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지난 9월 28일 대림감리교회에서 열린 “구원파의 실체와 비판” 세미나에서 발표된 것입니다. 저자인 이인규 권사(평신도이단대책협의회 대표)의 허락을 얻어 전문을 게재합니다.<편집자주> |
이인규 / 종피맹 이단상담소장, 세이연 연구위원, 평이협 대표
1. 배타적인 구원관 1) 깨달음으로 구원을 얻는가?
구원파는 예수가 우리 죄를 모두 사하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더 이상 죄가 없다고 가르친다. 더욱이 그것을 깨닫는 날이 곧 이미 구원을 받은 날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가 죄를 씻어주었다는 결과만 깨달으면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주장은 어처구니가 없는 주장이며, 그렇다면 왜 구원파만 구원을 받게 되는가? 예수의 십자가 대속과 죄사함은 모든 기독교가 다 가르치는 내용이다.
구원파는 죄에 대한 개념을 존재론적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죄는 관계적이며, 구원파는 의인과 죄인에 대한 성경적인 신학적 개념이 정립되어 있지 않으며, 또한 구원파는 칭의와 중생, 성화에 대한 구원관이 정립되어 있지 않는 곳이다. 그들이 인용하는 성경구절은 단편적이며 부분적일 뿐이다.
구원파에서 아래 골1:6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깨달음을 강조한다는 자체가 바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자체를 부정하려는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다. 즉 성경에 수없이 기록된 “믿음으로 구원을 받음”을 모두 외면하고, 부분적인 몇 개의 구절만을 인용하여 “깨달음으로 구원을 받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구절이 수백개가 기록되어 있다. 그것에 대해서는 왜 인용을 하지 않을까? 그리고 과연 본문이 깨달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일까?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골 1:4~6).
성경은 구원파 교리와 같이 깨달음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열매를 맺어 자라난다”고 말한다. 그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성경본문은 그 당시 골로새서 교인들이 ‘믿음과 사랑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된 날로부터 복음이 전파되어 열매를 맺고 자라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2) 예정론은 지옥 가는 교리인가? 구원파는 예정론을 매우 강하게 부정하고 비판한다. 그들이 인정하는 것은 오직 견인교리 하나뿐이며, 그들의 견인론은 구원파 교리를 깨달으면 그 구원이 취소가 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예정론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와 섭리를 강조한 것이며, 내가 구원을 받았다고 단정하여 자의적으로 구원을 받았으며, 그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더욱이 어느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나 혹은 어느 교리를 깨달았다고 하여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은 결코 아니다. 구원파에서는 예정론을 지옥에 가는 교리라고 가르친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을 다음과 같이 넷으로 구분할 수가 있을 것이다. ① 나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실제로 구원받을 사람. ② 나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확신하지만, 실제로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 ③ 나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구원을 받을 사람. ④ 나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
피구원자인 우리는 당연히 믿음을 유지하여야 하며, 죄와 멀리하여야만 하며, 구원은 최종적으로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이다. 피구원자인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이란 “나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가 될 수 없으며, 또한 “나는 더 이상 죄와 상관이 없다”가 될 수 없다. 이러한 주장은 도덕폐기론, 성화무용론이라고 부른다. 또한 거듭남(중생)에 대해서도 구원파는 잘못된 주장을 하고 있다. 거듭남은 무엇을 깨달아야만 거듭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선언을 한다고 거듭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하나님의 주관적인 역사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예정론의 5대 원칙(TULIF)] ① 전적타락(Total Depravity) ②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③ 제한적 구속(Limited Atonement) ④ 불가항력적 은총(Irresistible Grace) ⑤ 무조건적 견인(Final Perseverance)
혹간 구원파는 예정론을 주장하지 않는가? 라는 질문을 한다. 그러나 구원파는 절대로 예정론을 주장하지 않으며 단지 다섯 번째 견인교리 하나만을 지지한다. 그것도 자신들의 어떤 주관적인 깨달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으면, 그 구원이 절대로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으로서, 예정론이 말하는 견인교리와 전혀 다르다. 오히려 구원파에서는 예정론을 지옥에 가는 인위적인 교리라고 혹평을 한다.
