초적인 지식조차 없는 황당한 내용이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성경공부를 하지 말라고 주장한다. 
   
“성경공부를 많이 하면 점점 바리새인이 되어간다.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이 바리새인의 신앙이다.” (변승우, 교회에서 가장 해악을 끼치는 이단의 정체, 2007.8.12 설교) 
                                                      
“충격적이지만 진실을 말씀드리자면 대부분의 주석과 신학서적, 대부분의 강해설교집과 성경공부 교재, 그리고 대부분의 설교자들의 설교와 심지어는 대형 교회 목사님들의 설교에 이르기까지 이런 불완전한 과정을 통해서 탄생되었습니다. 즉 거의 대부분의 주석과 강해집과 설교들이 사실상은 다림줄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 눈대중에 불과합니다”(변승우, 다림줄, p.60). 
                              
“교사가 성경을 사용하는 것은 선지자가 성경을 사용하는 것과 다르다. 교사는 성경저자의 의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선지자는 자신이 성령으로부터 들은 말씀을 성경말씀을 빗대어 설명한다”(변승우 목사 카페) 
  
“바리새인은 뭐냐! 바리새인은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그들의 신앙이에요. 이게 바리새인이에요. 신앙이 어떻게 어떤 내용으로 구성이 돼있어요?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여러분 이게 무서운 얘기에요. 이런 현상이 지금 교계에서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어요. 신앙이 뭐냐? 목회라는 것이 도대체 뭐냐? 그냥 성경 연구하고 그 다음에 성경 가르치고 이게 되어버렸다고! 성경 연구하고 성경 가르치고! 여러분 신앙이 이런 것으로만 형성되어 있으면 안돼요”(변승우, ‘교회에 가장 큰 해악을 끼치는 이단의 정체’, 2007년 8월 12일 설교).
  
4) 변승우 목사는 웨슬리안이 아니다.

변승우 목사는 자기가 웨슬리와 100% 동일한 사상을 가졌다고 주장한다. 자신을 웨슬리와 동등한 위치로 올려 놓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끝으로 제가 찰스 피니의 소개로 존 웨슬리의 책을 읽었을 때에 저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사상과 똑같은 깨달음을 가지고 있는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저의 신학적인 견해는 존 웨슬리와 거의 100% 일치합니다. 그러나 저는 존 웨슬리에게 배워서 현재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며 다만 존 웨슬리의 글을 통해서 성령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변승우,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p.318). 
  
그렇다면 변승우 목사는 웨슬리와 동일하다고 볼 수 있을까?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변 목사가 자신을 웨슬리와 같다고 하는 이유는 웨슬리의 등 뒤에 숨으려는 생각일 뿐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변승우 목사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주장한 웨슬리를 무지하다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게 하신다는 것에서 착각하는 분들이 굉장히 많다. 존 웨슬리도 이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존 웨슬리까지도.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고 하니까 그냥 믿음만 이야기하려고 한다. 존 웨슬리도 무지의 흔적이 역력하다. 그냥 믿음 이외에 다른 것을 이야기하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부산의 모 교회 원로 목사처럼 무지해서 믿음 이외에 다른 것을 이야기하면 다 이단이 된다. 예수님도 믿음 외에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제자의 조건도 말하고 회개도 말하고. 그러면 예수님 이단인가. 무식해도 정도가 있어야지. 존 웨슬리도 그런 안간힘을 쓴 흔적들이, 저는 존 웨슬리 책을 다 읽었기 때문에 안다. 그 책에도 그런 흔적이 나온다.”(변승우 목사 5월14일 설교, 참고, 뉴스파워) 
      
우리는 롬 1:17을 듣고 회심을 하였던 웨슬리의 체험에 대해서 알고 있다. 웨슬리가 회심하기 이전의 구원관은 무엇이었는가? 그는 자신의 의지와 힘, 그리고 도덕적인 노력으로 의롭다함을 받으려고 노력하였다.
  
“먼저 올드스케이트 이전의 웨슬리의 사상에는 인간은 도덕적인 선과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복종, 그리고 하나님의 법도를 지킴으로서만 구원받는다는 기본적인 원리가 있었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 의롭다함을 받으려는 노력과 그 노력의 도적적 영적 결과로 하나님의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했다”(웨슬리조직신학, 한영태, 167쪽) 
  
이후 웨슬리는 로마서 서문을 듣고 회심을 체험하고 오직 믿음을 주장한 종교개혁자들의 교리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말한다.
  
