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승우목사는 왜 이단인가?


                                                                                                                   이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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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승우목사는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사람으로 보인다. 비성경적이며 이단적인 주장을 던져 놓고, 그것을 비판하면 그런 뜻이 아니라고 변명을 하며 빠져나갈 길부터 찾는 그런 비겁한 성격의 소유자로 보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자기를 비판하는 사람에게 갖은 욕설과 비난을 퍼부으면서, 뒤로는 빠져나갈 변명을 찾고 있다.

변승우목사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하고 싶다.

“이단적인 주장을 하려면 차라리 비겁한 변명을 하지말고 당당하게 주장을 하라. 비겁한 이중인격자보다는 당당한 이단이 되라”

          

변승우목사에 대해서 다음 문제를 살펴보자.

(1) 변승우목사는 ‘오직 믿음’을 부정한다

(2) 변승우목사는 ‘오직 은혜’를 부정한다

(3) 변승우목사는 ‘오직 성경’을 부정한다

(4) 변승우목사는 자신은 웨슬레안이므로 이단이 아니라고 거짓 변명을 한다.

(5) 변승우목사는 회개의 의미도 모른다

(6) 결론 : 변승우목사는 누가 보아도 이단이다

            

1) 오직 믿음을 부정한다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자력으로 온전한 의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그래서 예수가 우리의 죄를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 달리셔서 그 죄값을 대속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변승우목사는 믿는 자도 그 죄를 하나라도 회개하지 못하면 지옥에 간다고 하며, 믿는 자도 행함이 없으면 구원이 취소가 된다고 주장을 한다.

 

- 왜냐하면 예수님은 여기서 손, 발, 눈 즉 여러 가지 죄를 지어야만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라도 끊지 못한 죄가 있다면 그 죄와 함께 지옥에 던져진다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지옥, 27)

 

- 그러므로 천국에 가려면 이 말씀 그대로 회개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단 한가지라도 회개할 죄가 남아 있으면 안 됩니다. 모든 죄를 다 회개했어야만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참으로 회개한 사람이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지옥에 가는, 28p).

 

누가 보아도 변목사에게 믿음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믿는 자도 회개와 순종, 행함이 없다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 천국에는 예수 믿는 모든 사람이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 말씀대로 산 사람만 들어갑니다.(아무도, 71쪽)

 

그가 말하는 지옥의 조건은 믿음이 아니라 회개이며 행함인 것이다. 믿는 사람도 회개하지 못하면 지옥에 간다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변목사의 주장이 아닌가? 그런데도 변목사가 믿음과 회개를 함께 주장한다는 것인가?

 

- 지옥에는 두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다. 세상에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100% 지옥에 온다. 또 하나는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인데 회개하지 않고 죽은 사람은 모두 지옥에 온다.(지옥에 가는 크리스쳔, 58쪽)

 

- 이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율법을 몸으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는 결코 십자가 공로가 아닙니다. 그것은 실생활에서 몸과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것을 가르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의가 없는 자는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변승우,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68-69쪽)

 

- 그런데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한다’는 말씀 그대로 복음서를 읽을 때에 수없이 이런 부분들이 나오지만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신학자와 목회자와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직 믿음’이니 ‘은혜로 받는 구원’이니 하면서 사실은 자기들이 사용하는 단어들의 의미조차 제대로 모르면서 주의 진리를 대적합니다(아무도 너희를 대적하지 못하게 하라, 87-88쪽)

 

믿음과 회개를 분리시키는 저의도 매우 의심스럽다. 믿음과 회개를 서로 다른 분리된 과정으로 아는 신학적인 무지때문인가, 혹은 회개를 고의로 강조함으로서 믿음을 부정하려는 목적인가? 변목사는 도처에서 이러한 주장과 설교를 상당히 많이 하고 있다. 그런데 자신은 회개와 행함을 함께 강조한 것이라고 변명을 하는 자체가 우습다. “믿는 자라고 할지라도 죄를 하나라도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해놓고 그것이 단순히 강조한 표현이라는 뜻인가?

 

변목사는 정통신학에서 어떤 중요점을 단순히 강조하는 표현이 절대로 아니다. 그는 자신의 멧세지가 정통신학과 교리와 다르다고 말하고 있으며, 많은 목회자와 신학생이 자신의 주장으로 바꾸고 있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은 정통신학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정통신학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자기 스스로 자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 제가 전하는 메시지는 교단의 교리에 딱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리보다 더 성경적입니다. 그래서 지금 많은 목회자와 신학생들이 저의 설교를 듣거나 책을 읽고 자신들의 오래된 견해를 바꾸고 있습니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변승우, <지혜와 계시의 영>, pp.23-24).