3) 구원의 시제 성경에서 “구원에 대한 시제”는 세가지로 언급된다. 즉 이미 얻은 구원(과거적 시제의 구원)과 현재 걷고 있는 구원의 길(현재적 시제의 구원)과 궁극적으로 얻게되는 구원(미래적인 시제의 구원)을 말한다. 물론 구원의 개념이 세가지라는 것은 아니며, 다만 구원에 대한 시제적인 표현이 세가지로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성경구절은 과거적인 시제의 구원을 말하고 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엡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5:9)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골1:13-14)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3:9-10) 그런데 성경은 현재형의 구원을 함께 말하고 있다. 구원의 현재적인 면과 현재에도 계속되는 진행적인 구원을 함께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who are being saved)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2:15)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2:2)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8:16) 게다가 성경은 장래적이고 궁극적인 구원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shall be saved)....”(롬5:9)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8:23)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9)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14:1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3:20-21)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히4:1)
특히 우리가 잊으면 안되는 것은 그 구원의 시제가 과거이든 현재이든, 장래이든, 인간의 구원의 수혜자이며, 하나님이 구원의 주체이심을 알아야만 한다. 즉 인간은 구원에서 피동적인 입장이라는 것이다. 구원의 확신이란 무조건 내가 스스로 구원을 얻었다고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갖고 있는 믿음의 확증이어야만 한다. 성경에서 구원이라는 용어는 이미 얻은 구원과 현재 이루고 있는 구원과 함께 궁극적으로 우리가 얻을 구원의 세가지 시제에 대해서 성경은 말하고 있다. 구원의 확신이란 나 자신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그 순간 순간의 현재진행형의 구원에 대한 연속적인 확증이어야만 한다. 즉 구원이란 “믿음의 현재적인 과정의 연속성”이어야만 한다. 구원은 한 순간이 아니라 하나의 길이요, 과정을 말한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13:5)
그것이 과거의 시제만을 생각하는 형태의 구원, 즉 현재시제의 구원을 전혀 무시하는 믿음의 확증이나 또한 미래의 종말적인 구원만을 의미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내가 과거에 예수를 어떻게 믿었는지, 내가 과거에 교회를 열심히 다녔는지는 현재 나의 구원의 확신이 되지 않는다. 문제는 내가 지금 예수를 믿느냐는 것이 중요하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며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사역이며, 인간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자신의 믿음을 전혀 확증하지 않고 무시하면서, 과거의 믿음만으로, 혹은 내가 어떤 교회를 다니고 있다거나 어떤 교리를 깨달았다는 과거적인 사실만으로 내가 이미 구원을 얻었다고 단언하는 것은 구원의 확증이 아니다.
2. 죄관
1)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죄가 없는가? 구원파는 이미 의인이 되었으므로 죄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도요한은 죄가 없다고 하는 자는 스스로를 속이고, 진리가 없다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1:8-10)
구원파는 본문을 인용하여 자백만 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요한일서 본문이 죄가 없는데도 자백을 하라는 내용인가? 성경은 분명히 죄가 있다고 말하며, 이미 죄사함을 받았으므로 자백만 하면 된다는 구원파 주장과 다르다. 성경은 죄없다 하면 스스로를 속하고 진리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죄가 더 이상 없다고 주장하는구원파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며 스스로를 속이는 주장이 될 것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시32:5)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잠 28:13)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지 않았을까? 물론 예수의 십자가 대속은 우리의 죄를 모두 사하여 주셨다. 그러나 "죄사함"은 실제로 죄가 없어져서 온전한 의인이 되었다는 내용이 아니라,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용서하고 죄책을 묻지 않겠다는 뜻이다.
간음한 여인이 잡혀 왔을 때에 예수님은 무리에게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라고 하셨고, 무리들이 흩어지자 예수님은 여인에게 "정죄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죄를 지어도 상관이 없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다.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 8:11)
죄는 죄책과 죄성으로 나누어 진다.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었다는 것은 죄책을 사하여 주었다는 것이다. 즉 죄가 있지만, 죄책(정죄함)을 면제하여 주겠다는 것이다. 또 우리는 언제든지 죄를 지을 수 있다. 그것은 죄성, 즉 오염과 부패된 성향을 갖고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의인은 없으며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심지어 사도바울과 같은 사람도 자기에게 죄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7:21-23)
구원파에서는 이미 죄사함을 받았으므로 죄가 없으며, 그것을 깨달으면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그들 스스로의 생각일 뿐이다. 물론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예정한 사람은 그 구원이 취소되지 않으며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구원파 교리를 깨달았다고 하여 그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 예정 안에 있는 사람이 될 수 없다. 예를 들면, 자신이 깨닫고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한 구원파 교인중에서 신천지와 같은 이단에 미혹된 교인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에 대해서 구원파는 그가 진정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변명을 할 것이다. 곧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는 스스로의 판정은 실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증거한다. 성경은 깨달음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으며,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 과연 성경은 이미 구원을 받았으며 이미 죄가 없다고 하는가?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4-15)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4-15)
2) 종교개혁자들은 무엇이라고 말할까? 구원파들은 종교개혁자들도 자신들과 같은 견해를 갖고 있는데 기독교가 변질시켰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마틴 루터, 웨슬레, 캘빈등의 예를 들며, 그들이 구원파의 교리와 같은 깨달음을 갖고 있었으므로 구원을 받았는데, 기독교가 그 복음을 변질시켰다고 주장을 한다. 그렇다면 거듭난 우리에게 죄가 남아있는지, 혹은 죄가 완전히 없을지 유명한 마틴로이드존스 목사와 웨슬레, 루터, 캘빈의 주장을 살펴 보자.