“‘나는 나의 마음에 이상스럽게도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주임을 믿는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그가 내 죄, 나의 자신의 죄를 가져 가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경험과 함께 웨슬리에게는 아들의 믿음이 왔으며, ‘율법 아래 살 때에는 전력을 다해 싸웠어도 패배자일 따름이었는데 이제 은혜 아래에서는 승리자가 된다’는 새로운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이 경험은 자신의 선한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으려다가 실패한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종교개혁자의 교리로 돌아가게 한 계기가 되었다.”(웨슬리조직신학, 한영태, 169쪽)
  
즉 변 목사는 웨슬리목사가 회개하기 이전, 거듭나기 이전의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 회심 이후의 웨슬리를 무지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믿음도 구원도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 어느 것도 인간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요, 분에 넘치는 선물이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이 즐거이 주시는 사랑의 선물이다. 사람들이 믿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한가지 실증이요,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또 하나의 실증이다(한국웨슬리학회, 웨슬리설교전집, 1권 26)

5) 변승우 목사는 회개의 참의미를 모른다
변 목사는 믿는 자도 그 죄를 하나라도 회개하지 못하면 지옥에 간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여기서 손, 발, 눈 즉 여러 가지 죄를 지어야만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라도 끊지 못한 죄가 있다면 그 죄와 함께 지옥에 던져진다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지옥에 가는 크리스쳔, 27쪽) 
  
“그러므로 천국에 가려면 이 말씀 그대로 회개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단 한가지라도 회개할 죄가 남아 있으면 안 됩니다. 모든 죄를 다 회개했어야만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참으로 회개한 사람이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지옥에 가는, 28쪽). 

“구원의 조건 : 구원은 단순히 믿음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와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의 조건 중의 하나가 회개라는 사실이 망각되고,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또한 구원의 다른 조건 중에 하나인 믿음에 대한 가르침 역시 충분하지 않습니다.” (큰믿음교회의 양육교재, 다림줄)
  
변 목사는 믿음과 회개를 서로 다른 것으로 구별하기 때문에 이러한 잘못을 범하고 있다. 회개를 뜻하는 ‘메타노에오’라는 용어는 원래 ‘방향수정’을 가리키는 의미로서, 불신자가 하나님을 향하여 돌이키므로서 믿음을 갖는 것이 회개이다. 그래서 존 머레이는 ‘회개하는 믿음’ 혹은 ‘믿는 회개’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따라서 최초의 믿음과 회개는 생애 중 단 한번 있는 일이고, 그 일이 일어날 때 참된 회심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믿음과 회개의 마음의 자세는 회심 때 단지 시작될 뿐이다. 그 때의 그 자세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지속되어야 한다.(웨인그루뎀, 조직신학 중권, 345쪽) 
  
다시 말하여 회개는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 방향수정을 말하며, 그 회개가 곧 믿음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행 20:21) 
  
변 목사는 이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 회개와 믿음을 구별하고 있는데, 위 구절들은 회개와 믿음을 동일시하는 내용이다. 즉 회개(방향수정)하고 믿으라는 것이다. 
변 목사는 성화의 과정에서 반복적인 죄의 회개와 믿음의 과정에서 단회적인 방향수정의 회개의 개념을 전혀 구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변 목사의 책을 보면 회개를 오직 죄에 대해서만 사용되는 개념으로 알고 있다. 
  
“회개는 죄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변승우, 지옥에 가는 크리스쳔, 54쪽) 
  
“성경에서 요구하는 회개는 죄를 떠나고 모든 죄에서 떠나는 것입니다.”(지옥에 가는 크리스쳔, 57쪽) 
   
변 목사는 믿음과 회개를 각각 다른 것으로 구별하여 서로 다른 구원의 조건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즉 믿음과 회개를 우리는 ‘회심’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단회적이다. 이 개념에서 회개는 결국 불신으로부터 방향전환이 되는 믿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개라는 용어는 예수를 믿고 거듭난 이후 성화라는 과정에서 반복적인 개념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 성화적인 회개는 구원을 받지 못할 수도 있는 조건적인 개념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과정을 뜻한다.
웨슬리는 죄에 대한 회개, 즉 중생 이후 성화과정에서의 죄에 대한 회개는 칭의에 선행하는 회개와 다르다고 말한다. 
  
