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론의 공백]
                                                박 영 돈 교수

한국교회가 풀어야 할 시급한 문제는 성화의 부진함일 것이다. 성화의 부진함은 성화론의 부재와도 긴밀하게 관련된다고 본다. 학자들 간에 그동안 개신교 안에서 성화론이 제대로 발전되지 않아 성화론의 공백이 존재하다는 인식이 보편화되어있다. 칼뱅의 기독교 강요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삶, 성화가 핵심주제로 부각되었다. 칼뱅은 칭의에 앞서 성화를 다룰 정도로 하나님 앞에 경건한 삶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그를 성화의 신학자라고까지 칭송했다.

이런 칼뱅의 스피릿이 청교도 전통, 특별히 존 오웬이나 조나단 에드워즈의 작품에서 맥이 이어짐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 전통의 교의학에서는 대부분 그리스도인의 삶과 성화는 마이너 주제로 취급되었다. 오히려 정통주의에서 서자 취급하는 칼 바르트가 그의 교의학에서 성화(공동체적인 성화를 포함해서)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실제 신자의 삶과 목회 현장에서 가장 적실하고 요긴한 교리가 성화론인데 신학이 이런 실제적인 필요를 채워주지 못하였다. 여기서 신학과 목회의 괴리가 두드러진다. 다양한 경건서적이 이 공백을 어느 정도 메우는 역할을 해왔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경건서적은 대부분 성경과 신학에 기초하기보다 체험에서 출발하여 성경을 거기에 꿰어 맞추는 한계를 안고 있다.

오랫동안 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경건서적은 웨슬리와 성결운동의 전통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케즈윅(Keswick) 계통의 성화론이다. 즉 구원(중생과 칭의)이후 획기적인 은혜, 제 이의 축복(second bleessing)으로 성화를 체험해야한다는 가르침이다. 과거 많은 경건서적을 썼던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 F. B. 마이어(Meyer), R. A. 토레이(Torrey)도 케즈윅의 성화론을 전한 이들이다. 지금도 많이 읽히는 A. W. 토저와 워치만 니의 책도 이런 가르침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성화를 열심히 추구하는 개혁교회 교인들이 그들의 갈망을 채워주지 못하는 개혁주의 성화론에서 돌아서 웨슬리- 케즈윅-오순절 계통의 성화론에서 그들의 갈한 목을 채웠다는 것이다.

바른 교리가 반드시 바른 실천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개신교 안에 뻥 뚫린 성화의 공백이 온전한 성화론으로 꽉 메워진다고 해서 성화의 열매가 풍성하게 나타나리라고 쉽게 낙관할 수 없다. 거룩함을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는 우리의 부패성이 올바른 성화론의 가르침을 받는다고 해서 그리 호락호락하게 꺾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의 삶과 실천은 성경과 교리에 기초하기에 성화의 실체와 이론 사이의 긴밀한 연결을 해체할 수는 없다.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성화의 부진함과 온전한 성화론의 결핍의 깊은 연관성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성화의 결핍은 성화론의 부재 뿐이 아니라 칭의론이 제대로 전파되지 않는데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칼뱅에 따르면 칭의론이 유일한 경건의 바탕이며 다이내믹이다. 칼뱅의 이름을 그렇게 우려먹으면서 그가 그토록 명백하게 가르치고 강조한 칭의론마저 제대로 전수되지 않은 것이 한국교회의 윤리적인 방종과 헤이를 야기한 하나의 요인일 것이다. 칭의론이 칼뱅이 가르친 대로 성화를 촉진하는 교리가 아니라 오히려 타락을 조장하는 교리로 왜곡되고 남용된 데서 그런 문제가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바른 성화론의 정립을 위해서는 칼뱅이 가르쳤듯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바탕과 맥락에서 칭의와 성화가 긴밀하게 연결되어있으면서도 구별되는 특성을 올바르게 밝혀주는 가르침이 절실하다. 거기서 더 나아가 성화를 교회라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 속에서 성령에 의해 역동적으로 진행되며 세상 속에서 빛 된 열매를 맺는 선교적 사명으로 이어지는 포괄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는 성화론의 발전이 우리 앞에 놓인 과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