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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치만 니를 계승한 지방교회 교주 위트니스 리

 

                                  지방교회가 주장하는 상호내재의 비판

  

                                                                                                        이 인규

 

1) 상호내재(페리코레시스)의 의미

 

“나는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요14;10, 11)

참으로 어려운 내용이다.

“서로가 서로의 안에(in) 거하는” 상대적이며 복합적인 상호내재를 말하고 있다.

자칫 문자적으로 생각하면, 뱀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서로의 몸을 자신의 안으로 삼키는 것을 연상시킨다. 서로가 서로의 안에 거하는 이러한 상태를 어떻게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성경구절이 초대교회에서 양태론적인 삼위일체를 야기시켰던 문제의 구절이었다. 이것을 초대교회 교부들은 “페리코레시스”라고 불렀는데, 그 어원은 셋이서 손을 붙잡고 춤을 추는 윤무(輪舞)를 뜻한다.

 

지방교회의 신론은 누가 보든지 양태론이 명백하므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려고 한다.그런데 지방교회는 자신들이 양태론이 아니라고 반박하는데, 그 이유는 자신들이 상호내재를 주장하고 있으며, 초대교회의 교부들과 어거스틴도 상호내재를 주장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게다가 다락방을 이단이 아니라고 지지하던 신학대학의 N 교수도 다락방이 상호내재를 주장하므로 양태론이 아니라고 옹호를 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상호내재에 관하여 위트니스 리의 주장을 들어보자.

 

- 그 셋은 결코 분리되지 못한다. 그 셋은 항상 동시존재하며 상호내재한다. 한 분이 이곳에 있을 때에 셋 모두가 이곳에 있다. 분리됨이 없다.(위트니스 리, 하나님. 288쪽)

 

위트니스 리는 성부하나님 안에 성자예수님과 성령 셋이 함께 동시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절대 분리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구약의 하나님 안에서도 성자예수와 성령님이 함께 동시존재했고,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안에도 하나님과 성령님이 함께 동시존재했으며,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려 죽으실 때에도 그 안에 하나님과 성령님이 함께 동시존재했다는 것이다. 물론 부활 후 성령 안에서도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이 동시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위트니스 리는 이렇게 주장한다.

 

- 어찌 주님이 기도하시는 아들과 그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가 될 수 없겠는가? 기도하는 것을 듣고 계시는 아버지는 기도하는 아들이시며, 기도하는 아들은 또한 그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이다.(신약의 결론. 하나님 323쪽)

 

그런데 위트니스 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도 한다.

 

- 그러므로 요한복음17장에서 기도하고 계셨을 때, 그분은 땅에 계셨으며 동시에 하늘에 계셨다. 그 분은 땅에서 기도하고 계신 분이셨으며 동시에 하늘에서 기도를 들으셨던 분이시기도 했다.(하나님 323쪽)

 

이것이 과연 한 인격 안의 동시존재인가? 한 분은 땅에 계시고 한 분은 하늘에 계시는데 어떻게 동시존재라고 말하며, 어떻게 분리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앞뒤가 서로 맞지 않은 이상한 주장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지방교회는 이것에 대해서 일과 기능에 의한 경륜적삼위일체로 설명한다.

 

2) 상호내재의 교리사적 배경

 

초대교회의 갑바도기아 교부들과 어거스틴이 사용하였던 “상호점유”(페리코레시스)라는 용어는 서로가 서로의 안에 거하는 형태를 의미하였던 단어의 개념이었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세 요소, 혹은 세 성분이 한 하나님 안에 존재한다는 주장으로, 이러한 주장은 훗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동일한 인격이라는 양태론으로 발전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물론 지금도 지방교회, 베뢰아등은 이러한 양태론을 주장하고 있으며, 이들은 초대교회 교부들도 이런 주장을 갖고 있었으므로 자신들이 정통신학이라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초대교회 교부들이 갖고 있던 주장이었으므로, 정통삼위일체라는 주장은 잘못된 주장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다시 말하여 초대교회 교부들의 주장은 정통신학이 정립되어가는 과정에서 있었던 고전적 삼위일체로서 그 주장을 정통삼위일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는 것을 교회사적인 교리를 공부한 사람은 알고 있다.

 

특히 어거스틴이 주장하던 상호내재라는 용어는 삼위일체 이론이 발전되어가는 과정에서 존재했던 용어로서, 양태론이라는 오해를 받았던 용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즉 그 "페리코레시스"라는 "상호점유"란 개념은 위격의 구별성과 위격의 상호관계를 설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의문과 비난을 받았던 견해이었다.