-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사실 저는 아직도 이 삶과 이 세상에 있습니다. 저는 여전히 이 몸 안에 있는 죄와 싸우고 있습니다. 따라서 요한은 다음과 같이 진술합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소망을 가진 자는 이렇게 해야 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고전9:27)이라고 바울이 말한 것처럼, 다시 소망을 가진 자는 수동적으로 주님만을 바라보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저는 저의 “땅에 있는 지혜를”(골3:5) 죽입니다. 이것이 바로 논제입니다. 이 모든 진리는 주어졌고, 성령의 능력은 제 안에서 역사하시며, 저는 그것을 하도록 격려를 받으며, 그것을 행하기를 원하는, 이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죄를 완전히 제거했다거나 죄로부터 완전히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모든 것들을 반드시 거절해야만 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동일하게 반동의 원리 또한 거절해야만 합니다. (로이드존스, 성령하나님, 기독교문서선교회, 330쪽)
- 하나님의 자녀들은 중생을 통해서 죄의 결박에서 풀려난다. 그러나 그들은 육신에서 생겨나는 괴로움을 전연 느끼지 않으리 만큼 충분히 자유를 얻은 것은 아니다. 그들 속에는 계속 싸워야 할 여지가 여전히 남아 있어서 그로 인해 그들은 훈련받는다. 그들은 훈련을 받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무력함을 더욱 깨닫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모든 저술가들의 일치된 의견은 중생한 사람 안에는 악을 유발시키는 불씨가 남아 있어서 거기에서부터 욕망이 끊임없이 튀어나와 죄를 짓도록 유혹하며 자극한다는 것이다.(캘빈 기독교강요, 3권, 3장. 10)
- 이 회개(중생후의 반복적인 회개)는 칭의에 선행하는 회개와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여기서 회개는 죄책이라든가 정죄라든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의식이라든가 하는 것들과 연관되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깨달음이니 곧 우리 마음 속에 아직 남아있는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곧 육에 속한 마음입니다. 중생한 사람들 속에서도 그것이 남아있으나 지배하지는 못합니다.(웨슬레 조직신학, 성광문화사 199-200쪽) “죄와 죄 용서”(한국장로교출판사, <루터신학개요>, pp.132~136)
① 원죄에 대한 스콜라 교의의 그릇됨 ② 우리의 모든 의는 불결하다 ③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죄는 여전히 있으므로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④ 선을 좇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⑤ 하나님은 그리스도 때문에 은혜로 우리 죄를 용서하신다 ⑥ 원죄(죄성)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남아 있으나 이미 죽은 것이고 죽어가고 있다. ⑦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
어느 누구도 구원파와 같은 깨달음을 갖고 있거나, 구원파의 교리와 같은 사상을 갖고 있었던 사람은 없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며,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인이라고 불러주셔서 구원하여 주시는 은혜를 깨달은 것이지, 구원파의 이상한 교리를 깨달은 것이 아니다. 모든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의 깨달음이나 행위로 거듭난다고 주장한 적이 없으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남을 주장하였으며, 예수를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을 중요한 과정으로 강조하였다. 어느 누구도 모든 죄가 없어졌으므로 회개를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거나 자백만 하면 된다고 말한 적이 없다. 특히 구원파는 웨슬레도 몇월몇일에 회심을 하였다고 주장을 하므로 구원파와 같다고 주장을 한다. 그러나 웨슬레는 자신의 일기에 회심을 한 날짜를 기록한 것이지. 몇월몇일에 구원을 받았다고 말한 적이 없다. 더욱이 웨슬레의 구원관과 죄관은 구원파와 전혀 다른 정통신학적인 내용이다.