 

변승우목사의 책을 읽어보면 그의 주장이 비성경적이고 비신학적이라는 것을 누구든지 알게 된다. 여느 이단과 마찬가지로 신학적인 뿌리가 부족하고 성경적인 지식이 부족한 일부가 미혹될 뿐이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큰믿음교회 측은 한기총에서 이단이 아니라고 발표되었다는 루머를 한기총에서 결의가 되기도 전에 인터넷을 통하여 계속 선전해 왔다는 점이다. 변목사는 스스로 정통교리와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왜 정통교단에서 이단이 아니라고 발표되기를 원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가? 게다가 최종적으로 발표된 한기총의 공식입장에 대해서는 욕설과 비난을 퍼붓고 있다. 즉 자신은 이신칭의를 부정하고 스스로 정통신학과 다르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갖은 욕설을 퍼부으면서, 한편으로는 한기총을 지지하는 것처럼 선전을 하지 않았는가? 몇몇 이단들이 정통신학과 다른 이단적인 주장을 가르치면서, 뒤로는 정통교단에 가입하려고 애를 쓰는 것과 같다.

 

- 여기 오직 믿음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역입니다. 이 말씀은 하박국에서 바울이 인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박국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합2:4,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러므로 ‘오직’이라는 단어는 로마서에서 덧붙혀진 것입니다....단지 번역과정에서 우리말 성경이 ‘오직’이라는 단어를 덧붙인 것입니다. 세계 어느 성경에도 ‘오직 믿음으로’ 라고 번역한 곳은 없습니다.(아무도 너희를, 23쪽)

 

공동번역과 현대인의 성경은 “오직”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킹제임스영어성경은 "The just"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는 왜 거짓말을 하면서 오직 믿음을 부정하려고 하고 있을까? 롬1:17의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니”라는 구절에 대해서 많은 성경학자들은 ‘오직 믿음을 강조하는 반복적인 표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변목사는 전혀 모르고 있다.

아래 글을 읽어보라. 그가 오직 믿음을 부정하지 않으며 회개와 행함을 함께 강조하고 있었다고 생각이 드는가? 그는 자기 주장을 대외적으로 당당하게 주장하지도 못하는 겁쟁이에 불과하며, 정통신학을 부정하면서도 혹시라도 정통교단에서 이단결의를 풀어줄 것을 기대하는 한심한 이중인격자이다.

아래 글을 읽어보라. 그가 오직 믿음을 부정하지 않으며 회개와 행함을 함께 강조하고 있었다고 생각이 드는가? 그는 자기 주장을 대외적으로 당당하게 주장하지도 못하는 겁쟁이에 불과하며, 정통신학을 부정하면서도 혹시라도 정통교단에서 이단결의를 풀어줄 것을 기대하는 한심한 이중인격자이다.

그는 종교개혁의 모토가 되는 이신칭의라는 개념 자체를 극구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 마르틴 루터는 성경에 대해 지독한 무지와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앞에서 말한 4권의 책이 행함에 의한 구원을 말한다고 하여 그 책들을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와같은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에 의해 개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오늘날 믿음과 행함에 대한 그토록 심한 편견과 무지가 교회 안에 있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지옥에 가는 크리스쳔, 102쪽)

 

-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이 말씀을(롬4:1-8) 설교할 때에 “현재 우리가 불의할 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 피를 믿는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 우리를 의인으로 간주해 주신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칭의이며, 이것이야말로 종교개혁을 통하여 부활된 지리의 가장 진수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장해야만 정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통은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에 일치하는 견해를 갖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주장과 일치하는 견해를 갖는 것입니다(지옥에 가는, 168쪽)

 

2) 오직 은혜를 부정한다

우리의 구원은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다. 인간은 자력으로는 단 한명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가 오신 것이다.

변승우목사의 눈에는 아마 아래 성경구절이 눈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딛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그렇다면 변승우목사의 주장을 살펴보자.

