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5장 12-19

                                             (목회와 신학 2000년 4)

 

                                                                         한천설 교수(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올해도 부활주일을 맞이하게 된다매 주일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들은 이 부활주일의 중요성을 너무도 잘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이 때문에 설교자들은 부활주일마다 부활신앙이 오늘 우리 신자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고그러한 바램의 끝에서 이 부활신앙을 모든 성도들이 마음에 간직하고 일년동안 부활의 증인으로 승리하며 살아가기를 소망한다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설교자들의 간절한 노력이나 바램과는 대조적으로 정작 부활주일은 신자들에게는 별 의미 없이 지나가 버린다고 하는 것이다그것은 아직도 부활신앙의 의미를 전혀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이 글의 목적은 지나치게 현실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 교회와 성도들의 현실을 점검하고부활을 믿고 그 신앙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겠는가를 고린도전서15장 12-19절을 중심으로 부활절설교를 준비하는 목회자들에게 도움이 주고자 하는데 있다.

 

1. 고린도전서 15장의 수신자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에 관한 논의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이었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그는 이 편지를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 보내고 있고그의 편지 수신자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이었다고 말하고 있다(고전1:2).

 

2. 고린도전서 15장의 기록 목적

 

바울이 15장을 기록한 목적은 그리스도 부활이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을 입증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이 장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역사적인 증거로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목격자의 증언들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을 뿐이다(5-8). 바울은 다음 두 가지의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고린도전서 15장을 기록했다첫째신자들의 미래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려고 한다둘째신자들의 미래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해 보장된다는 것을 그들에게 확신시켜 그들로 하여금 박해 속에서도 그 부활신앙으로 승리하며 살아갈 것을 권면하고 있다만일 이 두 가지 사실 중 어느 하나라도 부인하게 되면그것은 복음을 파괴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3. 고린도전서 15:12-19절 주해

 

이 본문에서 바울은 성도들의 미래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간접증명법을 사용한다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을 수 있지만, '죽은 자들의 부활'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그들이 설명이 불가능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이것이 바울이 1-11절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실재성에 대해 입증했던 중요한 이유이다고전 15장 1-8절에서바울은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받아들였던 복음의 몇 가지 기본적인 요소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고전 15장 12-19절에서 그는 만약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그들이 받아들였던 바로 그 요소들은 유효하지 않게 된다고 주장한다그러므로 예수의 부활을 선포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곧 바울에게 있어서는 신자들의 미래의 부활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반대로바울의 복음이 역사적인 그리스도 사건에 근거하고 있지 않는다면미래의 부활 사건이 갖는 특성은 지탱될 수 없을 것이다그와 같은 사고는 고린도전서 15장에 나타난 바울 사상의 역사적이고 종말론적인 구조를 부인하게 된다이를 납득시키기 위해 바울은 7개의 논증을 전개하고 있다.

  

(1) 만일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은 공허한 것이다(14).

 

바울의 첫 번째 논리는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고린도 교인들이 그들의 신앙의 기초를 두고 있는 교리 속에서는 어떠한 실제적인 내용도 없게 된다는 것이다또한 그들의 주체적인 헌신에 상응하는 실제적인 대상도 없게 된다그들은 지금까지 그들의 믿음을 메시야이시며구원자이시며또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집중시켜왔지만 만일 부활이 없다면 이 모든 것들은 환상일 뿐이다바울이 기독교의 메시지를 공허한 것이라고 묘사한 것에는 다음 몇 가지의 개념이 포함되어있다.


(a) 그것은 중요한 내용이 비어있다.

(b) 그것은 거짓이며 속임수이다.

(c) 그것은 아무 효과도 없고쓸모도 없으며단지 헛된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기독교의 메시지는 바울에게 있어 중요한 내용이 비어있는 것이며거짓이며속임수이고아무 효과도 없는 쓸모 없는 것이다부활이 없는 복음은 일종의 사기인 것이다.


(2) 만일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그리스도인들의 믿음'도 공허한 것이다(14).


바울의 두 번째 논증은 부활 없는 믿음은 헛된 것이라고 말한다우리는 바울의 이 논증에 있어 '공허함'이 갖는 중요성을 이렇게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만일 고린도 교인들이 복음 가운데서 부활을 제거해 버린다면 복음의 통로를 지탱하고 있는 두 기둥 중 하나가 쓰러지게 될 것이고그와 함께 구조물 전체는 무너지게 될 것이다더 이상 부활에 의지하지 못하는 기독교는 비록 십자가에 못박힘이라는 다른 하나의 기둥이 비록 어렵게 서있기는 하지만결국은 붕괴하게 될 것이고 그런 믿음은 헛된 것이 될 것이다.