 

성자는 성부에게 기도를 하고, 성부와 성자는 성령을 파송시키며, 성자예수는 성부에게 온전히 바쳐진 화목제물이 되며, 성부 하나님은 그 제물을 온 인류의 대속물로서 온전히 받으셨다.....이렇게 인격적으로 상호구별되어지는 삼위가 한 인격, 한 장소 안에 동시존재하는 삼위라고 한다면, 상호관계가 가능한 인격적인 구별이 도저히 설명되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지방교회는 아래의 자료들을 절대로 인용하지 못할 것이다.

 

- 갑바도기아 모델의 장점부터 얘기하자면, 상호점유론으로 대표되는 사상은 의심할 바 없는 진보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시대에 횡행하던 이단들에 대항한 싸움에서 천재적인 일격을 가한 것이라 묘사할 수 있는 중요한 기여였다. 갑바도기아 모델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위격들 각각이 서로 혼란이 없이 충분한 신성을 소유하고 있음을 주장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제럴드브레이의 신론 191쪽)

 

초대교회에서 삼위일체가 정립되어져 가는 과정에서 종속설이라는 주장이 나타났다. 삼위의 신적본질이 동등한 것이 아니라 성부가 가장 크고 성자는 좀 열등한 신적본질을 가졌다는 주장으로서 요14:28의 “아버지는 나보다 크다”는 구절을 근거로 한 것이다. 물론 질서적인 종속관계는 인정하더라도 삼위의 신적본질을 동일한데, 그러한 종속설을 반박하는 성경적인 증거가 바로 상호내재였다. 아버지와 예수는 하나이며, 아버지 안에 예수가 있고 예수 안에 아버지가 있다는 이 성경구절은 종속설을 멋지게 반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상호내재를 장소적이며 공간적인 개념으로 이해를 할 때에 상호교류가 가능한 삼위를 구별할 수가 없었으며, 분리될 수 없음을 주장하다가 성부가 성자와 성령을 파송한 것에 대해서 설명할 방법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 또한 이 말은 모든 신적인 속성 각각이 세 휘포타시스 모두에게 똑같이 돌려진다는 의미다. 즉 세 휘포타시스는 모두 전능하며 전지하며 영원하다. 이 교리는 종속론의 문제를 피하게 해주며 사벨리우스주의나 서머나의 노예투스의 성부고난설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골로새서2:9 “그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에 대해 적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상호점유의 개념은 오리겐의 위계질서적 모델을 기반으로 한 커다란 진보였다. 그러나 이 개념은 휘포스타시스들이 서로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느냐는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이 점에서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제럴드브레이의 신론, 186-187쪽)

 

즉 초대교회 교부들이 주장하는 상호점유는 세 휘포스타시스(위격)들이 "서로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느냐는 의문"을 불러 일으켰다. 이 점에서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초기이론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이다. 즉 세 위격이 상호점유(페리코레시스)라는 형태로 동시존재한다는 주장은 상호간에 구별되는 인격에 대한 성경구절을 설명할 수가 없으므로, 비판을 받았던 주장이라는 것이다.

페리코레시스라는 단어는 예수와 성령이 하나님의 신성을 공유한다는 증거를 제시하였으며, 초대교회의 이단적인 종속론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결정적인 성경적인 증거를 제시하여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용어는 삼위일체가 전개되고 발전되어져 가는 과정에서 하나의 진보적인 이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휘포스타시스는 삼위가 구별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의문을 일으켰고, 그래서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페리코레시스는 성공적인 삼위일체 이론이 아니었다는 평을 받게 된다.

 

- 개념적인 면에서 그들은(갑바도기아 교부들) 휘포타시스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바르게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들의 사고에서 그 용어는 우리가 '위격'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에 연상하는 충만한 의미상의 발전에 완전히 도달하지 못했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92쪽)

 

상호내재는 위격들의 상호점유[co-inherence of the persons: 헬라어로는 perichoresis, 라틴어로는 circuminsessio]라고 한다. 원래, 헬라어 “페리코레시스”는 상호교류나 상호순환, 혹은 상호상통이라는 개념(영적 교류)에 가깝다. 원래 페리코레시스(상호점유)라는 단어는 오리겐의 종속설과 이단들의 주장에 대항하여 제시된 단어였으며 이것을 장소적이며 공간적인 개념으로만 보아서 분리될 수 없다고 설명하면 곤란하며, 영적인 교류를 의미하는 상호침투와 같은 동적인 개념을 포함하여야 한다.