 

- 그런데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한다’는 말씀 그대로 복음서를 읽을 때에 수없이 이런 부분들이 나오지만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신학자와 목회자와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직 믿음’이니 ‘은혜로 받는 구원’이니 하면서 사실은 자기들이 사용하는 단어들의 의미조차 제대로 모르면서 주의 진리를 대적합니다(아무도 너희를 대적하지 못하게 하라, 87-88쪽)

 

변승우목사는 거듭남(중생)에 대한 개념과 칭의의 개념도 기독교와 전혀 다른, 행위구원론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도덕적인 변화, 인격의 변화가 있어야만 거듭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행위구원론이 아니면 무엇인가? 물론 거듭남은 도덕적인 변화와 인격적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좁은 개념의 거듭남일 뿐이며, 거듭남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다. 성령의 역사를 인간의 의지와 결단, 변화로 주장하는 것이 행위구원이 아니란 말인가?

전에 필자가 이것을 지적하니, 변목사는 아래의 글은 자기 주장이 아니라 에이든 토저의 주장이라고 반박을 하는 것을 보고 웃음만 나왔다. 변목사는 에이든 토저의 주장을 지지하지 않으면서 자기 책에 그 내용을 실었단 말인가? 더욱이 이것을 복음주의가 잃은 중요한 진리라고 평가를 하지 않았는가?

 

- 에이든 토저는 ‘개혁없는 중생은 없다’라는 제목의 탁월한 글에서 지극히 중요한 지적을 하였습니다. “도덕적 개혁이 있을 때까지 영적 중생이 있을 수 없다.... 죄인이 자기 생활방식을 기꺼이 개혁하려고 하지 않는 한 그는 중생의 내적 체험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인기있는 복음주의 신학의 나무 밑에서 잃어진 지극히 중요한 진리이다”(지옥에 가는, 150쪽)

 

- 성경은 도덕적인 변화 즉 인격과 생활의 변화를 거듭남의 매우 중요한 표증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성경의 이러한 가르침에서 벗어나서 성경구절로부터 이끌어낼 논리적인 결론들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지옥에 가는, 156쪽)

 

오스본의 주장도 변목사는 동의하지 않으면서 그의 책에 심심해서 인용하였는가?

 

- 그리고 T.L. 오스본 역시 거듭남의 비밀이란 책에서 거듭남에는 의지의 결단에 의해서 죄에서 돌이키는 내면의 변화와 목적의 변화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능동적인 의지를 가져야만 합니다. 그러면 능동적인 의지만 가지면 됩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은혜의 수단(믿음이나 거듭남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체인 성경을 읽거나 말씀을 듣는 것, 자백, 기도등의 노력을 의미하는 것)을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변승우, 지옥에 가는, 151쪽)

 

그렇다면 교회사에서 어떤 인물이 거듭남(중생)을 도덕적인 개선이며 의지의 행동이라고 주장하였을까? 행위구원론자로서 대표적인 이단이었던 펠라기우스가 그렇게 주장하였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중생에 대한 다양한 견해

펠라기우스의 견해 : 펠라기우스에 의하면 사람의 자유와 개인적 책임은 그가 언제든지 죄를 짓는 것처럼 죄를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고 한다. 단지 의식적인 의지의 행동만이 죄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중생은 단순히 도덕적 개선으로 구성된다. 그것은 전에 율법을 범하는 것을 선택한 사람은 지금도 그것에 순종하여 살기를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루이스벌콥, 벌콥조직신학 하권, 기독교문사, 230쪽)

 

펠라기우스는 “If I ought to, I can do” 라고 말하였다. 그는 원죄를 부정하였으며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로 의인이 될 수 있으며 거듭날 수 있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더 놀라운 변목사의 주장이 있다.

인간이 스스로 의가 있어야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놀라운 행위구원론을 변목사는 그의 책에서 말하고 있다. 그는 예수 십자가의 공로로 인하여 예수의 의가 우리에게 값없이 전가되는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과연 변목사는 단순히 강조를 하기 위하여 과장을 한 것일까? 성경은 분명히 인간은 스스로 의인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예수가 대신 돌아가신 것이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는 예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며, 우리는 믿음으로 인하여 값없이 의인이라고 불려지는 것이다. 이것을 부정하는 목사가 이단이 아니란 말인가? 성경은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성경을 부정하는 이러한 주장이 행위구원론이 아니라면 누가 행위구원론인가?

변목사는 사람에게 의가 있어야만 하나님에게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여 변승우목사의 주장을 보면 죄인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 되고 만다. 결국 그가 말하였듯이 “죄가 하나라도 있다면 지옥에 간다”는 주장과 일치하고 있다. 그는 온 인류의 죄사함을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의 십자가 대속을 부정하는 심각한 이단이 아닌가?