   

(3) 바울의 세 번째 주론은바울 자신을 포함한 사도들이 복음을 선포할 때에 하나님의 하신 일을 잘못 증거한 거짓증인이라는 것이다(15).

  

이 말의 뜻은 사도들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다"고 하나님에 대해 증거했는데만일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들은 거짓 증인들이라는 것이다즉 하나님께서 살리시지 않은 그리스도를 살리셨다고 전한 우리는 거짓증인이 되고 말 것일라는 말이다우리는 바울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풀어서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당신들은 우리가 '서투른 설교자들'일 뿐만 아니라, '거짓 증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만일 당신들의 말이 정말 옳다면 서투른 설교자라는 말은 우리가 청중들을 단지 기쁘게 하고 현혹하기 위해 전혀 무가치한 육체에 관하여 사람들이 헛된 기대를 가지도록 선포한 자들이라는 말이다또한 거짓 증인이라 함은우리가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개인적인 지식에 근거해서 당신들이 볼 때 꾸며낸 이야기임에 틀림없는 것을 하나의 사실로서 증명하는데 익숙하기 때문이다이러한 바울의 논의를 다시 삼단논법으로 그려 볼 수 있다.

 

(a)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했다.

(b) 그러나 고린도에 있는 어떤 사람들에 의하면부활은 없다.

(c) 그러므로우리는 거짓 증인임에 틀림없다.

 

어느 누구도 문장 (a)를 논박할 수 없을 것이다문잔 (c)만약 (b)의 결론이 틀리지 않다면 (a)와 (b)에서 필연적으로 따라온다이제 그러한 부담감이 바울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왜냐하면 만일 고린도 사람들의 말이 사실이라면분명히 하나님께서 잘못 증거했다고 자신을 심판하실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더군다나그와 다른 사도들은 그 복음을 선포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포기했고많은 고난을 겪었으며또한 심한 박해를 받았는가그런데 만일 그 모든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닌 거짓 증거요 잘못 증거한 것이라 한다면 이 얼마나 비참한 결과란 말인가삼키기에 얼마나 쓰디쓴 약인가!

 

(4)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헛것이다(17).

 

'마타이오스'는 헛된무익한아무 효력 없는거짓되고 악한그리고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또한 그것은 종종 극단적인 헛됨과 좌절 등을 표현하기도 한다그렇다면 14절에서 사용되었던 '케노스'와 이 절의 '마타이오스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이 용어들은 종종 히브리어 평행법 가운데 서로 상응하는 요소로서 유사하게 사용되기도 하고또한 어떤 경우에는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함께 등장하기도 한다이 용어들이 사용되고 있는 여러 방식들을 고려해 볼 때이들 용어 사이의 차이점은 그 기본적인 차이라기 보다는 강조상의 문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이 점이 이 용어들이 때때로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하고 때때로 구별되어 사용되지만더 자주 서로 중복되어 사용되는 이유인 것이다아무튼 이들 단어들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14절에서 언급했던 대로만약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당연히 아무 의미가 없는 헛된 것이 된다는 뜻이다.

 

(5)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아직도 여전히 '죄 가운데'에 있다(17).

 

다섯 번째의 바울의 논리에서 이제 우리는 하나의 아주 충격적인 사실을 만나게 된다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아직도 여전히 죄 가운데에 있다"라는 것이다이 구절을 통해서 바울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가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의 의미가 신자들이 그의 죄된 성향을 정복해 가는 과정을 의미한다고 한다이러한 견해는 신학적으로 그럴듯하다그러나 문맥상으로 볼 때 특히 그 다음 절바울이'너희 죄 가운데에'라는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을 특징짓는 죄되고 저주받은 상태를 지칭하고 있다는 것이 더욱 타당해 보인다만약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그리스도인들도 불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죄되고 저주받은 상태에 동일하게 머물고 있다는 의미이다어떤 사람은 여기서 강하게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이미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셨는가그런데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의 구원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부활과 상관없이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는데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아직도 우리가 죄 가운데 있다고 말하고 있는가도대체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의 구원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그 질문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이러하다바울은 그리스도의 구속적 죽음이 갖는 효과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지는 않는다하지만 그는 분명히 말하기를만약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믿고 있는 것에 상관없이 "여전히 그들의 죄 가운데에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바울에 의하면그리스도는 그의 죽음만을 통해서는 그 누구도 구속할 수 없었다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의 구속적 죽음이 갖는 효과에 대한 단순한 증거의 차원을 훨씬 넘어서서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행해진 주님의 구속 사역인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사건들이다.구속의 완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예수의 죽음은 그의 부활이 그런 것처럼 동일하게 그가 승리한 사건으로 보여지며부활 또한 그의 죽으심과 동일하게 중요한 사건이었다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을 우리의 구원을 위한 수단으로그리고 부활을 단지 구원을 확인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이런 이유로 바울은 우리에게 "부활 없이는 어떠한 죄의 용서함도 없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4:25 참조). 이제 우리는 이 두 사건을 상호 보완적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고이 둘은 모두 그리스도의 구원의 목적을 성취하는데 있어 필수적인 것들이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이런 상호보완적 측면에 대해 Ramsey는 다음과 같이 잘 정의했다.