 

“한편 세 번째 소주제인 페리코레시스 이론과 관련하여 헬라어인 페리코레시스 용어 그 자체를 분해해 보면, 페리코레시스 용어는 다소 정적인 의미가 들어있는 상호내주의 의미도 포함하지만, 다소 동적인 의미가 들어있는 상호관통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상호관통(상호상통)의 의미에서의 페리코레시스에 관한 진술이 아타나시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위격들의 삼위성에 관하여 진술할 때, 상호내재(공통내재)의 의미에서만 그들의 이론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김석환의 교부들의 삼위일체론, 349쪽)

 

갑바도기아의 세 교부 중 한 사람이었던 바실은 페리코레시스(상호점유)에 대해서 이렇게 강조하였다.

 

- 위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바실은 삼위의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통해서’, ‘안에서’ ‘함께’ 라는 낱말을 구사하면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본성적 상호교류 또는 대자적 관계성을 강조했다. ..... 그는 신성의 통일성과 단일성을 강조하다가 군주신론에 빠진 데오도투스나 사모사타의 바울을 경계했다.(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51쪽)

 

3) 성경적인 상호내재의 개념

 

본인은 상호내재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다만 본인이 믿고 지지하는 상호내재란 지방교회와 같은 양태론적인 개념이 아니며, 성경적인 개념의 상호내재이며, 정통신학이 말하는 상호내재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그렇다면 성경에서의 실제 예를 살펴보고, 정통신학이 말하는 상호내재가 무엇인지 살펴 보자.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12:5)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많은 사람은 모두 한 인격일까? 많은 사람이 한 몸 안에 동시존재하며 상호내재하는 것을 말할까? 아니면 믿음으로 인한 유기체적인 영적연결을 뜻할까?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예수를 믿는 자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유대인과 헬라인과 종이나 자주자와 남자나 여자가 모두 한 인격이며 한 장소에 동시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한 믿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다음 구절을 보면 확실하게 나타난다.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빌1:30)

 

빌립보교인은 실제로 바울의 안에 거하는 내재를 뜻하였을까? 아니면 한 믿음 안에서의 유기체적인 영적연결을 의미하였을까? 감옥에 있는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의 안에 인격적으로 동시존재하며, 빌립보교인들의 인격이 바울의 인격 안에 내재하였을까?

 

즉 앞에서 말한 요한복음의 상호내재는 “인격 안의 인격”을 의미한다고 해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삼위의 유기체적인 영적교류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여야 하며, 그것이 정통신학적인 개념이 된다. 그렇다면 정통신학에서 상호내재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확인하여보자.

 

[요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성부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 인격적으로는 구별 되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심을 말한다.

[요14:20] 내가 아버지 안에....하나님과 예수님과 믿는 이들 사이의 친밀한 영적결합을 의미한다. (오픈2 주석성경)

 

정통신학에서는 “상호내재”란 "본질적인 하나" 혹은 "유기체적인 영적연합"을 의미한다. 즉 “인격적으로 구별되는 영적연합”을 의미한다. 웨슬레목사도 역시 상호내재를 고유의 인격성을 강조하는 가운데 주장한다. 웨슬레는 그 상호내재를 본질의 "일치" 혹은 "단일성"으로 해석하며, "구별된 인격"을 주장한다. "서로가 상대방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철저하게 비우고 거부하고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고 말하였다. 즉 "단일적인 본질의 일치"와 “구별된 인격”을 동시에 말하는 것이다.

 

- 웨슬리는 성부, 성자, 성령, 각자가 지니고 있는 고유의 인격성을 강조하며, 삼위의 상호내재를(성부와 성자가 성령과 함께 내재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표현하는 신학적 용어로 '상호내재'(perichoresis)를 사용한다. 이 말은 "서로가 상대방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철저하게 거부하고 포기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비우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 안에,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상호내재함으로써 서로간의 일치를 이룬다. 이와 같은 상호내재의 속성에 의해서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 분리되지 않으면서 서로 구별이 된다. 이로서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 구별될지라도 서로 분리되거나 떨어지거나 나뉘어지지 않는 단일성을 갖게된다(김영선의 웨슬레 신학)

 

조직신학자인 웨인그루뎀도 다음과 같이 상호내재를 설명한다.

 

- 그(예수)는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했는데 이는 우리의 연합이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와 성자 사이의 완전한 연합과 같게 되기를 기도하신 것으로, 우리의 하나됨은 영원하고 완전히 조화를 이룬 것이어야 함을 (하나님의 하나됨과 같이)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삼위를 통한 비유가 대단히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개개인의 성품을 흡수해 버리지는 못할 것을 경고하기 때문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완전한 연합을 이루고 있음에도 그들은 독립된 삼위이다. 마찬가지로 어느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다른 신자들과 함께 완전한 연합을 이루게 되겠지만, 우리는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능력, 관심 책임, 친구관계, 선호도, 욕망등을 소유한 독립된 개체로 남아 있을 것이다.(웨인 그루뎀, 조직신학 중권, 557쪽)

 

루이스 벌콥은 지방교회와 같은 신비적이며 위험한 이단적 신인합일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음을 알기 바란다.