“이 회개(중생 후의 반복적인 회개)는 칭의에 선행하는 회개와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여기서 회개는 죄책이라든가 정죄라든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의식이라든가 하는 것들과 연관되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깨달음이니 곧 우리 마음 속에 아직 남아있는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곧 육에 속한 마음입니다. 중생한 사람들 속에서도 그것이 남아있으나 지배하지는 못합니다.”(웨슬리 조직신학, 성광문화사 199-200쪽) 
  
그렇다면 구원의 조건으로서 회개와 믿음을 웨슬리는 어떻게 말할까? 

“구원의 조건으로서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언제나 결합되었다. 둘 다 선행은총에서 나오지만 구원의 믿음이 구원의 조건인 것과 마찬가지로 구원의 도구라는 점에서 다르다. 그러므로 믿음은 은총으로부터 흘러 나오고, 회개가 뒤따른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믿음은 구원의 유일한 조건이고, 회개는 믿음의 조건이라고 자주 말한다. 둘 다 구원의 상태로 적절하게 인도하는 것이지만, 오직 구원의 믿음만이 책망의 구원으로 전환하는 지점이 된다.” (웨슬리안 조직신학, 도서출판 세복, 317쪽) 
   
웨슬리는 하나님에게 향하는 방향수정적인 (단회적인)회개와 믿음은 구별하지 않는다. 하나님에게로 방향수정을 하는 것이 곧 회개이자 믿음이기 때문이다. 굳이 개념적으로 구별한다면 하나님께 향하여 회개를 하여야 믿음이 시작되므로 믿음은 구원의 조건이고, 회개는 믿음의 조건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웨슬리는 의롭다함을 받는 것에서 믿음과 회개의 관계를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웨슬리는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 데에 있어서 회개와 그 열매를 믿음과 동등한 위치에 둔 것은 아니다. 위에 인용한 그의 ‘성서적 구원의 방법’이라는 설교문에서 그는 회개와 그 열매는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데 대단히 필요하나, 그러나 믿음과 같은 의미에서 같은 정도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 왜냐하면 이것들은 다만 조건부로 필요하다. 즉 시간과 기회가 있는 경우라면 몰라도, 그렇지 못한 경우라면, 십자가의 도적처럼 이것(행함)이 없이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이 없다면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다. 회개와 그 열매는 다만 간접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믿음은 직접적으로 필요하다”(웨슬리신학, 송흥국, 108쪽, 성서적 구원의 방법 2권 451-452 인용) 
  
그렇다면 웨슬리는 행위와 칭의의 관계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요한 웨슬리 목사와 이 연회의 회집자들은.···행위로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가장 위험하고 가증스러운 도리로 생각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엄숙히 선언한다. 즉 우리가 현세에서나 심판 시에 칭의나 구원에 있어서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이외의 다른 것을 믿는 일은 없다. 그리하여 시간과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행을 하지 않는 자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을 지라도(따라서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선행은 어디까지나 혹은 부분적으로나 또는 전체적으로나 우리가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우리의 공로가 된다거나 그 보상이 될 수는 없다”(웨슬리신학, 송흥국, 109쪽)
  
“믿음만이 칭의의 유일한 조건이므로.···불경건한 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는 순간, 그는 행함이 없어도 그 믿음을 의로 여긴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가졌을 지라도, 믿음이 없으면 의롭다함을 받지 못할 것이요, 그 반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믿음만 있다면 그는 의롭다함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흉악한 죄인으로서 지옥의 형벌 밖에 받을 것이 없을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에 자신을 내맡길 때 그 시각으로 그는 용서함을 받는다.”(웨슬리신학, 송흥국, 111쪽, 웨슬리의 표준설교 인용)

웨슬리 교단들의 교리와 장정, 신학을 보면 어느 교단이든지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며, 인간의 의지와 행함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한다. 즉 변승우 목사의 주장은 웨슬리 교단의 신학사상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6) 변승우 목사는 신사도운동을 추종한다 
특히 변승우 목사는 자신이 신사도운동이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그는 아마 피터와그너만 신사도운동이라고 알고 있든지, 아니면 고의적으로 그에게 모든 책임을 미루고 자신은 신사도운동에서 빠져나가려고 하는 것 같다.