 

- 하지만 우리 안에 의가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안에 의로움이라고 전혀 찾아 볼 수 없으며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만큼이나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거룩하심에 비추어볼 때 완전히 모순되는 일이기 때문이다(지옥에 가는, 166쪽)

 

과연 변승우목사는 오직 믿음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단지 회개와 행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과장적인 표현을 한 것인가?

 

- 무엇보다도, 목회자들이 너무나도 복음에 물을 타서 희석시켜서 복음전파는 더 이상 의를 전파하는 것이 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즉 귀신도 가지고 있는 사변적인 믿음을 낳을 뿐 사람들로 하여금 의를 행하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교회 안에서 노아나 롯처럼 의로운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그러므로 구원받는 사람이 적다는 것은 결코 이상한 말이 아닙니다”(변승우, <주여>, p.30).

 

- 만일 우리가 행위를 믿음의 행동이나 표현으로 이해한다면, 행위는 우리의 칭의에서 배제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믿음으로만 아니라 행위로도 의롭다함을 얻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은 마음 속에 있는 믿음 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 마치 몸의 움직임과 활동이 몸에 있는 생명의 표현이듯 믿음이 가지고 있는 생명의 표현인 행위들도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말입니다(지옥에 가는, 127쪽)

 

아래 글을 읽어보라. 그가 오직 믿음을 부정하지 않으며 회개와 행함을 함께 강조하고 있었다고 생각이 드는가? 그는 자기 주장을 대외적으로 당당하게 주장하지도 못하는 겁쟁이에 불과하며, 정통신학을 부정하면서도 혹시라도 정통교단에서 이단결의를 풀어줄 것을 기대하는 한심한 이중인격자이다.

 

3) 오직 성경을 부정한다

 

- 내 손에는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다림줄이 있다. (변승우 ,다림줄 pp 103-104)

 

변승우목사는 자신이 성경해석의 다림줄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므로서 여느 이단교주들과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다. 또 그는 세계에서 유일한 성경해석의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성령에게 책의 제목과 내용까지 계시받는다고 주장한다.

 

- 이것을 보여주시며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통하다. 이것을 어찌 방언 통변이나 다른 은사들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 은사를 누구에게 줄까? 미국, 영국, 독일, 유럽과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사람을 찾다가 너를 발견하고 너에게 이 은사를 주었는데 너는 이 은사로 인해 내게 한 번이라도 감사한 일이 있느냐? 늘 방언 통변이나 신유의 은사를 주지 않는다고 불평만 하지 않았느냐? 내가 다른 작은 은사들을 주고도 감사기도를 받는데 이런 엄청난 은사를 주고도 감사하다는 말은 못 듣고 늘 불평만 들으니 이 얼마나 원통한 일인가?”(변승우,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 "하나님은 도대체 변 전도사님에게 무슨 은사를 주셨습니까? 무슨 은사를 주셨기에 아홉 가지 은사를 다 체험한 저에게 저렇게 당돌한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누가 기록했느냐?” “성경은 선지자와 사도들이 기록했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이므로 성경의 저자는 성령님이십니다.” “네 말이 옳다. 나는 이 시대의 많은 나의 종들에게 말씀의 은사를 주었다. 그러나 성경 저자들이 성경을 쓸 때에 임했던 그런 영감을 준 사람은 이 종 하나뿐이다. 나는 그에게 단순히 말씀의 은사가 아니라 성경 저자들이 성경을 쓸 때 가지고 있었던 그런 영감을 주었다. 이 말을 오해하지 말아라. 이것은 그가 다시 성경을 기록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성경은 이미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할 것이다. 그가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틀림이 없을 것이며, 내가 직접 하는 말과 같을 것이다. 그러니 이 은사를 어찌 다른 은사들과 비교할 수 있겠느냐?”(변승우,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 성령님께서 순간적으로 제게 부어주신 설교는 대게 새롭고 영적인 비밀을 담고 있으며 매우 중요하다(변승우, 대부흥이 오고 있다, pp.237-238, pp.240-241).

 

- 성령께서 책 제목과 내용들을 계시해 주셨다” (변승우,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p.9).

 

변승우목사는 자신을 성경해석에서 절대화, 신격화하고 있지만, 실제로 변승우목사의 성경해석을 보면 거의 기초적인 지식조차 없는 황당한 내용이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그의 주장은 여느 이단집단의 교주와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는 성경공부를 하지 말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기독교의 주장인가?