3. 칭의 칭의는 죄가 없게 하여 준다는 것이 아니라,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으로 칭하심을 받는다는 법적이며 신분적인 용어이다.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롬3:4)
바울의 서신문에서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즉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음"의 용어의 개념을 보다 깊이 알기 위하여, 일련의 헬라어에 대해서 주목하여야 한다. 헬라어 디카이오오(의롭다하다, 바르게 하다), 디카이오마(의롭다함, 심판), 디카이오시스(무죄선언)라는 용어는 주로 법정용어로 사용되어진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자력과 의지, 또는 행위로 의인이 되지 못하므로, 우리의 칭의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가 되어진다. 즉 우리가 의인이 되는 대가(보상)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의가 전가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
하나님은 그러한 죄인을 의롭다하심이라는 법적인 무죄선언을 통하여 의인으로 여기신다. 우리가 정말로 의인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로 인하여 대신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에, 우리 죄가 사하심을 받고, 가리우심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은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4:6-8)
예를 들어보면 우리가 차를 운전하다가 사람을 인명피해의 사고를 내었다고 가정하자. 사고를 내어 구속된 사람이 그 피해자 측과 다행히 합의가 되어 보상을 하고 풀려났다고 하자. 가해자는 보상을 통하여 무죄선언을 받고 석방되어진 것이다. 그는 보상을 함으로서 법적으로 더 이상 죄인이 아니며 자유인이 되었지만, 그에게는 아직 실질적인 죄가 남아 있다. 이것이 칭의의 단계이다. 즉 법적 신분적 변화로 석방된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보상을 하여주었다. 그것이 바로 대속이다.
칭의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죄인인 나를 향해 무죄선언하시는 사법적인 행위이다. 아담 안에서의 정죄의 관계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의의 관계로 전환시켜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으로 예수를 믿고 나의 구세주로 믿는 그 순간에 우리는 의롭다함을 받게 된다. 예수를 믿으면 모든 죄가 없어지고 완전한 의인이 되므로 죄를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얼마나 잘못된 주장인지 밝혀지는 것이다. 구원파의 교리에 의하면 단 한명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 더욱이 그 교리를 깨달으면 거듭난 것이라는 주장은 그들의 구원관이 얼마나 일방적이고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말하여 준다.
그렇다면 칭의는 중생과 어떻게 다른가? 중생(거듭남)이 실제적 변화라면, 칭의는 관계적인 변화를 말한다. 중생이 내적, 주관적 변화라면, 칭의는 외적, 객관적 변화가 되어진다. 중생이 죄의 능력을 제거해 주는 것이라면, 칭의는 죄책을 제거해 주는 것이다. 중생은 하나님이 "in me"(나의 안에서) 하시는 것이라면, 칭의는 하나님이 "for me"(나를 위해서) 하시는 것이다.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딛3:7)
물론 칭의와 중생은 별개의 과정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 개념은 구별된다고 하지만, 시간적으로 나타나는 순서를 의미하지 않고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며, 또 서로 분리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성을 갖고 있다. 구원파의 교리를 깨달았다고 하여 중생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구원파의 교리를 깨달았다고 하여 모든 죄가 씻어져 의인이 되었다는 주장은 부분적인 것만을 강조하는 잘못된 구원론이다.
4. 회개는 단회적인가? 구원파는 회개는 일생에 단 한번만 하면 되고, 그 이후로는 자백만 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회개(메타노에오)라는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회개(메타노에오)라는 단어는 단회적인 뜻으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죄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사용되어진다. 구원파가 자백을 하면 된다는 주장을 하는 배경에는 "죄가 더이상 없다"는 주장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백이란 단지 죄가 있다는 것만 고백하면 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며 그것은 회개의 뜻이 아니다. 먼저 구원파의 주장을 살펴보자.