신사도운동의 실제적인 뿌리는 윌리엄브래넘의 늦은비운동이며, 윌리엄브래넘의 사망 후에 늦은비운동이 와해되자, 함께 사역하던 폴케인이 밥존스와 마이크비클을 만나 캔서스시티예언자그룹에서 함께 예언사역을 시작하였으며, 후에 이들과 함께 사역했던 어니그루엔이라는 동역자가 밥존스와 폴케인, 마이크비클의 예언이 모두 거짓과 조작이었다고 폭로하여 캔서스시티예언자그룹이 문을 닫게 되고 뿔뿔히 헤어지게 된다. 이후 존 윔버의 빈야드운동이 성행하게 되자 이들은 각각 빈야드로 합류하게 되며, 빈야드가 쇠퇴하고 피터와그너가 신사도운동 연맹을 발표할 때에 각자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된다. 이들은 모두 유사 신사도운동이며, 그동안 큰믿음교회에서 초청을 받은 외국 인사들은 모두 신사도운동 혹은 유사 신사도운동의 아류이다. 특히 변 목사는 밥존스의 영적 아들이라고 자칭한다. 
현재 빈야드운동과 신사도운동, 아이합등에 대해서 교단들은 다음과 같은 규정을 하였다. 

빈야드운동 : 통합(1995/81/도입금지), 고신(1996/46/참여금지, 2007/57/빈야드성 유사운동 집회 참여금지), 합동(1997/82/참여자, 동조자는 징계), 기성(1998/53/사이비성 있음)

신사도운동(피터와그너) : 고신(2007/57/지극히 불건전한 사상, 관련 저술탐독 금지, 강사초빙 금지, 집회참여 금지), 합신(2009/94/이단성, 참여금지). 미주한인장로교연합(2012/교류금지)

아이합(마이크 비클) : 고신(2011/61/집회참석금지), 미주한인장로교연합(2012/교류금지

알려진 신사도운동의 보편적인 교리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사도와 선지자의 직분이 아직도 존재한다 
2) 성경 외에 직통계시와 예언이 아직도 존재한다 
3) 기적과 표적, 쓰러짐, 입신, 진동등의 현상적인 집회
4) 안수를 통하여 성령과 은사, 능력을 전이시킬 수 있다.(임파테이션)
5) 칠대권역(일곱산), 도미니온(통치신학, 킹덤나우). 부의 이동과 일터 교회(두 기둥)
6) 기독교는 옛 포도주이며 헌 가죽부대로서, 신사도개혁운동의 새 패러다임으로 바뀌어야만 한다.
7)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위하여 정통신학은 더이상 필요하지 않다(개방신학)
8) 종말적으로 신사도운동의 교회에 나타난다는 오순절의 대부흥과 대추수, 신부 운동, 요엘의 군대, 늦은비와 이른비등
9) 성경의 알레고리적인 비유해석
10) 영적도해와 백투예루살렘
11) 예언적 중보기도, 전략적 중보기도 
12) IHOP의 24/7 예배, 다윗의 장막등

큰믿음교회는 영적도해와 같은 일부분의 주장을 제외하고 신사도운동이 주장하는 대부분의 교리와 사상과 거의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다. 피터와그너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하여 신사도운동이 아니라는 주장은 변명이다. 더욱이 그는 과대선전과 극단적인 신비주의로 교인들을 미혹하고 있다.

7) 웨슬리안이 구원의 취소를 주장하는가?
변승우 목사는 자신이 웨슬리안으로서 장로교의 견인교리를 부정하였다가 이단으로 규정되었다고 주장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 물론 웨슬리안은 칼비니즘의 견인교리와 달리 구원의 취소의 가능성을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 측에서 예정된 구원을 취소한다는 뜻이 아니며, 정확한 표현을 하자면, 웨슬리안은 믿음을 인간의 책임적 측면으로 강조하기 때문에, 신자(信者)의 입장에서 믿음을 잃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웨슬리의 구원관은 행함이나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의 예정된 구원이 취소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믿음을 유지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그가 믿음과 사랑에 머물러 있는 한” 구원을 취소당하지 않는다고 본다. 변승우 목사가 말하듯이, 죄를 끊지 못하거나 회개를 하나라도 하지 못하면 구원을 잃는다는 주장과 전혀 다르며 그런 주장을 한 적도 없다. 