     

"사도적 기독교의 중심은 십자가에 못박히심부활인 것이다십자가에 못박히심만으로도 아니고 부활만으로도 아니며또한 전주로서의 십자가에 못박히심이나 마무리 연주로서의 부활이 아니라 복음에 실제적인 만큼 세상에 도전이 되는 그러한 방식에서 두 가지의 종합인 것이다"(Resurrection of Christ, p.19).

   

실제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라는 이중적 관점은 바울 사도의 모든 관점에 반영되어 있다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결코 분리할 수 없는 사건으로 죽음이 없으면 부활이 없고부활이 없으면 죽음의 의미가 상실되는 것이다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의 구원에 있어서 죽음 못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아니 오히려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데바울에게 있어서 부활은 구속의 완성구속의 종결로 이해 될 수 있기 때문이다우리는 결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대칭시켜서는 되지 않지만구속의 완성은 그리스도의 죽으심보다는 부활을 통하여 더 결정적으로 성취된 것이다이것이 17절에서 바울이 성도의 구원과 관계하여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동시에 강조하는 이유인 것이다.

 

(6) 만약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사람들도 망하였을 것이다(18).

 

비록 '코이마오'가 일차적으로 잠들다눕다잠자리에 들다를 의미하지만바울은 그것을 죽음에 대한 은유적인 언급으로만 배타적으로 사용한다그것은 선하든 악하든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부자이든 가난한 자이든 간에 죽은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적용되지만사도 바울은 그리고 다른 초기 기독교 저자들은이 용어의 은유적 용법을 전적으로 신자들에게만 한정하여 사용하고 있다(고전11:30; 15:6, 18, 20, 51; 살전4:13-15). 이것은 '죽음'이 무엇인지를 바라보는 기독교의 접근에 있어서근본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즉 기독교인들에게 '죽음'이란 죽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아마 기독교가 죽은 사람을 이처럼 변화된 시각으로 바라보도록 한 것 이상으로 초기 기독교를 더 잘 특징지을수 있는 것은 거의 없을 것이다.이교도들에게 있어 '죽음'이란 모든 것의 끝을 의미했다그것은 마지막에 모든 사람들을 패배시키는 대적이었다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죽음'은 단지 '잠자는 것', 그 이상의 사건이였던 것이다.


반면불신자들의 운명에 대한 신약의 묘사는 이교도들의 생각하는 것 보다 더욱 비참하고 두려운 것이었다죽음이 신자들에 대해 의미하는 것과 불신자들에 대해 의미하는 것 사이의 강한 대조가 있기 때문에바울과 다른 신약의 저자들은 죽은 신자들의 상태를 설명하는 용어와 불신자들의 죽은 상태를 설명하는 용어를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다일반적으로 '아폴뤼미'란 용어는 죽이다죽다혹은 파멸시키다를 의미한다이 단어는 종종 '멸망'이나 '필연적인 파멸등의 개념을 갖기도 한다복음에 의하면예수 그리스도는 불신자들이 당연히 당하게 되어 있는 이 영원한 멸망과 고통의 두려운 운명으로부터 그에게 속한 자들을 구원하신다고 했다또한 성도들은 그것을 믿고 소망하고 있다그런데 만일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사람들은 불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멸망과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이것은 단지 복음을 들은 사람들뿐 아니라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전도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었다.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헛것이고전혀 무의미한 것이 되는 것이다그것은 더 이상 복음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기 때문에 그들은 영원히 멸망당하는 자가 아니라 언젠가는 다시 깨어날 잠시 '잠자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7) 만일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뿐이라면모든 사람가운데서 우리가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이다(19).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교리적 오류를 비판하는 이 구절에서 마지막으로 강조하는 것은 그들의 소망을 단지 이 세상의 삶에만 국한시켜버리는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미래의 부활이라는 놀라운 소망을 가지고 있다그들의 이러한 미래 소망은 죽음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변형시켰을 뿐만 아니라동시에 그들로 하여금 비천함과 고난그리고 극심한 박해와 어려움들을 그리스도를 위해 즐겁게 견디도록 동기 부여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그 결과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셨던 한 분을 위해서 위험을 감수하였고이 세상에서 기쁘게 자신의 생명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이다그렇다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었는가어떻게 세상 사람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었는가비록 지금은 이 땅에서 죽어가지만 이것은 잠시 '잠자는 것'이요주께서 부활하셨듯이 그렇게 다시 살 줄을 믿는 부활신앙 때문이었다결론적으로 말하자면부활신앙이야말로 신자들로 하여금 이 세상 속에서 이런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삶'을 살아가게 만든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요 능력이었던 것이다.