△ 회개와 자백 : (1) 회개의 두 가지 의미 첫째, 회개의 의미는 죄인이 죄악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삶의 전환을 가르킵니다. 일생에 단 한번뿐인 회개입니다. 두 번째, 회개는 자녀가 아버지에게로 잘못을 고하고 돌이키는 회개, 즉 자백을 말합니다.(예수교복음침례회, 생명의 말씀선교회 홈페이지)
△ 당신이 참된 마음으로 자백하면 그는 즉시 용서해 주시며, 비로소 당신은 깨끗함을 얻어 하나님과의 교제를 계속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백과 회개를 잘못 이해하고 혼돈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회개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고 자백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회개는 일생에 한번이고, 자백은 매일매일 생활에서 따르는 것입니다. 회개는 사단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중생을 말하고, 자백은 하나님의 아들된, 즉 중생한 자들이 생활의 잘못을 용서받는 것을 말합니다. (딕욕선교사의 양육편지 중에서)
△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6:12): 우리 죄를 사하여 달라는 기도를 오해하면 안된다. 요13:1-11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는 모습이 나온다. 이미 목욕한 자는 구원 받은 자를 얘기하고, 발씻는다는 것은 이미 구원받은 자가 생활 속에 짓는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는 구원받은 후의 생활 속에 짓는 죄에 대한 자백, 부분적인 회개인 것이다.(예수교복음침례회, 생명의말씀선교회 홈페이지)
△ 구원 받은 후에 죄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자백을 통해서 해결하면 됩니다. 영원한 속죄는 지옥갈 죄에서 해방되는 것으로 회개를 통해 단번에 되는 것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 짓는 죄는 그때 그때 자백을 해서 처리하고 다 용서를 받아도 징계를 겪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복음침례회, 권신찬)
보시다시피 구원파는 회개는 일생에 단 한번만 하면 되고, 그 이후로는 자백만 하면 된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예수의 대속으로 인하여 이미 죄가 없으며 의인이 되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구원파의 교리를 깨달으면 그 시간에 이미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가 다 없어졌고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박옥수계열의 구원파는 더욱 과장되어 아예 죄가 전혀 없으므로 자백조차 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회개를 하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이므로 천국에 갈 수 없다고 주장한다.
△ 우리 선교회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구원의 복음을 증거한다고 하는 단체들은 많지만 구원의 역사가 없는 것이 다만 안타까울 뿐입니다. 구원의 선이 애매해져 있어서 교회만 나오면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인정만 하면 여전히 마음에 죄가 남아있어도 천국에 갈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는 그 기준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기쁜소식선교회 홈페이지)
△ 특히, 몇몇 이단 종파에 속한 사람들을 만나보면 성경적으로 분명히 잘못되었지만, 자기들이 주장하는 교리를 바른 믿음으로 고집하기에 마음이 말씀 앞에 여리고 성처럼 굳게 닫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정통 신앙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참 많은 사람들이 성경적으로 바르지 않은 믿음을 참 믿음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그릇된 믿음 중 하나가 바로 ‘비록 죄가 있지만, 예수를 믿기에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기쁜소식선교회)
△ '회개'는 신약 성경의 헬라어 원어로 메타노이아(metanoia)인데 이것은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다. 돌이키다. 마음을 변경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을 떠난 길에서 하나님께로 마음의 방향을 전환시킨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지은 죄를 고백하고 뉘우치며 그 죄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는 것이 회개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기쁜소식선교회 홈페이지)
구원파는 회개라는 단어의 두가지 의미를 모른다. 회개(메타노에오)라는 단어는 '방향수정'이라는 뜻으로서, 성경에서는 2가지의 의미로 사용되어 진다. 회개가 단회적일 때는 믿음의 과정에서 거듭남을 말하지만, 성경에서는 분명히 반복적인 죄의 경우에도 사용되며, 그 때에는 죄에서 돌이키는 반복적인 성화의 과정을 말한다. 성경은 반복적인 죄에 대한 회개도 분명히 언급한다.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눅 17:4)