 

- 성경공부를 많이 하면 점점 바리새인이 되어간다.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이 바리새인의 신앙이다. (변승우, 교회에서 가장 해악을 끼치는 이단의 정체, 2007.8.12 설교)

 

- 성경공부 가르치고 성경을 이해하고, 성경대로 살도록 하는 게 기독교가 되어 버렸다, 근데 이건 기독교가 아니라 종교다.

 

- 지금은 성령운동의 시대이기 때문에 단순히 성경만 아는 것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 충격적이지만 진실을 말씀드리자면 대부분의 주석과 신학서적, 대부분의 강해설교집과 성경공부 교재, 그리고 대부분의 설교자들의 설교와 심지어는 대형 교회 목사님들의 설교에 이르기까지 이런 불완전한 과정을 통해서 탄생되었습니다. 즉 거의 대부분의 주석과 강해집과 설교들이 사실상은 다림줄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 눈대중에 불과합니다”(변승우, <다림줄>, p.60).

 

- 교사가 성경을 사용하는 것은 선지자가 성경을 사용하는 것과 다르다. 교사는 성경저자의 의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선지자는 자신이 성령으로부터 들은 말씀을 성경말씀을 빗대어 설명한다”(변승우목사 카페)

 

- 정말 요즘 교회 안에서 삼위일체가 바뀌어 버렸습니다. 삼위 하나님이 성령님이 아니라 성경이 되어버렸습니다. (변승우, 대부흥이 오고 있다, p.245).

 

- 바리새인은 뭐냐! 바리새인은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그들의 신앙이에요. 이게 바리새인이에요. 신앙이 어떻게 어떤 내용으로 구성이 돼있어요?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여러분 이게 무서운 얘기에요. 이런 현상이 지금 교계에서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어요. 신앙이 뭐냐? 목회라는 것이 도대체 뭐냐? 그냥 성경 연구하고 그 다음에 성경 가르치고 이게 되어버렸다고! 성경 연구하고 성경 가르치고! 여러분 신앙이 이런 것으로만 형성되어 있으면 안돼요”(변승우, ‘교회에 가장 큰 해악을 끼치는 이단의 정체’, 2007년 8월 12일 설교).

 

과연 그의 책의 내용이 성령이 계시하여 주었다고 생각이 드는가? 변목사에게 책의 내용을 계시하여준 존재가 과연 누구인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지 않는가?

변승우목사는 오직 믿음도 부정하고, 오직 은혜도 부정하며, 오직 성경도 부정하므로 기독교가 아니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주장을 하다가 자신을 비판하면 그는 변명을 하며 숨는다.

 

4) 웨슬레의 견해와 같으므로 이단이 아니라는 변명

 

변승우목사는 자기가 웨슬레와 100% 동일한 사상을 가졌다고 주장한다.

 

- 끝으로 제가 찰스 피니의 소개로 존 웨슬리의 책을 읽었을 때에 저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사상과 똑같은 깨달음을 가지고 있는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저의 신학적인 견해는 존 웨슬리와 거의 100% 일치합니다. 그러나 저는 존 웨슬리에게 배워서 현재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며 다만 존 웨슬리의 글을 통해서 성령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변승우,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p.318).

 

변승우목사는 웨슬레목사의 성령과 자신의 성령이 같다는 주장까지 한다, 그렇다면 변승우목사는 웨슬레와 동일한 주장을 하여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변목사가 자신을 웨슬레와 같다고 하는 이유는 웨슬레의 등 뒤에 숨으려는 생각일 뿐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변승우목사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주장한 웨슬레가 무지하다고 평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웨슬레와 사상이 100% 같으므로 성령이 한분이라고 주장을 하다가, 웨슬레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 것을 알고 웨슬레는 무지하다고 한입으로 두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변목사의 성령은 원래 혀가 두 개인가?

 

-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게 하신다는 것에서 착각하는 분들이 굉장히 많다. 존 웨슬리도 이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존 웨슬리까지도.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고 하니까 그냥 믿음만 이야기하려고 한다. 존 웨슬리도 무지의 흔적이 역력하다. 그냥 믿음 이외에 다른 것을 이야기하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부산의 모 교회 원로 목사처럼 무지해서 믿음 이외에 다른 것을 이야기하면 다 이단이 된다. 예수님도 믿음 외에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제자의 조건도 말하고 회개도 말하고. 그러면 예수님 이단인가. 무식해도 정도가 있어야지. 존 웨슬리도 그런 안간힘을 쓴 흔적들이, 저는 존 웨슬리 책을 다 읽었기 때문에 안다. 그 책에도 그런 흔적이 나온다.(변승우목사 5월14일 설교, 뉴스파워)

 

변승우는 자신을 비판하는 이단연구가들에게는 웨슬레도 이단인가? 라고 반문한다. 그는 자기가 웨슬레와 같은 구원론을 가진 것으로 변명한다. 그러나 변승우는 교인들에게 설교를 하면서 웨슬레가 오직 믿음을 주장하였으므로 무지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롬1:17을 듣고 회심을 하였던 웨슬레의 체험에 대해서 알고 있다.