     

요약하면바울은 고전 15:12-19절에서 간접 증명법을 사용하며미래의 부활을 부인하는데 따르는 논리적이고 비극적인 결과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려 했다특히 바울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자의 부활과의 관계인데미래의 부활은 부인하는 반면에 그리스도의 부활은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스스로 모순되었다고 논증하고 있다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면신자들도 그러할 것이므로이 부활 신앙으로 힘있게 살아가라고 권면한다.

 

4. 부활주일 설교를 위한 제언

  

어떤 사람들은 오늘 우리는 부활을 부인하지도 않는데고린도전서 15장의 본문이 2000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고 반문할지도 모른다그러나 부활을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그것은 지식적인 것으로 그치고 삶의 열매로 나타나지 않을 때는 더 비참하고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만일 어떤 사람이 "나는 죽어도 주님께서 나를 다시 살리실 줄 믿습니다그렇게 신앙을 고백하기는 하는데전혀 그 고백에 걸맞는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면 도대체 그 고백의 의미가 무엇이란 말인가차라리 그런 신앙을 고백하지 못했던 일부 고린도 교인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일까행동을 보면 신분을 예측할 수 있어야 하고신분을 알면 그 사람의 행동을 예상할 수 있어야 한다그런데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소위 '성도'라고 하는 사람은 많은데그 사람들의 인생관이나 가치관그리고 행복관을 보면서 그 사람의 신분을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이것은 결코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다하나님의 백성이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

 

부활을 믿는 사람이라면부활을 믿는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부활신앙을 소유한 사람은 반드시 그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답게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한다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무엇을 말해 줬는지어떻게 역사한 것인지깊이깊이 생각해야만 한다부활은 단순히 죽은 다음에나 생각해야 하는 피상적인 문제가 결코 아니었다먼 미래의 피상적인 이야기 아니라사도들로 하여금 '지금여기에서힘있는 삶을 살게 했던 것은 현재의 능력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바울의 글을 통해 그리고 신약성경을 통해 거듭 확인하게 되는 것은 부활신앙이란 것이 얼마나 신자들의 삶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그리고 그 부활이란 것이 현재 신자들의 삶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지를 확인했다바울은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칭의와 믿음그리고 전체 신앙마저도 다 공허한 것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그러나 오늘 우리 신자들의 모습을 보면 과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한 자로서 능력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염려가 될 때가 많이 있다부활이란 것은 과거 이천 년 전에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서 일어났던 과거의 한 사건이나혹은 신자들이 죽은 후인 먼 미래에 일어날 피상적인 것이 아니다그저 알고 있다고 되는 것도 지식의 문제도 아니고또한 부활은 1년에 한번 부활주일에만 기억하고 기념하면서 살아가야 할 성질의 것도 결코 아니다.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도그 안에서 새 생명을 부여받은 자로 살아가지만또한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으키시리라는 부활소망을 우리는 동시에 기억해야 한다우리 한국교회가 이 부활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바로 인식하지 못하기에 부활에 대한 강조를 소홀히 하고그 결과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얻어진그래서 우월한 질적인 삶을 낳게하는 이 엄청난 능력을 소유하지 못한 채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이제 설교자들은 말씀으로 설도들을 다시 깨워야 한다바라는 것이 오직 이생뿐인 것처럼 보이는 세상과 더불어 울고 웃으며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그들을 향해 이제는 부활 신앙을 사진 사람답게 살아가라고매주일 "...몸이 다시 사는 것과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고 신앙 고백을 드리는 성도답게 그 신분과 고백에 걸맞는 삶을 살아가라고그래서 극한 방탕을 향해 달음질하는 세상사람들에게 '이상한 사람'으로 인정받으며 살아가야 한다고 이제는 성도들을 깨워야 한다(벧전4:4). 올해는 이런 부활의 메시지가 모든 강단에서 울려 퍼져서 세속화의 위기 앞에 직면한 다시 재무장함으로 이 땅위에서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