일곱 번을 회개하라는 것이 단회적일까? 이 회개라는 단어가 일상적인 죄에 대한 반복적인 경우에도 사용된다는 성경적인 증거이다. 즉 성경에는 죄에 대해서도 “회개”(메타노에오)라는 단어가 분명히 사용되었다. 구원파가 주기도문을 부정하는 이유는 주님이 가르쳐준 기도문이 반복적인 회개와 죄사함에 대한 교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곱 번 죄 지은 자가 일곱 번 반복하여 회개하면 용서하여 주듯이 주님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신다는 것이 주기도문의 내용이다. 일생에 한번 회개하라는 구원파의 주장은 분명히 비성경적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성경에는 일상적인 죄에서도 “회개하라”고 말하고 있으며, 회개는 일생에 한번만 하고 자백만 하면 된다는 구원파의 주장과 다르다. 주기도문은 주님께서 가르쳐준 "이렇게 기도하라"는 일상적인 기도문의 예입니다. 그래서 구원파는 주기도문을 거부한다. 성경은 죄로부터의 회개에 대해서 분명히 말하고 있다. 자백이 아니라 회개이다
(베드로가 시몬에게 악함을 회개하라고 충고하는 내용)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행 8:22) (바울이 음란과 호색함의 범죄를 지은 고린도교인에게 회개하라는 내용)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아니함을 인하여 근심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 12:21) (죽은 행실을 회개하라는 것은 다시 닦지 않을 기본원리)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히 6:1~2)
또한 계시록 2~3장에는 일곱 교회에 대한 회개가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범죄와 악함으로부터의 회개이다. 즉 일곱 교회에게 성령께서 회개하라고 경고하신다. 또 세리는 자기가 죄인이라고 회개를 하였는데, 바리새인보다 의롭다하심을 받았다고 성경은 말한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눅 18:13-14)
5. 이원론적 주장 1) 육체에 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구성요소에 따른 신학적인 견해에는 이분법과 삼분법이 있다. 다만 우리가 주의하여야만 하는 이원론이라는 주장은 이분법이든 삼분법이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살아서 영(또는 영혼)과 육체를 분리시키는 견해를 뜻한다. 즉 살아있는 총체적이고 전인적인 사람을 영과 육을 장소적인 개념으로 분리시켜, 영에는 하나님이 거하고, 죄가 없으며, 육에는 사탄이 거하며 죄가 있다고 가르치는 주장이다.
① 영혼의 구원: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영혼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육신의 죄성은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② 구원받은 사람도 죄를 짓는 이유: 사단은 공중권세를 가진 자이며 인간육체를 통해 역사합니다. ③ 구원받은 사람이 범하는 죄의 유형 첫째는 부지 중에 짓는 죄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육신에 아직 죄성 가운데 있기에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올라오는 죄입니다.(대한예수교복음침례회 이요한, 생명의말씀선교회 홈페이지).
히브리어 ‘바사르’와 헬라어 ‘사르크스’는 대부분의 경우, 전인적이며 총체적인 인간자체를 표현할 때에 사용되어진다. ‘육체’라는 단어는 ‘영(영혼)’과 대조되어지는 의미로도 사용되지만, ‘인간 자체’를 말한다. 당연히 영혼을 배제한 고깃덩어리의 육체가 욕망과 죄악을 갖지 않는다. 바울은 거듭난 사람과 거듭나지 못한 사람을 대조시키면서, ‘육신에 있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고 하였으며, ‘영을 좇는 자’는 "성령을 좇는 삶‘을 말한다. 다시 말하여 성경에서 ’육체‘라는 표현은 ’총체적인 인간‘을 말함으로서 ’성령 하나님‘과 대조되는 경우로 사용된 것이다. 또한 육신에 죄가 거한다는 표현은 사람이 곧 성령을 거스르는 인간의 욕망이라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육체의 소욕(인간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하나님을 따르는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7) 즉 본문은 인간의 육체와 영이 구별되고 대조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인간과 ‘영’이신 성령하나님이 비교되는 것이다. 히브리어 ‘루아흐’ 혹은 헬라어 ‘프뉴마’로 표현되는 ‘영’이란 때로는 인간의 영, 즉 인간의 내적인 생명력 혹은 신적 실재와 접촉하는 직접성과 관련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성령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태어난 후에 성령으로 다시 거듭나야만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앞서 말하였듯이, 바울이 말한 ‘육신을 좇는 소욕’의 개념은 사람을 육과 영으로 분리하고 구별하여 고깃덩어리의 육체적인 부분의 소욕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와 보호를 좇는 삶’과 반대되는 개념을 뜻한다.
바울은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을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고 표현한다. 다시 말하여, 바울이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는 것은 영과 육신을 분리하자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표현이다. 다시 말하자면, 바울이 표현한 영에 있는 자는 거듭난 사람을 뜻하며, 육신에 있는 자는 성령이 없는 거듭나지 못한 자를 뜻한 것이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 3:6~7)
즉 바울이 말한 ‘육체의 소욕’이란 영혼을 제외한 고깃덩어리만의 육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성령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에 반대되는 총체적인 인간의 소욕을 말하는 것이 명백하다.