 

C. 신비적연합의 그릇된 개념들. 2. 신비적 오류:

다른 위험한 오류는 신비적 연합을 신자와 그리스도의 동일성으로 이해한 신비주의자들의 그것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신비적 연합에는 본질의 연합이 있으며, 거기에는 한편의 인격성이 단순히 다른 편의 인격성으로 합체가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신자는 두 개의 구별된 인격들로 남아있지 않는다.(루이스벌콥, 벌콥조직신학 하권, 199쪽)

 

지방교회의 주장이 오류가 되는 성경적인 증거가 있다.

요한복음14:10을 상호내재의 근거로 본다면, 다음 성경 구절은 성부, 성자, 성도를 포함하는 상호내재가 되어지지 않는가? 지방교회는 성령을 제외한 성부, 성자, 성도의 동시존재적인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곳인가?

 

"그 날에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

 

이 성경구절은 "아버지와 아들과 믿는 성도들의 삼위일체"가 된다고 해석하는가? 지방교회의 상호내재란 성부와 성자와 성도의 동시존재를 의미하는가? 그래서 성경본문은 유기적인 연합에 의한 단일성이라고 보아야만 한다.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에 거하고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요일2;24)

 

상호내재란 같은 믿음, 같은 사랑, 같은 목적으로 연결된 유기체적인 영적인 연합을 가르킨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우리 안에 예수가 Master(주)가 되심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는 예수라는 뿌리에 연결된 가지가 되므로서 열매를 맺게 되어지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15:10)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다는 것을 말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엡3:17)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라.“(고후13:5)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3:26)

 

믿음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서로의 안(in)에 거하는 상호내재가 되는 것이다. 상호내재가 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위트니스 리의 주장과 같이 감추어진 비밀이 아니었으며, 특이하게 성경을 달리 해석하여야만 알수 있는 것이 아니며, “믿음으로 인한 연합”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포도나무의 뿌리와 가지같은 유기체적인 연합을 뜻한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하셨으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고전7:15-17)

 

창기와 합하는 자는 창기와 한 몸이 되어진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두 인격이 한 인격으로 합체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본질적으로 창기와 같은 성적 탐욕을 가진 동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창기와 실제적인 연합이나 한 몸, 한 인격이 아니라, 영적인 동질성 혹은 동류성을 뜻하는 것이다. 창기와 합하는 자는 실제로 두 몸이 한 몸으로 변화하는가? 그렇다면 창기는 수백 수천 인격이 함께 동시존재, 상호점유하는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합하는 자는 주님과 한 영이 된다는 것은, 실제로 사람이 그리스도와 합하여 한 인격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유기체적인 영적 연결을 뜻한다. 즉 창기와 합하는 자가 창기와 한 인격이 되는 것이 아니라, 창기와 같은 영적인 동질성을 의미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합하는 자는 그리스도와 실제로 한 인격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영적인 동질성을 가진 사람이 되며, 그것이 “연합”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상호내재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전적 삼위일체라고도 불리는 초대교회의 교부들의 역사를 살펴 보자. 지방교회의 주장은 교회사를 조작한 것이다. 먼저 초대교회의 갑바도기아교부들이 주장하였던 상호내재에 대해서 알아보자.

 

- 우리는 위격들의 상호내재성, 즉 후에 이른바, 페리코레시스(교류, 상호순환)라고 불리우는 교리를 발견한다. 신성은 분할된 위격들 안에, 분할되지 않은 채로 존재한다. 세 위격들 속에는 '본성의 동일성'이 있다. 성자는 성부 안에 있고, 성부는 성자 안에 있다. 위격들의 구별에 따라서는 둘이 별개이나, 본질의 공유에 따라서는 하나이다. (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 바실 교부의 견해, 150쪽)

갑바도기아 교부중 바실은 또 이렇게 말하였다.