“우리는 믿음으로 칭의되고, 중생하고, 그리고 성화되어 구원을 얻지만, 그 믿음은 계속되어야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웨슬리는 예정된 자의 구원이 아니라, 믿는 자의 구원을 강조하면서 신앙의 현재성과 계속성을 강조한다”(웨슬리조직신학, 성광문화사, 198쪽)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롬 8:1)

“웨슬리에 따르면 중생한 자는 원죄의 죄책이 해결되어 과거처럼 신자를 지배하지 못하지만, 죄의 능력은 아직도 남아있어서 성령을 거스른다. 이 남아있는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성화의 은총이 필요하다. 죄는 하나님의 법에 대한 의도적(고의적) 위반이다. 중생한 자는 믿음, 소망, 사랑에 머물러 있는 한, 기도와 감사의 생활을 하는 한, 의도적으로 이 죄를 범하지 않는다. 이는 그가 신앙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범죄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범죄하지 않고 최종적인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믿음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 믿음이 계속되어야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존 웨슬리와 감리교신학, 김영선, 대한기독교서회, 216-7쪽) 

(8) 결론 : 변승우 목사에게 이단성 있다
변승우 목사는 구원의 조건이 되는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를 부정하는 행위구원론자이다. 게다가 그는 예수의 십자가 대속을 약화시킨다. 또 그는 자신이 전 세계에서 유일한 성경해석의 은사를 받았거나 자신이 성경의 다림줄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며 ‘오직 성경’을 부정하는 사람이다. 그는 마틴 루터와 웨슬리, 종교개혁자들도 무지하다고 비난하며, 정통기독교의 신학과 교리, 성경주석까지 부정하며, 자신만이 성경해석의 기준이 된다고 주장하므로 사이비 집단의 교주와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다.

또한 정통교단의 교리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변승우 목사의 구원론을 이단성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사람들이 있다. 더군다나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 중 일부가 이대위 위원들이라는 사실이 더욱 놀랍다. 예수의 십자가 대속을 부정하는 행위구원론이 이단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은 이대위 위원의 자격이 될 수 없다. 정통신학이 무엇인지 이단교리가 무엇인지를 구별조차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대위 위원이란 말인가? 변 목사가 이단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대위 위원이 있다면 그들이 이단적인 사상에 동조하기 때문이며, 그도 조사하여야만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변승우 목사는 칼뱅주의도 아니고, 웨슬리안도 아니다. 그는 정통신학이 아니라 이단적인 펠라기우스적인 행위구원론자로 판단된다. 그리고 행위구원론은 초대교회부터 이단적인 주장이었다. 게다가 그는 극단적인 신비주의자이며, 직통계시와 예언을 정당화하는 명백한 신사도운동가이다.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 오직 성경을 부정하며 정통기독교를 종교의 영, 사탄의 개라고 비난하던 변승우 목사가 정통교단으로 들어오려고 시도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루터와 웨슬리등 종교개혁가를 무지하다고 비난하던 그가 자신을 웨슬리안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이단에서 풀어줄 것을 정통교단에게 기대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최근에 이단을 이단이 아니라고 풀어주려는 친이단 인사들이 있는데, 특별히 연합단체를 중심으로 많다. 필자가 궁금한 점은 왜 이러한 친이단 인사들은 적은 규모의 이단들은 풀어주지 않고 큰 규모의 이단들만 풀어주려고 하는가?
  
장로교가 감리교나 성결교를 이단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장로교는 변승우 목사를 이단성이 있다고 규정한다. 그 이유는 장로교에서 볼 때에 변승우 목사의 주장은 감리교와 성결교의 신학과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더욱이 웨슬리 신학을 따르는 기성과 예성 교단은 왜 변승우 목사를 이단성이 있다고 규정하였는가? 누가 변승우 목사를 웨슬리안이라고 말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