위 성경본문 요한복음 3:6~7은 “성령으로 난 것이 영”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그 영을 강퍅하게 하셨다"(신 2:30)는 것처럼, 성경은 불신자에게는 영이 없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즉 우리가 불신자였을 때에 그 ‘영’이 없거나 죽은 것이 아니라, 그 영이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졌음을 뜻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하나님과 단절된 영은 죽은 것이며, 그는 곧 ‘육신에 있는 자’로 표현된다.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였을 때에, 그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영적인 죽음도 함께 포함되어졌다. 바울이 허물과 죄로 죽었으나(엡 2:1)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가 되었다(롬 6:11)고 말하였을 때에, 영과 육을 구별하고 분리하자는 뜻이 아니다. 우리의 영만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으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고후5:17)
물론 인간은 죽어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다.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서 썩지만, 영혼은 하나님의 곁으로 가게 되며, 썩지 않을 신령한 몸의 부활을 기다리게 될 것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언급하는 바와 같다. 그러나 인간은 살아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지 않으며, 성경에서 육체라는 표현은 대부분 영과 분리되는 개념이 아니라, 총체적이며 전인적인 인간 자체를 표현한다. 성경에서는 인간이 살아서 육체와 영혼이 분리된 경우가 언급되지 않는다. 야고보서 2장26절과 같이, "영혼없는 몸은 사실상 죽은 시체"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방교회, 베뢰아, 구원파 같은 곳에서는 죄가 육체에 거한다고 하는데, 죄는 그 자리를 육체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과연 영혼(혹은 영)이 배제된 육체가 죄를 지을 수 있는가? 또한 죄란 물질명사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헬라철학적인 이원론자들과 영지주의, 마니교 등은 이 세상의 근원을 영(선)과 물질(악)의 두 가지로 구별하려고 하며, 모든 창조의 근원을 하나님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신의 두 세력으로 양분하려고 한다. 즉 세상의 악은 모두 사탄으로부터 온다고 간주하며, 물질은 악한 것으로 간주하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로부터 초래된 것으로 봄으로서, 육체는 근원부터 악하고 죄가 거하는 좌소이며 악신이 거하는 장소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한 헬라철학은 초대교회 영지주의 이단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인이라고 할 때에는, 우리의 육체만이 죄인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인적인 인격이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간주 되는 것이다. 육은 그 자체만으로 악하거나 악의 원천이 되어 지지 않는다. 예수님이 죄 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육체에 죄가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며, 인간자체가 죄인이라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육체를 가진 인간은 그 능력에 있어서 약하고 힘없는 존재가 된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살전 5:23)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 7: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4:11)
육체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도 혼도 죄를 짓는다.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의 대로이니 자기의 길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soul)을 보전하느니라.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spirit)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 16:17~18)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네페쉬)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시 41:4)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spirit)을 감찰하시느니라” (잠 16:2)
마찬가지로 육체만이 죄악되고 더러운 것이 아니라, 육체도 영과 함께 전인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 63: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 84:2)
2) 죄는 전인적으로 마음에 있다. 죄는 마음 안에 있으며, 인간의 마음은 육체와 영혼의 전인적인 기관으로서 존재한다.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heart)을 주고 그 속에 새 신(spirit)을 주며, 그 몸(flesh)에서 굳은 마음(heart)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heart)을 주어서"(겔 11:19) 성경적으로나 상식적으로 인간은 영(영혼)이 배제된 육체가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죄를 짓는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히: 레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마는"(렘 17:9) "마음(헬: 칼디아)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마 15:19)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헬: 칼디아)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5)
즉 성경에서 ‘육체의’ 라는 말은 ‘죄많은’ 이라는 단어와 동일시되어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육체 자체에 죄가 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육신을 가진 인간 자체가 연약함으로 유혹의 목표가 되어지기 때문이다. 어떤 헬라인 이원론자들과 같이 죄가 육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그 영향과 활동이 지정의에 미쳐 전인적으로 죄가 파급되어지는 것이다.
6. 기타 이단성
1) 양태론 게다가 구원파의 이단성은 구원론에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임박한 종말론과 극단적 세대주의, 엉터리 알레고리적인 성경해석, 요한계시록의 자의적인 해석 등 매우 많다. 그리고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라, 2000년 동안 이단적인 신론이었던 성부고난설이다. 정통삼위일체는 본질적으로는 하나이지만, 인격적으로는 상호교류를 할 수 있는 구별된 셋이어야만 하는데, 양태론은 단일신론으로서 한 인격의 세 양태를 주장한다. 양태론의 대표적인 비유는 물과 얼음과 수증기의 비유, 집에서는 아버지, 교회에서는 집사, 회사에서는 과장인 사역적인 구별을 삼위로 비유하는데 이것은 모두 잘못된 유비이다.