 

- 한 하나님 아버지, 한 독생자, 한 성령께서 계시다. 우리는 그 위격들의 각각을 따로 따로 선포한다. 그리고 그들을 함께 헤아려야만 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복수성의 개념에 대한 무지한 진술에 의해 당황하지 않는다. 우리는 오늘날까지 두 번째 하나님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을 경배할 때에 우리는 전제군주론을 고수하면서, 또한 동시에 위격의 개체성을 고백한다.(같은 책, 145쪽)

 

또 갑바도기아 교부중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는 양태론자들과 같이 위격을 혼동하지 않았으며, 단일신론자와 같이 실체를 분리시키지 않았다. 즉 위격은 구별되어야만 하지만, 실체는 분리되지 말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 초과됨이나 결핌함이 없고, 이 단일성은 혼동됨도 없으며, 또 나뉘었다고 해서 분리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사벨리우스의 (위격의) 혼동이나 아리우스의 (실체의) 나눔으로부터 똑같이 보호받을 수 있다. 사벨리우스와 아리우스는 정반대의 악들이지만 그 사악함에 있어서는 똑같이 악하다.(같은 책, 191쪽)

 

- 그레고리는 더욱 정확하게 세 위격과 한 본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위격은 개별적이며 구별되고 나뉘어지지만, 신격(신성)의 관점에서는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 그대는 한 빛의 섬광과 동시에 셋에 의하여 즉시 조명받아야 한다. 개별성이나 위격들에서는 셋이다. 또는 누가 그렇게 부르기를 원한다면 위(persons)에서는 셋이다. 왜냐하면 그 음절들이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는 한, 우리는 그 용어들에 대해서 시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체의 관점에서는 즉 신격의 관점에서는 하나이다. 왜냐하면 내가 만일 그렇게 말해도 좋다면, 위격들은 구분없이 나누이기 때문이다. 위격들은 구분 안에서 연합된다. 왜냐하면 신격은 셋안에서 하나이고, 그 셋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 셋 안에 신격이 있다. 또는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셋이 바로 신격이다.(같은 책, 217쪽)

 

물론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약간의 개인적인 관점이 다르며, 어거스틴 역시 그들과 다른 양상을 보인다. 그들의 견해는 고전적 삼위일체로 불리우며, 그들의 논리는 그 당시에 미완성적인 삼위일체론의 논리적 전개와 발전의 과정에 있었기 때문이다. 지방교회는 이러한 교부들의 견해중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만을 고의로 선택하여, 그들이 사용하였던 용어이었으므로 자신들의 양태론도 정통신학이라고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다.

 

4) 지방교회의 상호내재

캘빈 의 시대에도 세르베투스라는 양태론자가 있었다. 그가 주장한 내용이 바로 삼중적인 신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 캘빈이 그들에 관해서 말한 내용을 잘 검토해 보면, 세르베투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고대의 두 이단설이었던 사벨리우스주의와 아리우스주의를 교묘하게 혼합한 설을 가르친 듯 하다. 일면 세르베투스는 사벨리우스주의자였다. 캘빈이 말했듯이 세르베투스는 "신의 본질 안에 세 위격이 존재한다고 말할 때마다 삼중적인 신을 도입하는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단일성에 일치 않는 한, 이 삼위는 공상적인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234쪽)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이 문장에서 하나님은 히브리어상으로 삼중적이다. 더욱이 같은 장 26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가르키는 대명사 '우리의'를 사용한다."(위트니스 리,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두가지 비밀, 17쪽)

 

위트니스 리에게 상호내재적인 삼위의 개념은 한 인격, 한 영이라는 장소에 각각의 퍼센트에 의하여 포함된 성분과 같을 뿐이다

 

- 아들은 아버지의 체현이고, 그 영은 아들의 실제화이기 때문에, 최종완결인 그 영은 아버지뿐 아니라 아들도 포함된다. 수학에서 25 더하기 15 더하기 30은 70 이다. 70은 합계로서 25, 15, 30을 포함한다. 마찬가지로 최종완결의 그 영은 아버지, 아들, 영을 포함한다. 아버지, 아들, 영은 모두 그 안에서 최종 완결된다.(한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27

 

과연 지방교회가 페리코레스시스(상호내재)를 주장하기 때문에 양태론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과연 초대교회 교부들이 주장하였으므로 정통삼위일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들이 말하는 상호내재란 결국 구별되는 삼위(세 인격)가 아니라 하나의 인격을 말한다. 다시 말하여 그들이 말하는 상호내재의 삼위란 이름만 구별되는 삼위이며 한 인격, 한 실제, 한 영을 가르키는 것이다.....다음 위트니스 리의 글들을 보면 명백하게 알 수 있다.

 

- 그 셋은 결코 분리되지 못한다. 그 셋은 항상 동시존재하며 상호내재한다. 한 분이 이곳에 있을 때에 셋 모두가 이곳에 있다. 분리됨이 없다. (위트니스 리, 신약의 결론, 하나님. 288쪽)

 

즉 장소적으로 항상 동시존재하며 항상 상호내재한다는 개념은 정통삼위일체가 아니다. 그것은 구별된 삼위의 인격적 교류와 상호작용을 설명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위트니스 리는 한 영, 한 인격, 한 하나님, 한 실제를 말하고 있다.