웨슬레가 회심 하기 이전의 구원관은 무엇이었는가? 그는 자신의 의지와 힘, 그리고 도덕적인 노력으로 의롭다함을 받으려고 노력하였다.

 

- 먼저 올드스케이트 이전의 웨슬레의 사상에는 인간은 도덕적인 선과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복종, 그리고 하나님의 법도를 지킴으로서만 구원받는다는 기본적인 원리가 있었다. 그러므로 웨슬레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 의롭다함을 받으려는 노력과 그 노력의 도적적 영적 결과로 하나님의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했다(웨슬레조직신학, 한영태, 167쪽)

 

그렇다면 웨슬레가 로마서 서문을 듣고 회심을 체험하였을 때의 그의 일기문과 그에 대한 해설을 보자.

 

- “나는 나의 마음에 이상스럽게도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주임을 믿는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그가 내 죄, 나의 자신의 죄를 가져 가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경험과 함께 웨슬레에게는 <아들의 믿음>이 왔으며, “율법 아래 살 때에는 전력을 다해 싸웠어도 패배자일 따름이었는데 이제 은혜 아래에서는 승리자가 된다”는 새로운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이 경험은 자신의 선한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으려다가 실패한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종교개혁자의 교리로 돌아가게한 계기가 되었다.(웨슬레조직신학, 한영태, 169쪽)

 

변승우목사는 웨슬레목사가 회개하기 이전, 거듭나기 이전의 잘못된 생각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거듭난 이후의 웨슬레를 무지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를 비난하는 이단연구가들에게 자신이 웨슬레 사상을 갖고 있다고 변명하면서 웨슬레가 이단이냐고 변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5) 변승우 목사는 회개가 어떤 의미인지도 모른다

 

구원의 조건 : 구원은 단순히 믿음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와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의 조건 중의 하나가 회개라는 사실이 망각되고,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또한 구원의 다른 조건 중에 하나인 믿음에 대한 가르침 역시 충분하지 않습니다. (큰믿음교회의 양육교재, 다림줄)

 

변목사는 믿음과 회개를 다른 것으로 구별하기 때문에 이러한 잘못을 범하고 있다. 하나님을 믿지 않던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곧 회개이다. 또 하나님을 잘못 믿고 있던 사람이 올바른 믿음을 갖게 되는 것도 회개이다. 회개를 뜻하는 ‘메타노에오’라는 용어는 원래 “방향수정”을 가르키는 의미로서, 불신자가 하나님을 향하여 방향수정을 하므로서 믿음을 갖는 것도 회개이다. 그래서 존 머레이는 “회개하는 믿음” 혹은 “믿는 회개”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며, 웨인그루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따라서 최초의 믿음과 회개는 생애 중 단 한번 있는 일이고, 그 일이 일어날 때 참된 회심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믿음과 회개의 마음의 자세는 회심때 단지 시작될 뿐이다. 그 때의 그 자세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지속되어야 한다.(웨인그루뎀, 조직신학 중권, 345쪽)

 

다시 말하여 회개는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 방향수정을 말하며, 그 회개가 곧 믿음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막 1:15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변목사는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회개와 믿음을 구별하고 있는데, 이 구절은 회개와 믿음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즉 회개(방향수정)하고 믿으라는 것이다.

 

행 20: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이 구절 역시 회개와 믿음을 구별한 것이 아니라, 방향수정이 곧 믿음이라는 구절이다. 즉 변목사는 성화의 과정에서 반복적인 죄의 회개와 믿음의 과정에서 방향수정의 회개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변목사는 회개를 오직 죄에 대해서만 사용되는 개념으로 알고 있다. 실제로 변목사의 책을 보면 회개를 죄에서 떠나는 것으로만 이해하고 있다.