양태론을 인정한다면, 예수가 곧 하나님 자신이 되므로, 불사의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게 되므로 초대교회부터 성부고난설이라고 불렸던 이단적인 신관이 된다. 또한 양태론을 인정한다면, 성령이 재림예수가 되므로 예수의 재림을 부정하게 되며, 양태론을 인정한다면,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로 바쳐진 예수와 그것을 온전히 받으시는 하나님이 동일인물이 되어버리며, 기도를 하는 예수와 기도를 받는 하나님이 동일인격이 되어 진다.
2) 종말론 구원파는 수십 년 전부터 임박한 종말을 주장하여 왔다. 그들은 세대주의적인 주장으로서 6000년을 인류사로 간주하고 구약 4000년과 신약 2000년이 지나면 종말이 오는 것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은 무화과나무를 이스라엘로 보아 1948년 이스라엘 독립을 열매로 해석하고 한세대 안에 종말이 온다고 주장하여 왔다.
또 유럽연합(EC)을 열 뿔이라고 비유하여 유럽연합이 10개국이 되면 재림이 온다고 주장했지만, 현재 유럽연합은 27개국이며, 특히 기독교복음침례회의 권신찬 목사는 십 수 년 전부터 기차가 종착역에 도달하였다고 계속 주장하였지만, 그가 사망한 후에도 종말은 결코 오지 않았다. 이러한 종말론에 대해서도 구원파들은 다니엘서와 계시록에 대한 비유적인 해석에서 서로 다른 주장을 하기도 하지만, 극단적인 세대주의적인 종말론은 거의 유사하다. 이요한씨는 유럽연합이 지금은 27개국이지만 다시 10개국이 될 것이라고 자의적인 추측으로 주장할 뿐이다. 그러나 유럽연합이 27개국이 되었다가 다시 10개국이 된다는 그러한 성경은 어느 곳에도 없다.
구원파는 적그리스도가 이미 존재한다고 수십 년 전부터 말했지만, 어느 누구도 적그리스도로 나타난 적이 없다. 또한 최근에는 666을 베리칩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매우 임박한 종말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며, 십 수 년 전부터 곧 종말이 임박하였다고 가르쳐왔다. 구원파 교인들은 다른 교회에는 구원이 없으며, 오직 구원파 만이 참 교회라고 가르쳐 왔고, 곧 임박한 종말이 온다고 하니 구원파의 교인들은 그 교회를 떠날 수 없었다.
3) 극단적 세대주의 사상과 알레고리적(풍유적) 성경해석 계시록과 다니엘서등의 자의적인 해석, 변질된 세대주의적 전천년론 종말론, 재창조론이라고 불리는 간극론, 극단적세대주의/변질된 세대주의
[알레고리적인( Allegorical, 풍유) 해석] 열뿔 : 유럽연합 666 : 베리칩, 컴퓨터, 은행카드 동방 : 우리나라, 중국 적그리스도 : 미국 대통령, 이스라엘 수상 무화과나무 : 이스라엘 독립 1948년 음녀: 가톨릭, 자유의 여신, 기독교 간극론: 창1:1과 1:2 사이에 간극이 있었다는 주장
대표적으로, ‘무화과나무의 비밀’을 이스라엘 1948년으로 비유하는 해석을 보자.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2-3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 지어다”(마24:15-16)
AD 68년, 로마 베스파시안이 예루살렘으로 진군하였을 때, 유대인들은 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하였다. 특히 “산으로 도망하라는 예언”을 기억하였던 유대인들은 ‘벨라’라고 하는 산악지역으로 도망함으로서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다(W. Hendrikson)
마태복음 24장은 다니엘서가 기록한 AD 168년,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의 “멸망의 가증한 것”이 뜻하는 예표적이며 상징적인 의미를 이 성경구절을 읽는 유대인들은 다시 깨달으라는 뜻이며, BC 168년의 사건을 통하여, 장차 일어날 AD 70년의 티투스의 예루살렘 멸망사건을 다시 예언한 것이다. 그 증거로 누가복음은 평행구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눅 21:20) “마태복음 24장에서 많은 독자가 종말의 표적을 찾느라 이 장을 열심히 살펴보지만 이 장의 많은 부분 특히 이 대목의 주제는 (그 어떤 의미에서든) 너무나 쉽게 종말이 임박했다고 결론짓는 것은 위험하다” (Richard. T. France, IVP 성경주석 1286쪽)
우리는 그 날을 아무도 모른다는 이 말을 반드시 기억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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