 

-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과 그 영이 우리 안에 계심을 계시하여 준다. 그러면 몇 가지 인격이 우리 안에 있는가? 셋인가, 하나인가? 우리는 서로 다른 세 인격이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우리는 다만 삼일(三一)이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해야 한다. 하나님의 세 인격은 세 영들이 아닌 하나의 영이다. … 세 인격이 한 영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아버지도 있고, 아들도 있고, 성령도 있다(위트니스 리, 하나님의 경륜, 16쪽)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분리된 세 인격이나 세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은 한 하나님, 한 실제, 한 인격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이름으로 지칭된다. 이름은 그 인격을 지칭하며, 그 인격은 그 이름의 실제이다. 신성한 삼일성의 이름은 그 분의 인격과 동등한 신성한 존재의 총체이다. 하나님은 삼일, 즉 셋-하나이시다.(위트니스 리, 세부분의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 하나님. 52쪽)

 

- 우리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왜, 어떻게 이 한 하나님이 세 위격을 가지셨으며 가지실 수 있는가? 위격(person)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없다. 그것은 사람의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위트니스 리, 하나님, 290쪽)

 

초대교회의 양태론자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진짜로 구별한 것이 아니라, 단지 명칭만으로 구별하였을 뿐이다. 그들은 결국 아버지가 아들로, 아들이 영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하였으며, 위트니스 리도 동일하다. 즉 양태론은 성부가 성자가 되고, 성자가 성령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동시에 셋이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만, 자신들은 셋이 동시에 존재하고 상호내재한다고 가르치므로 양태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해하기 쉽도록 예를 들자면, 나의 일생에서 대학시절의 “나”가 있었고, 그 후에 “나”는 졸업을 하여 회사에 취직하여 샐러리맨으로 일하였고, 그 후에 “나”는 교회에서 이단연구를 하게 되는 세 과정과 세 단계를 거쳤다고 가정하자. 대학생이었던 “나”와 회사에서 근무했던 “나”와 이단연구를 하게 된 “나”는, 지금의 “나”라고 하는 사람 안에 상호내재하고 동시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구별은 실제적인 명칭이 아니라 명칭적인 구별일 뿐이다. 위에서 언급한 세 인격이 하나인가, 셋일까? 그 셋이 서로 상호교류가 되고 셋이 인격적으로 구별되는가?

양태론자들도 명칭상으로는 세 인격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하는 인격은 이름만 셋일 뿐이며, 실제로는 기능과 역할로서만 구별이 된다는 것이다,

특히 지방교회가 자신들이 상호내재를 주장하기 때문에 양태론이 아니라는 주장은 지나가는 소가 웃을 정도의 궁색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 이 말은(프로소폰: 라틴어 페르소나의 헬라어) 불행하게도 사벨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오용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형식적으로만 믿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란 자체 안에 있는 관계명칭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 외부세계와 가질 때 가지는 명칭뿐이라고 했다. 이름은 셋이나 실제는 한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는 당시 로마 교회 안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페르소나' 대신에 '프로소폰'이라는 말을 썼다. 이 말을 쓰면서 그는 삼위가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실체를 가진 분이 아니라, 기능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때로는 아버지로, 때로는 아들로, 때로는 성령으로 나타나서 특유의 기능을 발휘하나, 하나님과 별개의 휘포타시스를 가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하나님은 한때는 창조자로, 한때는 구속자로, 한때는 생명의 부여자로 나타났다는 것이다.(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98페이지)

 

- 터툴리안은 경륜주의가 가지고 있던 또 하나의 오해에 반대했는데,그것은 프락세아스의 가르침에서 알게 된 견해였다. 프락세아스는 알려져 있지 않은 이단으로서 어떤 학자들은 그를 사벨리우스라고 보기도 하지만, 프락세아스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서머나의 노예투스의 가르침에 가깝다. 프락세아스는 삼위일체의 위격들 사이의 구별은 진짜 구별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하나님의 세 이름은 구속의 형태를 설명하는데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 안에서의 어떠한 진정한 구별이 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부라는 이름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역활을 강조하며, 성자라는 이름은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그리고 성령이라는 이름은 성화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이 모든 작용의 역사자는 유대인의 성경에 나오는 그 한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람으로 성육했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셨다는 것이다.(제럴드브레이의 신론, 153-154쪽)

 

초대교회에서는 이러한 일과 기능에 의한 분류를 경륜적삼위일체라고 불렀는데, 삼위일체가 정립되는 과정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현재는 경륜적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칼 라너와 몰트만등에 의하여 다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초대교회에서의 고전적삼위일체가 정립되는 과정에서 경륜적삼위일체에 대한 내용은 곧 양태론적인 주장이었다.