 

- 회개는 죄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변승우, 지옥에 가는 크리스쳔, 54쪽)

 

- 성경에서 요구하는 회개는 죄를 떠나고 모든 죄에서 떠나는 것입니다.(지옥에 가는 크리스쳔, 57쪽)

 

변목사는 회개라는 신학적인 용어의 개념조차 모르는 것이 그대로 밝혀진다. 그래서 변목사는 믿음과 회개를 다른 것으로 구별하여 서로 다른 구원의 조건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즉 믿음과 회개를 우리는 ‘회심’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단회적이다. 이 개념에서 회개는 결국 불신으로부터 방향전환이 되는 믿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거듭난 사람에게 회개라는 용어는 성화라는 과정에서 반복적인 개념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 회개는 구원을 받지 못할 수도 있는 조건적인 개념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성화적인 과정을 뜻한다.

그러나 변승우목사는 믿음과 회개를 함께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성화과정의 회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여지는데, 그는 믿음과 회개를 각각 다른 구원의 조건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변목사는 자신이 웨슬레안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웨슬레의 주장을 살펴보자. 웨슬레는 죄에 대한 회개, 즉 중생 이후 성화과정에서의 죄에 대한 회개는 칭의에 선행하는 회개와 다르다고 말하고 있다.

 

- 이 회개(중생후의 반복적인 회개)는 칭의에 선행하는 회개와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여기서 회개는 죄책이라든가 정죄라든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의식이라든가 하는 것들과 연관되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깨달음이니 곧 우리 마음 속에 아직 남아있는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곧 육에 속한 마음입니다. 중생한 사람들 속에서도 그것이 남아있으나 지배하지는 못합니다.(웨슬레 조직신학, 성광문화사 199-200쪽)

 

그렇다면 믿음의 시작을 뜻하는 방향수정의 회개와 믿음을 웨슬레는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요? 물론 웨슬레안과 캘비니즘은 차이가 있지만, 변목사가 자신이 웨슬레안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웨슬레안의 신학으로 살펴보아서 변목사의 주장이 잘못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 구원의 조건으로서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언제나 결합되었다. 둘 다 선행은총에서 나오지만 구원의 믿음이 구원의 조건인 것과 마찬가지로 구원의 도구라는 점에서 다르다. 그러므로 믿음은 은총으로부터 흘러 나오고, 회개가 뒤따른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믿음은 구원의 유일한 조건이고, 회개는 믿음의 조건이라고 자주 말한다. 둘 다 구원의 상태로 적절하게 인도하는 것이지만, 오직 구원의 믿음만이 책망의 구원으로 전환하는 지점이 된다. (웨슬리안 조직신학, 도서출판 세복, 317쪽)

 

웨슬레는 하나님에게 향하는 방향수정적인 회개와 믿음은 구별하지 않았고 결합시켰던 것이다. 하나님에게로 방향수정을 하는 것이 곧 믿음이기 때문이다. 굳이 개념적으로 구별한다면 하나님께 향하여 회개를 하여야 믿음이 시작되므로 믿음은 구원의 조건이고, 회개는 믿음의 조건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웨슬레는 의롭다함을 받는 것에서 믿음과 회개의 관계를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 웨슬레는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 데에 있어서 회개와 그 열매를 믿음과 동등한 위치에 둔 것은 아니다. 위에 인용한 그의 ‘성서적 구원의 방법’이라는 설교문에서 그는 회개와 그 열매는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데 대단히 필요하나, 그러나 믿음과 같은 의미에서 같은 정도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다만 조건부로 필요하다. 즉 시간과 기회가 있는 경우라면 몰라도, 그렇지 못한 경우라면, 십자가의 도적처럼 이것(행함)이 없이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다.....그러나 믿음이 없다면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다. 회개와 그 열매는 다만 간접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믿음은 직접적으로 필요하다(웨슬레신학, 송흥국, 108쪽, 성서적 구원의 방법 2권 451-452 인용)

 

- 1744년 연회의 기록을 보면, 웨슬레는 회개는 ‘저급의 신앙’(a low species of faith)이며, 그 열매는 은혜로 말미암는 결과라 하여 이를 신앙의 범주에 넣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회개는 저급의 신앙, 즉 진노하신 하나님에 대한 초자연적 감각“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그가 회개와 그 열매가 칭의에 불가결하다는 것도 결국은 의롭다함을 받는 유일한 조건이 믿음이라는 그의 주장에 귀결된다고 볼 것이다(같은책, 108쪽)

 