 

- 그러나 이 견해는(필자주: 경륜적삼위일체는) 전체 교회의 지지를 획득하는 데 실패했다. 신학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동방의 3대 신학자와 아우구스티누스 후부터 경세론적 삼위일체론을 공적으로 지지하는 신학자는 없었다......이러한 이유에서 경세적 삼위일체론은 제4세기 이후부터는 신학영위의 중심부에서 밀려나고 말았다.(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57쪽)

 

- 그러므로 현대 학자들은 사벨리우스주의를 '양태론적 단일신론'이라고 부른다. 혹은 문제의 기능들이 하나님의 본질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자신의 외부관계를 '운영하시는' 방식을 가르키므로, '경륜적삼위일체'이라고 부른다.(문자적으로 '가정관리를 뜻하는 그리스어 오이코노미아에서 나온 말)"(윌리스턴 워커의 기독교회사, 101-102쪽)

 

- 이러한 유형의 경륜주의에 따르면, 구약성경은 성부에 대한 계시였으며, 성육신에서 승천에 이른 시기는 성자에 대한 시대였고, 오순절 이후부터의 시기는 성령에 대해 계시하는 시대라는 것이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51쪽)

 

무엇보다도 위트니스 리가 정의하는 경륜적삼위일체를 살펴보면 일과 기능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본질적이라는 것은 생존과 존재를 위한 것이며, 경륜적이라는 것은 일과 기능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본질적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그분의 존재를 가르키는 것으로, 그 분의 존재하심 안에 있는 거룩한 삼일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경륜적인 삼일성을 말할 때 이는 그분의 움직이심과 역사와 기능을 가르키는 것으로 그분의 경륜 안에 있는 거룩한 삼일성을 의미하는 것이다.(위트니스 리, 성령 69쪽)

 

- 경륜적인 면에서 그분은 아버지, 아들, 성령이시지만, 본질적인 면에서 그분은 한 하나님이시다......경륜적인 면에서 셋-아버지 아들, 성령-은 분리 된 것처럼 보이고, 각기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인 면에서나 우리의 체험면에서 볼 때 성령은 하나님과 동등한 위격이요 하나님 자신이다.(위트니스 리, 성령70쪽)

 

위트니스 리의 양태론은 변형된 양태론이다. 더욱 상세하게 설명하자면, 자신을 주장을 숨기고 위장한다는 점에서 양태론보다 더욱 위험하고 더욱 이단성이 높은 변형적 양태론이다. 그가 삼위의 상호내재를 주장한다고 하여, 양태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위장과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상호내재가 초대교회 교부들이 주장한 바 있었다고 하여 지방교회가 양태론이 아니고 주장하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주장이다. 아래 성경구절을 보면 동시존재가 잘못된 개념이라는 것이 곧 밝혀진다.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며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10:37-38)

 

"하나님"이 "예수"에게 "성령"을 부어주셨다.....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이 상호존재, 동시존재하는 동일한 한 실체라면 성경본문은 무엇인가?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안에 있는 예수에게, 자신의 안에 있는 성령을 부어주셨을까? 혹은 부어주시는 하나님에게도 삼위가 상호내재되어있고, 부음을 받으시는 예수에게도 삼위가 상호내재 되어있으며, 붓는 성령도 삼위가 내재 되어있단 말인가? 누가는 삼신론자인가 혹은 구위삼체론자인가?

위트니스 리의 아래 글을 보면 그는 상호존재, 동시존재를 주장하므로 그는 구위삼체론자가 된다. 파송하시는 성부에게도 삼위가 동시존재하고, 성자에게도 삼위가 동시존재하며, 성령에게도 삼위가 동시존재한다는 것인가?

 

-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삼일하나님이 삼일하나님을 보내셨다고 말할 수 있다. 요한복음14장26절에 의하면 삼일성의 첫 번째가 세 번째를 보내셨다. 그러나 세 번째가 보내심을 받았을 때, 그 분은 두 번째로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 더 나아가 요한복음15장26절에 의하면, 세 번째는 첫 번째에 의하여 보내심을 받았을 뿐 아니라 두 번째에 의해서도 보내심을 받았다. 세 번째가 오셨을 때 그분은 두 번째로 첫 번째와 함께 오셨다. 하나가 보내심을 받을 때에 모두가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 하나가 올 때 모두가 오는 것이다.(위트니스 리, 성령. 190쪽)

 

위트니스 리의 지방교회는 양태론자이다. 그들이 자신들은 상호내재를 주장하므로 양태론자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위장과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지방교회 스스로 알고 있을 것이다. 이들이 교회사적으로 상호내재와 경륜적삼위일체를 주장하면서 자신들이 양태론이 아니라고 변명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왜곡된 교리사와 위장으로 자신들을 감추는 것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국내의 정통조직신학자들은 지방교회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지방교회는 토론을 할 때에, 차영배교수의 책을 인용하기도 하며, 이종성박사. 김명용교수의 글을 인용하기도 한다. 즉 지방교회와 동일한 견해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차영배교수를 비롯한 국내의 학자들은 지방교회가 양태론이라고 말하고 있다.

 

- 몇 해 전에 최삼경 목사와 윗트니스 리측이 교리논쟁을 했다. 그 때 최삼경 목사가 윗트니스 리의 삼위일체론이 변형된 양태론임을 밝히자, 반대로 윗트니스 리 측에서는 최삼경 목사를 삼신론자라고 주장한 사실을 알고 있다. 그것은 결국 윗트니스 리의 양태론적 단일신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본다. 최목사가 논쟁 중에 윗트니스 리의 주장처럼 한 분 하나님(성자) 안에 다른 두 분 하나님이 들어와서 한 인격이 된다고 한다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예수님의 기도는 자기가 자기에게 기도하는 것이 되는데, 그것이 바로 양태론이다' 그리고 성자 하나님만 육신을 입었다라고 한 것을 가지고 삼신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양태론적 눈으로 보기 때문에 저지른 잘못이 아닐 수 없다.(차영배교수의 글에서 인용)

 

- 1996년부터 98년의 기간에 월간지 <교회와신앙>의 발행인 최삼경 목사는 윗트니스 리측과 벌인 논쟁에서 윗트니스 리의 삼위일체론을 변형된 양태론으로 규정한다. 필자는 최삼경 목사의 말에 동감한다. 그러면서도 필자는 윗트니스 리의 삼위일체론을 양태론이라고 말할 가치조차도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양태론은 합리주의적 이해에서 출발하는 삼위일체 이해로 나름대로의 전제와 논리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윗트니스 리의 경우는 논리성을 결여한 채로 겁없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전혀 부적합하고 불경스런 비유를 들면서 조잡한 설명으로 일관하고 있어서 신학적으로 논쟁할 가치조차 없음을 발견한다. 윗트니스 리는 너무 많은 비유와 설명으로 일관하고 있어서 일일이 들어 말할 수조차 없을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일이 대꾸하고 논쟁을 한 최삼경 목사의 노고를 치하한다.(김영재교수)

 

- 군주신론에도 몇 가지 유형이 있다. 동력적 군주신론(Dynamic monarchianism)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만 가지고 있을 뿐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하지는 않다고 보는 입장이다. 또한 종속적 군주신론이 있다. 때로는 양태론적 삼위일체론이라고도 한다. 아들과 성령은 세상에 있어서 하나님의 구체적인 존재양태에 지나지 않으며, 모든 면에 있어서 하나님 아버지보다 열등(劣等)하다고 한다. 따라서 참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뿐이다. 또 다른 한 가지 유형은 성부 수난설이라는 3위1체론으로서, 아버지와 아들은 완전동일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수난당하신 것은 사실은 성부 하나님이 수난당하신 것이라고 한다. 이 설은 초대교회에서 이단설로 정죄되었으나 그 후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강조하는 신학이나 설교 안에 끊임없이 재등장하는, 중요하고도 위험한 사상이다...........3위1체론을 말할 때 두 가지 말해서는 안 될 금물이 있다. 하나는, 3신(령)론이 1신(영)신론으로 발전한다는 생각과 하나님의 섭리에 실패와 변경이 있다는 두 가지 사상이다. 전자는 지방교회론자들에게서 발견되고(윗트니스 리 : 하나님의 경륜, 15쪽) 후자는 스코휠드의 세대주의에서 발견된다. 복음적이고 정통적인 3위1체 신관이 말하는 하나님에게는 발전이나 전진이나 개혁이나 변경이 없다........3위1체 하나님을 알기 쉽게 설명하려는 의도에서 이단적인 과오를 범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태양에 비유한다든가 물(H20)에 비유하는 과오를 범한다. 또 어떤 이는 수박에 비교하고 또한 생산품에 비교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신비적 존재양식을 불완전한 물건과 비교함으로써 신성을 모독한다."(이종성박사)

 

지방교회의 주장대로 라면 우리나라 정통조직신학자들이 다 삼신론이라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