그렇다면 웨슬레는 행위와 칭의의 관계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 요한 웨슬레 목사와 이 연회의 회집자들은...... 행위로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가장 위험하고 가증스러운 도리로 생각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엄숙히 선언한다. 즉 우리가 현세에서나 심판 시에 칭의나 구원에 있어서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이외의 다른 것을 믿는 일은 없다. 그리하여 시간과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행을 하지 않는 자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을 지라도(따라서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선행은 어디까지나 혹은 부분적으로나 또는 전체적으로나 우리가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우리의 공로가 된다거나 그 보상이 될 수는 없다(웨슬레신학, 송흥국, 109쪽)

 

- 믿음만이 칭의의 유일한 조건이므로.... 불경건한 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는 순간, 그는 행함이 없어도 그 믿음을 의로 여긴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가졌을 지라도, 믿음이 없으면 의롭다함을 받지 못할 것이요, 그 반면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믿음만 있다면 그는 의롭다함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흉악한 죄인으로서 지옥의 형벌 밖에 받을 것이 없을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에 자신을 내 맡길때 그 시각으로 그는 용서함을 받는다.”(웨슬레신학, 송흥국, 111쪽, 웨슬레의 표준설교 인용)

 

(6) 결론 : 변승우목사는 누가 보아도 이단이다.

 

변승우목사는 구원의 조건이 되는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를 부정하는 행위구원론자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전세계에서 유일한 성경해석의 은사를 받았거나 자신이 성경의 다림줄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므로 ‘오직 성경’을 부정하는 사람이다. 그는 마틴 루터와 웨슬레, 종교개혁자들도 모두 무지한다고 비난하며, 정통기독교의 신학과 성경해석까지 모두 부정을 한다.

정통교단의 교리와 장정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변승우목사의 구원론을 이단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사람들의 주장에 경악하고 있다. 더군다나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이대위 위원들이라는 사실이 더욱 놀랍다. 예수의 십자가 대속을 부정하는 행위구원론이 이단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은 이대위 위원의 자격이 될 수 없다. 정통신학이 무엇인지 이단교리가 무엇인지를 구별조차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대위 위원이란 말인가? 변목사가 이단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대위 위원이 있다면 그들이 이단적인 사상에 동조하기 때문일 것이다.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변승우목사는 개혁주의 신학도 아니고, 웨슬레안도 아니다. 그는 정통신학이 아니라 행위구원론자일 뿐이다. 그리고 행위구원론은 초대교회부터 이단적인 주장이었다. 게다가 그는 신비주의자이며, 직통계시와 예언을 정당화하는 명백한 이단이다.

그렇다면 대표적인 웨슬레안의 감리교 교리와 장정을 살펴보자

       

(기독교대한감리회 교리와 장정)

제2장 교리 / 제1절 신앙과 교리의 유산 / 종교의 강령

23. 제 9조 사람을 의롭게 하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은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음이요. 우리의 행한 것이나 당연히 얻을 것을 인함이 아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 하는 것이 가장 유익하고 위로가 넘치는 도리이다.

24. 제 10조 선행

선행은 비록 믿음의 열매요 또한 의롭다하심을 따라오는 것이되, 능히 우리 죄를 없이하지 못하며 또한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에 위엄하심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선행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기뻐하시는 바요, 참디고 활발한 신앙으로 좇아 나오는 것인즉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아는 것 같이 선행을 보고 그 활발한 신앙이 있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도대체 어느 교단의 교리와 장정이 믿음으로 받는 칭의를 부정하고 회개와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되어있단 말인가?

웨슬레와 루터와 종교개혁자들을 무지한 자라고 혹평하는 변승우목사는, 왜 자신이 웨슬레안이므로 이단이 아니라고 변명하면서 웨슬레의 등 뒤로 숨는가?

      

웨슬레교단인 예성과 기성도 변승우가 이단성이 있다고 공식규정하였으며 무려 7개 교단에서 변승우를 이단명단에 공식발표하였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 오직 성경을 철저하게 부정하며 정통기독교를 종교의 영, 사탄의 개라고 비난하던 변승우목사가 정통교단에서 이단으로 풀렸다고 거짓 선전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루터와 웨슬레등 종교개혁가를 무지하다고 비난하던 그가 자신을 웨슬레안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이단에서 풀어줄 것을 기대하는 것은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이다.

 

더욱이 교단마다 교리와 장정이 다르기 때문에 변목사에게서 이단성을 발견할 수 없다는 어느 이대위 위원의 주장은 지나가는 바퀴벌레가 웃을 일이 아닌가?